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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대선후보 열차와 입석 유권자들의 선택
욕망이라는 이름의 대선후보 열차와 입석 유권자들의 선택
  • 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
  • 승인 2017.03.02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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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젊은이가 있으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하세요?” 그러면 열에 아홉은, 그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좋아서요.” 나는 이 대답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한걸음 더 들어간다. “그냥,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데요?” 그러면 상대방은 이 질문에 당황하면서, 이렇게 답한다. “성격이 좋아서요.” “대화할 때 잘 통해서요.” “서로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똑같아요. 취향이 같죠.” 과연 이런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얼마나 유지할까? 

 
나는 차라리 다음과 같이 자기 욕망을 또렷하게 밝히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적어도 저를 굶기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저 사람 집에 돈이 많아서요.” “저 사람이 굉장히 잘생겨서요.” 
 
자기 욕망을 확실하게 드러내면 설령 나중에 그 욕망이 바뀌더라도, 그리고 점점 한계효용으로 인해 욕망이 생각만큼 채워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무엇에 만족했는지를 알기에 덜 실망한다. 반면 욕망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만족했던 순간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쉽게 실망한다. 이렇게 불만이 쌓이다 보면 ‘또 다른 선택기회가 있으면 더 잘할 텐데’ 하는 심리로 바뀌게 된다. 이런 마음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을 때, 그대로 나타난다. 
 
어떤 특정 후보를 왜 뽑으려고 하느냐, 왜 지지하느냐 라고 물으면 대개는 이렇게 답한다. “그나마 가장 나은 것 같아서요.” 무엇이 가장 나은 것 같으냐고 물으면 ‘지금 싸우자는 거야’하는 표정으로 돌변하며 “딱 보면 알지 않느냐”고 대답한다. 잘 모르겠으니 대답을 좀 해달라고 하면, “공약이 마음에 든다, 리더십이 있다, 사심이 없고 깨끗한 사람 같다” 등 자신이 생각하는 ‘대통령의 ‘조건’을 얘기한다. 그러면,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후보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줄 것 같습니까?” 그러면, 열에 아홉은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이 질문은 다름 아닌,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됐을 때 충족하고 싶은, 당신의 욕망은 무엇입니까?”인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야기된 국민의 고통이 새로운 대통령의 선택으로 치유될 것처럼 믿어지는 이 시점에, 우리는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될까요?’라고 묻고 있다. 진짜 해야 할 질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막연히, 아니 과거와 똑같이 잘나고 똑똑하고 제대로 된 훌륭한 어떤 분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구경꾼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 이다. 다시 말해, 가짜 문제에 사로잡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MB가 정권을 잡을 때, 야권 지지성향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정동영은 너무 약하다.” 물론 실제로 그가 약한 후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이런 진심이 담겨 있었다. “DJ와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이제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뿌리내린 것 같아. 권위주의나 독재 잔재도 많이 청산된 것 같고. 설마하니, MB가 된다고 이런 사회 분위기가 확 뒤바뀌기야 하겠어. 이렇게 사회가 나아지고 발전했는데 쉽게 후퇴할 리는 없지. 게다가 MB는 꽉 막힌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뭐 별 일이야 있겠어?”
 
욕망에 충실하라! 
정치가 욕망을 충족시킬 것이다
 
이렇게 안일한 상황 판단의 결과는, MB와 박근혜로 이어지는 잃어버린 9년, 절망의 4년이 된 것이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정치가 그 욕망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촛불집회로 인한 국회의 박근혜 탄핵은 그 사실을 잘 증명한다. 국민이 집회로 국회를 압력하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장면은 그 자체로 ‘욕망의 폭발’이다. 대통령 퇴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태극기, 성조기까지 동원해 탄핵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이 나라의 대통령 선거는 항상 보수와 진보의 대립인 것처럼 포장돼 왔다. 때로는 영남과 호남, 또는 동서(東西)의 대결처럼 언급되곤 했다. 이런 포장문구들은 언론이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단어들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 사람들에게 진보와 보수는, 단지 자신이 아닌 ‘적’을 공격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명명(命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보정권, 보수정권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인이나 국민에게 진정한 ‘진보’란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다. 단지, 막연히 이승만정권 때부터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이들은 ‘보수’고, 상대방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진보’로 보는 막연한 통념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꼭 진보, 보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지도 묻는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과거 일제식민지 시절이나 해방 이후, 군사독재정권, 그리고 민주화 시대라고 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까지 우리의 생존은, 그때그때의 지배적 이념이나 가치로 얼마나 잘 포장할 수 있느냐에 좌우돼왔다.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나 이념,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만일 그것과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는 말을 하면 공격을 받는다. 불만세력 또는 심지어 빨갱이, 우파꼴통, 보수꼴통 하는 식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세월호 문제, 메르스 사태에서도 박근혜 정부는 자신들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종북이나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기득권 세력에 대비시켜 국민들이 서로 싸우도록 했다.  
 
진보와 보수의 세력 대결처럼 보이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 선거는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생겨나고 있다. 놀랍게도 승리의 결과는 진보나 보수 등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선거에 참여하는 후보나 집단의 ‘욕망’에 좌우된다. 욕망이 강한 쪽이 이기는 싸움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된 후, 지난 30년 동안 모두 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동안 우리는 반복적으로 선택에 실망하고, 또 후회했다. 늘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느껴왔다. 왜 그런 것일까? 정말 대통령이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단임제가 문제일까? 헌법에서 대통령제를 뜯어 고치면 해결될까? 물론 제도 개선도 필요하겠지만, 나는 대통령을 선택할 때 우리 스스로가 ‘어떤 욕망을 반영해 선택할 것인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현재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며 70년 적폐 혹은 7년 적폐를 외치기도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수-진보’로 포장해 각기 다른 정치세력들이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적폐 청산’이라고 부르짓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자신과 다른 집단을 무조건 마녀 사냥식으로 거부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치집단이 잘 사용하는 꼼수인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알라, 알아야 이길 수 있다
 
지금도 여당이나 기득권 세력에 가까운 정치인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종북’으로 매도한다. 박정희 시대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자기들 이야기가 불리하거나 모순이 있으면 그걸 지적하는 사람을 종북으로 몰거나 빨갱이로 몰아버린다. ‘종북좌파’로 매도당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공격하는 세력들을 ‘일제 앞잡이’로 공격하기도 한다. 내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서로 서로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다. 반독재 투쟁을 했던 사람들은 적인 박정희를 일제 앞잡이라는 개념으로 공격했다. 결국 ‘빨갱이’와 ‘일제 앞잡이’라는 두 가지 적이 민주화 시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박정희 독재시절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종북이나 빨갱이로 몰았다. 이때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박정희를 단순히 독재자라고 하는 것보다 일제 앞잡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잘 먹혔다. 어느듯 ‘종북좌파-일제앞잡이 우파’의 도식은, 한국 정치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프레임이 된 것이다.
 
박근혜 퇴진이나 탄핵 논의가 나올 때,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일제잔재 철폐’였다. 이것은 전체를 보는 눈이 없거나, 있어도 제대로 보지 않으려 하고 ‘종북좌파-일제앞잡이 우파’의 프레임에 익숙하게 말려들어갔다는 의미다. 왜 그런 것일까? 정치를 통해 충족시키려는 우리의 욕망이 단순히, ‘나만 살면 된다,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된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 때문에 전두환 시절이 시작되기 전에, 군사독재를 청산하자는 분위기 속에서, 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도 이 나라 대중은 전두환을 뽑고 또 노태우를 뽑은 것이다.  
 
‘나만 살면 된다’는 욕망은 이 나라의 국민성은 분명 아니다. 인류의 본성이자, 외부의 위협이나 공포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시민으로서 제대로 의식을 갖추려면, 이 본능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고,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찾으려고 할 때는 바로 이 단순한 욕망에서 조금 더 큰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불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이 나라 공동체의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동물적인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공동체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찾고 공유하는 일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더 세분돼 인식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스스로가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막연한 대중의 욕망은 제대로 분화되지도 못하고, 또 충족되지도 못한 상황이다. 조기 대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자는 욕망이 더 강한 자(者)나 집단이 될 것이다. ‘진보-보수’를 떠나, 자신의 욕망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자신의 욕망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진보-보수’의 프레임으로 이 선거를 보려하는 사람들은 또 다시 속을 것이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기는커녕 숨겨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가진 ‘욕망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알 수 있을 때, 더 이상 후회하지 않을 대통령을 우리는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글·황상민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하버드대 심리학 석·박사. 하버드대 사이언스 센터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했으며, 현재 심리전문 연구와 상담을 하는 기관인 위즈덤센터의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일반인을 위한 심리상담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대통령> <사이버 공간에 또다른 내가 있다> <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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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
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