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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본은 잠들지 않는다, 다만 몰락할 뿐이다 - 리들리 스콧 감독 <올더머니>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본은 잠들지 않는다, 다만 몰락할 뿐이다 - 리들리 스콧 감독 <올더머니>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8.01.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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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흉상이 지배하는 어둠을 벗어나는 두 인물의 이야기

스콧 피츠제랄드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부자 개츠비가 매일 파티를 여는 이유가 고작 자신의 전애인과 마주치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되는 설정과 허망하게 죽는 모습을 통해 일생 모은 부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물질적 욕망 보다도 재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돈으로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목표이다. 영화 <올더머니>는 석유재벌 ‘위대한 게티’가 평생 무슨 가치를 위해 부를 축적했는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하며, ‘위대한 개츠비’ 이상으로 인간의 불가사의한 괴물적 욕망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은 거대 자본가를 비판하는 시각으로 시작되었다. 영화역사에서 그러한 영화의 본격 시작은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관 스물여섯의 열혈 영화청년 오손 웰즈에 의해 만들어진 <시민 케인>이 그 장본인이다. 웰즈는 그 작품을 통해 당대의 신문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위대한 기업인에서 한 소심하고  병약한 심지어는 변태적이기까지 한 마더 콤플렉스 소시민으로 깍아내렸다. 그 영화의 위력은 대단했다. 익명이며 허구임을 밝힌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영화를 본 누구라도 신문왕 허스트를 떠올렸고, 당사자는 영화가 더 이상 영향력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광고주와 극장에 압력을 넣었고  영화는 개봉 도중 중단 되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다. 이렇게 불멸의 영화 <시민 케인>은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 수 십 년을 창고속에서 썩게 된다. 
 
오손 웰즈는 미국의 나운규처럼 보인다. 나운규가 약관 20대에 앞뒤 돌아보지 않고 젊은 혈기를 불살라 <아리랑>(1926)을 만들어 일제에 저항의식을 보여줬듯이 웰즈 역시 스물 여섯의 나이에 자본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화를 만들어 미국의 거인같은 재벌과 맞섰다. 그 대상은 다르지만 억압받는 민중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계몽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같다고 본다.  1920년대 조선에서 제국주의가 억압했던 자유는 식민지상태로부터의 해방이었고, 1940년대 자본주의가 옭아맸던 시민들의 삶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시민 케인> 이후로 재벌의 권력욕에 대해 비판적 메스를 들이댄 걸작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1974)일 것이다.  그 영화의 재벌 노아 크로스는 한 형사가 수사해서 구속해 넣을 수 없는 거대한 악이다. 그는 정치, 경제를 다 장악한 인물로서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가는 미국 그 자체의 권력이다. 영화 <올더머니>가 그리는 실존 인물 폴 게티는 이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영화는 재벌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장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본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작동해선 안된다는 경고성 영화들이다. 영화의 장르는 하나 같이 사건을 풀어가는 미스테리 서사방식을 고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재벌의 죽음에서부터 그것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시민 케인>, 근친상간의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차이나 타운>, 손자의 인질 몸값을 절대 주지 않고 주더라도 세금까지 공제받는 불가사의 구두쇠 재벌의 정체를 추적해 나간다. 필름 느와르는 어둠의 장르다. 느와르는 살인사건이든 납치사건이든 미스테리를 추적해 가다보면 그 과정에서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조우한다. 그런 점에서 고전 느와르는 흑백의 강한 조명 대비효과와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통해 숨겨진 내면의 어둠을 상징하고자 했다. <차이나 타운>에 와서 그러한 고전 느와르 기법은 전복된다. 이제 화면속의 실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밤에 일어나는 사건들 대신 벌건 백주에 살인이 벌어진다.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 보다는 밝고 경쾌하게 사건이 전개된다. <올더머니>의 오프닝이 흑백에서 칼라로 변하는 것은 그러한 지점을 환기시켜준다. 과거의 역사라는 의미의 흑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흑백으로 표현했던 고전 느와르가 더 이상 아니라는 형식적 의미도 있다. 대체 고전 느와르가 변형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 아무 잘못도 없이 게티덕에 귀를 잘리게 된 희생자로서의 손자
 
1970년대 들어와 미국의 수정주의적 역사관에서 연유한 장르의 변형은 느와르의 소재가 더 이상 개인적인 서사가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취해짐을 알 수 있다. 단순히 형사와 범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차이나 타운>은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야기고, 권선징악이 아니라 그저 사회의 현상태를 확인하는 주제를 던져준다. 그래서 차이나 타운의 형사 기티스는 말한다. “여기는 차이나 타운이야”. 형사가 범인을 잡는 정의의 나라 미국이 아니라 미국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차이나 타운, 즉 무법천지란 말이다. <올 더머니>의 미국도 게티가 살아있는 한 법은 기능하지 못하고 정의는 죽어있다. 결국 게티가 죽었을 때 비로소 미국이 정상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1970년대 정서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의 주장을 믿는다면 여전히 미국은 대자본가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불구의 자본주의 국가일 수 밖에 없다. 영화는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 된다. 
 
이 영화는 관객 거리두기 전략이 사용 되지 않아 일방적으로 게티를 악한 인간으로만 형상화하는데 몰두한다. 게티가 왜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오로지 게티의 인간성이 이기적이라고만 해석한다. 선악이분법에 포획되면서 게티는 천성적인 악인으로까지 승화된다. 게티가 분명 악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악인의 인간적인 면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예술은 적어도 모든 인간의 이유를 들어줘야 한다. 헐리우드 대중영화의 방식이 한계를 갖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같은 헐리우드 대중영화면서도 재벌 하워드 휴즈의 사생활을 인간적으로 묘사한 마틴 스콜세지의 <애비에이터>(2004)나 더글라스 서크의 <바람에 쓴 편지>(1956)가 그려낸 재벌가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관객들을 극단적으로 동일시 시키지 않으면서 미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 로마황제 반열에 서고자 했던 게티의 흉상에 경악하는 게일
 
이 세상에 영원한 선악은 없다. 선과 악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식이다. 영화속에 단순하지 않게 변화하는 인간으로 그려진 캐릭터가 두 명 있다. 게티의 심복이었다가 막판에 그를 떠나는 전직 CIA요원 체이스이고, 손자를 납치했던 친관타이다. 둘은 변화된 인간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몸담고 있는 외적인 직업이나 하는 일과는 상관 없이 생존을 위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정확히 짐작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게티의 단순한 성격화는 아쉽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밝혀지지 않은채 한 인간의 개성 범주안에서 해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잠들지 않는 이유와 자본가가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좀 더 구조적으로 읽혔어야 하는데 말이다.   
 
손자의 귀가 잘린 사진이 실린 신문을 수백장 게티의 집앞으로 배달한 장면이 있다. 게티는 지나가다가 키처럼 쌓여 있는 신문더미를 발견하곤 하나를 꺼내든다. 그 안에는 프론트 페이지에 대문짝만하게 손자의 잘린 귀 사진이 실려 있고 구두쇠는 돈 한 푼 주지 않는다는 원망조의 글귀가 쓰여져 있다. 게티가 그 신문을 보는 동안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강풍이 분다. 이러한 날씨는 인정에 화합하는 하늘의 기운이라고 봐야 한다. 멜로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이러한 정서적 표현은 인간의 감정을 조율하려는 의도적 장치로 차용되었음직한데 두 개의 고전적 글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임금이 정치를 잘 못하면 하늘이 그에 상응하는 징후를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가뭄이 장기화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한 글이다.(1) 또 하나는 예수의 죽음을 기록한 ‘빌라도 보고서’다. 빌라도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자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황제에게 보고 했다. 
 
게티를 날릴 정도의 광풍은 분노한 하느님의 음성이었을까? 아니면 미국 대통령 및 국무위원들이 정치를 잘 못했기 때문에 하늘이 내리는 경고성 징후였을까? 게티도 일종의 황제고 그가 이룬 업적은 로마 못지 않은 제국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미국이다. 그는 자신의 전생을 황제로 기억한다. 그래서 로마까지도 사고 싶어했다. 그가 왜 재벌이 되고자 했는가에 대한 욕망의 근원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사람들에겐 나름 생존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게티의 이유는 황제가 되고 싶은 거였다. 그건 권력이고 초월이다. 게티의 욕망은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부터 외로워졌고 그때부터 순종하듯 침묵하는 예술품들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고 고독속에 유폐되었다. 그가 모은 많은 로마시대 조각 더미 가운데서 게티의 흉상을 발견한 며느리 게일은 경악한다. 그 장면은 재벌들에게 경고하는 멧세지일 것이다. 로마제국이 사치와 향락으로 멸망했듯이 재벌들도 언젠가는 멸망한다.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해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그 돈을 써서는 안되는 거였다. 
 
영화는 게티라는 한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은 게일과 체이스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게티의 어두움으로부터 밝음을 향해 달려온 사람들이다. 타락한 게티기업을 물려받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예상치 못했던 게일이다. 그 결말은 서크의 <바람에 쓴 편지>의 마지막을 보는 듯 하다. 그 영화에선 가장 방탕했던 딸이 성실한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 받는다. 여기선 거꾸로다. 가장 성실한 며느리가 타락한 시아버지의 사업을 물려 받는다. 미국 자본주의는 모순적이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잠들지 않는다. 대신 다시 태어나기는 한다. 중요한 것은 부패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는 희생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게티의 손자와 며느리 게일이 바로 그들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재벌가의 손자라는 이유로 납치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그의 고생은 천형(天刑)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는 부를 나눠주기도 하지만 부에 대한 선망과 계급갈등으로 인해 가족들에게는 고통도 수반된다. 게티도 고통속에 살았고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고통의 축적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올리버 스톤의 영화에 나오듯 ‘잠들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 버는 일이 악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만 돈을 버는 재벌은 언젠가 멸망한다. 게티 기업이 지금껏 존속하는 것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고 싶다. 
 
 
정재형은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1) 율곡 이이, 천도책(天道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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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영화평론가)
정재형(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