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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희망고문
3월의 희망고문
  • 최민경 | ‘3월' 이달의 에세이 가작
  • 승인 2017.03.3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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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가장 힘들었노라고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 새 학기를 맞은 아이들이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 학창 시절 내내 따돌림을 당하던 J는 그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고등학교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은 친해질 무리를 물색하는 시기였다. 학교는 좁았고, 아이들은 다른 반 친구들을 통해 누구의 평판이 어떻다든지, 누구는 따돌림 당했다든지 등의 정보들을 공유했다. 그렇기에 한 번 따돌림 당하면 전학을 가지 않는 한 영원히 따돌림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출발이었겠지만, 따돌림 당하는 이들에게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J는 새 학기에 대한 기대가 배신감과 절망감을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그에게 3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괴롭힘에 큰 이유는 없었다. 아이들은 줄곧 J의 외모와 소심한 성격을 조롱했다. 매년 학교에서 수거하는 학교폭력 설문지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담임도 다 알면서 방치하는 마당에 가해자들은 학교폭력이 없다고 응답했을 게 뻔했다. 설령 피해자가 폭력에 의해 피해 받았다고 증언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피해자가 아니라 학교의 명예와 평안이었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 목격 경험을 털어놔도 묻혔다. J는 결국 마지막 학년이 돼서야 다른 친구의 도움으로 따돌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광장은 학교와 달랐다. 소외와 따돌림 대신 연대가 있는 공간이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데도 광장은 평화로웠다. 그곳에 모인 무수한 촛불들은 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들을 기억했고, 물대포에 맞아 희생된 농민을 기억했으며 그들을 위해 불을 밝혔다. 촘촘하게 수놓아진 촛불들은 서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고, 매주 토요일 광장의 스피커에선 연대와 응원의 메시지가 넘쳐흘렀다. 주최 측도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 없는 시위를 위해 노력했다. 그 어느 때에도 없었던 시위문화였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도 연대하는 촛불들이 있는 한 세상은 더 나아질 거 같았다. 그리고 2017년 3월 마침내 촛불들이 작은 결실을 맺었다.
다들 희망에 차서 들떠 보인다. 지도자만 바뀐다면 세상이 이전과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요 근래 보았던 몇 가지 조짐들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촛불민심’이 중요하다던 정치인이 산재 피해자의 유가족이 아닌 ‘전문시위꾼’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유력 대선주자의 성평등 포럼에서 차별금지법 반대에 대해 항의하는 성소수자 여성에게 청중들이 “나중에”를 외쳤을 때 불안한 기시감을 느꼈다. 

산재 피해자 유가족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향해 ‘귀족노조’, ‘전문시위꾼’ 같다던 정치인이 생각하는 ‘촛불민심’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그의 말대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만 농성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대기업의 발전이 누군가의 인권보다 중요한 세상이라면, 광장의 연대는 신기루였던 것일까. 실언인지 속마음인지 모를 말을 내뱉은 정치인은 사과했지만, 일부 지지자들이 그 발언을 옹호하며 언론의 악의적인 편집이고 비지지자들의 악의적인 비난이라고 열을 낼 때 피해자의 존재는 무엇도 아닌 양 지워져버렸다.

광장 밖의 세상은 참 얄팍한 것이었다. 세상의 ‘변화’라는 것도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유력 대선주자는 성평등이 인권의 핵심가치라고 하면서도, 차별금지법은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신이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냐는 울부짖음에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나중에”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차별과 혐오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 사람들마저 소수의 목소리를 억압했다. 인권을 말하는 자리에서 인권보다 중요한 것은 예의였고, 누군가의 인권은 차등순위가 돼 미뤄지고 있었다. 

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던 광장을 기억한다. 광장은 누구에게나 발언권이 있었고 누구에게나 희망이 보였던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광장에서 바람에 힘차게 나부끼는 다양한 정체성들 중엔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깃발도 있었고, 반도체공장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을 위한 인권단체의 깃발도 있었다. 우리는 단순히 부정을 저지른 위정자가 물러나는 것만 요구한 게 아니다. 우리는 분명 그곳에서 그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권력을 가진 소수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 우리는 광장에서 무엇을 위해 싸웠던가.

얼마 전부터 찝찝한 무언가가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다. 이것은 나의 과오, 나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떨쳐버릴 수 없다. 고등학생 시절,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 친구의 고통보다 학업이 중요했고, 나도 엮여 괴롭힘을 당할까봐 모른 척 했던 사람이 있다. 떠올리기 괴롭고 부끄러운 기억이다. 분명 J는 이에 비할 바 없이 괴로웠을 것이다. 학업에 방해받지 않으려고 집단 따돌림을 모른 척했던 나, 명예와 평안을 위해 따돌림 피해자를 모른 척한 학교. ‘대의’를 위해 가만히 있으라는 사람들, 표를 의식해 사회적 약자들을 모른 척하는 정치인들. 

J를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의 J처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비관하는 그 애의 눈빛이 보이는 것 같다.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3월의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글·최민경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책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 책을 읽은 후 '약자의 고통을 타자화하지 않는 삶'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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