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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금이라도 국회를 전복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해야 할까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금이라도 국회를 전복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해야 할까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18.04.0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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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내일>(원제: Demain)에서 제시하는 내일은 진짜 내일이 될 수 있을까

 

프랑스 영화 <내일>(원제: Demain)은 기후변화, 자원고갈, 환경오염, 금권과두제, 민주주의 위기 등 전 지구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지속불가능의 징후를 파악하고 세계시민으로서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모색하는 다큐멘터리다.

 

우선 영화사에서 제공한 보도자료 중 "슬기로운 지구 생활자들을 찾아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쾌한 솔루션 다큐멘터리"라는 첫 문장은 틀렸다고 지적해야겠다. 유쾌하지도 않고 사실상 본질적 솔루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간단히 말해 "나쁜 영화인가?"라고 묻는다면 오히려 좋은 영화라고 대답하겠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인류가 초래한 전 지구적 위기 앞에서도 희망을 논하고 솔루션을 찾는 행위는, 만일 누군가 인간이 존엄하다는 명제를 입증하려 들 때 그 최종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 법하다.

 

<내일> 영화제작자들은 그러한 종류의 존엄에 근거하여 '내심과 달리' 희망과 솔루션을 얘기한다. 그러나 영어단어로, "in vain." 영화를 볼수록 관객은 희망과 솔루션의 부재를 확인할 뿐이다. 역설적으로, 또한 영화 제작 의도와 다르게, 지구촌의 암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성공적이다. 가리지 않고 잘 보여주는 데에 다큐멘터리 영화의 의의가 있다는 관점을 동의한다면, 분명 <내일>은 좋은 영화이다.

 

지구를 구원하려는 선한 오디세이

 

2018년 4월 5일 한국 개봉에 앞서 2015년 프랑스에서 개봉된 <내일>은 프랑스 국민배우 멜라니 로랑과 작가이자 환경운동가 시릴 디옹 두 사람의 영화이다. 두 사람은 2100년이 오기 전에 기후변화로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논문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인류의 미래가 실제로 그렇게 전개될지 확인하고 싶었고, 만일 그렇다면 파국을 면할 해결책이 무엇이고 과연 찾을 수 있을지를 검증하기 위해 영화인 친구들과 함께 '지구 구원의 지속가능 오디세이'를 떠났다. 그 결과물이 이 영화이다. 굳이 기록을 남기면 멜라니 로랑과 시릴 디옹이 감독 겸 주연이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프랑스, 영국, 미국, 인도 등 세계 10 개국을 방문한 <내일> 제작진은 그 결과를 농업, 에너지, 경제, 민주주의, 교육의 5개 주제로 정리하여 문제와 해법으로 제안하였다. 5개 주제는 병렬식이 아니라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진다. 즉 맨 마지막에 위치한 교육이 결론이다. 식상하지만 불가피한 결론인 셈이다. 동시에 전체로서 이 영화 자체가 교육, 즉 세계시민 교육을 지향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자본주의와 근대성으로 무장한 현대의 '계몽된' 세계가 지옥의 묵시록으로 치닫는 상황. 그러한 상황에서 반전의 계기는 기도가 아니라 다시 한번 계몽일 수밖에 없다는 계몽의 변증법이 절박·절실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장점은 그러한 '변증법'적 거대담론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행동하는 세계시민, 즉 미래를 바꾸려는 특정한 현장의 생동하는 사람들을 만나 소소하지만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장을 비추는 것이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다.

 

도시의 버려진 곳곳을 텃밭으로 가꾸는 도시농업 프로젝트로 식량 자급자족을 기획하는 미국 디트로이트. 풍력과 바이오매스로 탄소 중립 에너지를 구현하는 중인 덴마크 코펜하겐. 지역화폐를 발행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영국 토트네스. 스스로 정책을 구상하고 투표에 참여해 빈곤 퇴치, 경제 활성화, 주민 화합을 이뤄낸 인도 쿠탐바캄. 아이들에게 다양성을 고려한 전인교육을 펼치는 핀란드까지. 지구촌의 소위 '희망'의 현장과 사람들을 보여준 뒤 <내일>은 "우리 모두 힘을 합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1년이 넘는 여정 끝에 찾은 가장 강력한 해결책이 희망이었음을 역설한다.

 

한데 알 만한 사람은 알다시피 희망은 양날의 칼이다. 신화시대로 회귀해 보면, 지적 생명체인 인간은 가능성이 전무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감내하는 표현으로 희망을 발명했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해결책이 희망"이란 말은 현실이 대단히 절망적이란 뜻이다(혹은 희망이라곤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 영화를 만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희망은 희망이어도 희망이고, 절망이어도 희망이며, 후자의 희망이 오히려 더 희망적이란 역설을 받아들일 때 신화와 현실은 소통했다. 어떠한 종류의 희망이든 어쨌든 우리는 희망을 말하게끔 되어있다. 이 영화를 관류하는 이중화법이 그래서 불편하지는 않다.

 

희망과 전환의 미장센 

 

감독이자 주연(화자)인 두 사람은 앞서 언급한 영화적 논리의 출발점으로 농업을 다룬다. 결론은 현재 자본주의의 단작 농업, 기업식 대규모 농업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이다. 대안은 도시농업과 소농이다.

 

인류의 다수가 도시에 몰려 살고 있고, 앞으로 그 숫자가 더 늘어난다고 할 때 확실히 도시농업은 대안이자 해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식량주권도시를 표방한 미국 디트로이트의 사례는 일률적으로 모든 도시에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영감의 원천임은 분명하다.

 

자동차산업의 몰락으로 인구가 200만 명에서 현재 70만 명으로 줄어든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활력을 보이는 산업은 농업일 수도 있다. 디트로이트에는 1600개의 도시농업 농장이 있고 디트로이트 시민이 소비하는 식량의 50%를 도시농업으로 충당할 야심찬 목표가 추진된다. 올바른 전환이다.

 

미국에서 식품이 이동하는 평균 거리는 2400km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자본주의적 기업농업 때문이다. 이 거리는 결국 온실가스로 축적된다. 자본주의 농업에서 발생하는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비용을 기업은 물지 않는다. 기업이 물지 않은 그 비용은 대기, 토양, 동식물, 그리고 인간에게 전가된다.

 

비용의 그러한 부당한 외부화를 통해 자본주의 기업은 이익을 부당하게 내부화한다. 도시농업은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된 이 부당(不當)을, 일소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없앨 수 있는 의미심장한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실제로는 기업농업보다 ('섞어짓기' 등을 활용했을 때) 생산성이 60~75% 더 높은" 소농(小農) 농업이 결합되면 '부당'의 대부분을 없앨 수 있다는 게 영화의 주장이다.

 

그동안 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현 대량생산 농업체제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석유회사 등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석유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퍼머컬처'와 '생태농업'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농업전환은 에너지전환과 맞물리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두 번째 주제인 에너지로 넘어간다.

 

농업을 바꾸는 것은 에너지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에너지 체제를 바꾸려면 필수적으로 토지 경영 방식을 재고하게 되는데, 현존 경제 시스템 자체의 변화까지 요구하게 된다. 경제를 바꾸려면 소수의 금권 특권층이 정치마저 좌우하는 현 금권과두제를 '혁파'하고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깬 시민을 필요로 하는데 마침내 교육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영화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 동시다발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이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힘을 합쳐서 동시다발적인 이러한 변화를 이루자고 권유한다.

 

변화는 가능할까

 

저명한 환경운동가이자 영향력 있는 현대의 사상가인 인도의 반다나 시바의 의견은 변화를 실현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영화 속 인터뷰에서 그는 "정부나 시장의 (부당한) 법을 따르지 말라"고 말한다. 대신 "더 상위의 고귀한 법에 복종하라"면서 그 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구의 법이고 또 하나는 인권의 법이라고 강조한다.

 

영화에서 소개한 아이슬란드 '주방용품혁명'은 아마도 시바가 언급한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금권과두제를 넘어서기 위한 아이슬란드 민중의 다양한 직접 민주주의 시도-그중에 선거 대신 추첨을 활용한 대표단 구성 방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졸저 <선거파업>에서 나는 추첨민주주의의 당위성과 도입을 역설했다-는 감동적이었지만 투표자의 67%가 찬성한 새 헌법이 보수당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한 사태는 변화의 미장센에 중대한 흠결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도 강력하게.

 

변화는 가능할까. 아이슬란드 사태에서 우리의 1987년 민주화운동과 아직 종장에 이르지 않은 최근의 촛불혁명을 겹쳐 보게 된다. 영화 <내일>의 모두(冒頭)에서 "인류에게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점이며 우리가 희망의 시나리오를 복원할 수 있는 시한이 한 20년이나 남았을까"라고 말한다. 세계시민으로서 우리와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분리되지는 않겠지만, 모든 지속불가능과 절망의 구조가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에서 한국인인 우리에게도 희망의 시나리오를 복원할 수 있는 시한이 2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솔직히 두 종류의 희망 모두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한국인으로서 희망에 대해서는 조금 더 부정적이다. 저들이 군대동원을 검토할 때 우리는 촛불의 대오를 광화문에서 과감하게 여의도로 바꿔 국회를 전복하고 제헌의회를 수립해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소한 희망과 변화를 논하기에는 지구 차원의 위기와 한국 차원의 암담이 너무 심대하기에 별별 상상을 다하게 된다.

 

현실로 돌아와 영화 <내일>이 소소한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사실을 빠뜨릴 수는 없겠다. 우선 제작비를 조달하고자 진행한 크라우드펀딩에서 세계 시민 1만266명의 지원으로 두 달 만에 20만 유로(약 2억 6천만 원)를 모았다. 2015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회의에 맞춰 개봉한 <내일>은 프랑스에서 환경 다큐멘터리로서는 놀라운 기록인 110만 관객을 동원했다.

 

<내일>은 2016년 6월 벨기에 유럽연합(EU) 본부 상영을 비롯하여 전 세계 30개국에 배급됐다. 한국에도 2017년 국회와 서울시의회 등 각종 기관에서 특별 상영됐고, 2017 와우북페스티벌 영화토크 스페셜, 2017 유럽연합 문화원 축제, 수원시 제1회 지속가능영화제 등에서 소개됐다. 국내 학교, 기업, 단체, 마을 등 다양한 경로로 이미 67회 공동체상영되어 7500여 명의 한국인이 <내일>을 보았다. 프랑스 세자르 상의 2016 최우수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수상하였으며, 미국 콜코아프랑스영화제에서도 베스트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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