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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진보와 이별하라
낡은 진보와 이별하라
  • 김상봉
  • 승인 2010.08.06 16: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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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ée]

▲ <어디로?>, 2009-안미경
한때 나는 민주당에 적을 두고 있는 옛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아니 저분들이 왜 진보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을 택해 정치를 할까’ 하고 철없이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른바 진보정당이라 자처하는 정당에 몸을 두고 정치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이 왜 민주당으로 가지 않고 굳이 진보정당에 자리를 잡고 정치를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진보정치와 진보정당 건설을 입에 올리는 정치인들에게 니체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었듯이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아직도 진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진보는 죽었다! 하지만 관성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진보의 사망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오해는 계속되고 우리의 선량한 열정은 부질없이 낭비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유럽 진보정당의 중요한 대의는 자본주의의 극복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었다. 노동자로 사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 존재 방식이 된 우리 시대에, 노동계급을 자본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럽의 진보정당은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삼고 100년을 싸워왔다. 비록 처음의 혁명적 열정이 세월 속에 식고, 하나였던 대열도 여럿으로 갈라졌으나, 지난 세기 사회주의에 기반한 유럽 좌파 진보정당 운동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며 역동적인 정치적 운동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깃발을 들고 시작된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오늘날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대의는 아무도 믿지 않는 구두선이 된 지 오래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니, 자본주의를 폐지하더라도 경제는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말하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경제가 어떤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예들은 사회주의적 경제로 통하는 길을 생산수단의 국유화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생산수단이 국유화된다 해서 자본주의 경제가 전혀 다른 종류의 경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레닌 이후 공산권 국가가 채택한 ‘국가 관리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십 년간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뒤 오늘날 중국처럼 공산주의를 내걸고 있는 국가조차 경제에서는 자본주의국가와 다름없이 되었다. 공산국가의 상황이 그렇다면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초기의 열정은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와 사회복지 확대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몇몇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무슨 대단한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오늘날 서구의 사회주의 정당이란 한편으론 자본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론 보편적인 사회복지 체제를 추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유고슬라비아에 군대를 보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 사회주의 진보정당의 대의였다면, 그런 진보정당은 이제 죽었다.

박근혜도 외치는 ‘복지사회’

허탈한 일 아닌가? 우리는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제대로 싸움을 시작해보지도 못했는데, 바깥세상에서는 그렇게 싸움이 끝나버렸다. 지난 시절 우리에겐 언제나 자본주의 타도보다 더 절박한 정치적 과제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 우리에겐 민족의 독립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다. 서양의 사회주의 진보정당이 민족주의를 퇴행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고 있을 때,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눈물로 껴안았다. 그 역사는 해방되었다고 해도 끝나지 않았다. 보수 우익이 외세에 기생하는 매국노들인 나라, 전직 국방장관들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이 물구나무 선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어쩔 수 없이 진보의 몫이었다. 그뿐인가?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고착된 독재는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제를 진보의 몫으로 맡겼다. 게다가 그 독재 권력이 지역 차별과 맞물리면서 급기야 호남과 영남을 나누는 지역적 경계를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도대체 이 땅에서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보수정당이 해야 할 일까지 진보정당에 맡기고 나면,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땅에서 진보정당이 겪는 특별한 곤경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에 둔감해진 진보정당

좀더 절박한 현실적 과제에 떠밀려 본래적인 진보정당의 과제인 반자본주의 투쟁은 늘 나중으로 밀려나 한 번도 진보 정치의 중심적 의제가 된 적이 없으므로, 대중의 진보적 정치 의식 역시 고작해야 독재 타도를 넘지 못한다. 보수든 진보든 정당정치는 대중의 의식 수준과 분리될 수 없는데,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유권자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꿈꾸지 않으니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아무리 설득한들 반향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이것이 진보 운동가나 정치인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적으로 부패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는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도 하나둘 지쳐 더러는 한나라당으로, 더러는 민주당으로 흩어진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자본주의 극복 같은 것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소박하게 복지국가라도 된다면 감지덕지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그것을 새로운 진보의 깃발로 삼으려 한다.

누가 복지국가를 싫어하겠는가? 박근혜 의원조차 복지국가를 좋아한다. 이는 복지국가 건설이 우리 시대의 새로이 등장한 보편적 시대정신임을 증명해주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는 진보정당을 보수정당과 구별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독재 타도가 아무리 절박한 과제라 하더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궁극적 존재 이유가 될 수 없듯이, 복지국가가 아무리 바람직한 과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이룰 수는 없는 일이다.

서양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그럭저럭 적응해 살기로 한 까닭은 그들이 그 괴물을 나름대로 길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그 괴물과 그토록 오래 싸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 괴물을 그 정도라도 길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는 민주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정당이라 자처하는 어떤 정당도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이 없었으므로, 자본가들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지극히 역설적이게도 지난 10여 년 이른바 민주 정부 아래서 나라는 아예 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기업의 나라가 되었다. 기업은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그리하여 국가가 전반적으로 기업에 동화된 ‘기업국가’로 전락하면 반드시 시민의 자유가 근본에서 위협받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이명박 정부의 독재적 행태는 우리가 우연히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뽑았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기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재벌 기업 또는 재벌 가문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 말했듯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CEO)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재벌 기업의 CEO에게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바랄 수 있는가? 굳이 한국이 아니라도 현재의 자본주의 기업지배구조에서 모든 CEO는 기업의 독재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주식회사가 가장 봉건적인 가족 지배 아래 있다. 원래 자본주의 기업의 역사에서 주식회사란 가족  경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출현한 것인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주식회사가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을 가진 재벌 가문에 의해 완벽하게 사유화되어 있다. 또 그런 재벌 기업에 의해 국가기구가 포위되고 장악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퇴행은 그런 국가 기업화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정부 권력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모두를 위한 공화국이 아닌 사적 이익 추구의 도구로 만드는 한국의 재벌 기업 체제를 해체할 궁리를 해야 한다.  

재벌 해체 없는 반신자유주의?

하지만 이 나라의 야당들은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책임이 모두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는 듯이 ‘반MB’를 부르짖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야 어차피 한나라당과 똑같은 ‘FTA 정당’이요 재벌당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정당조차 반MB 전선에 부화뇌동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반MB뿐만 아니라 반신자유주의를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와의 투쟁은 그 자체로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일 뿐 결코 구체적인 적과의 현실적 대립이 아니다. 마르크스 이래 사회과학은 언제나 주체 없는 구조에 대해 말해왔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과학의 길이라는 듯이. 하지만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인간의 일인 한에서, 그것의 구조는 언제나 주체성의 구조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주체,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절박한 과제다. 하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 재벌 가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체성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주체이고 만 사람이 객체인 ‘홀로주체성’이다. 신자유주의를 해체하려면 재벌 기업의 홀로주체성을 해체해야 한다.

합종연횡의 몽상에서 벗어나야

기업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처럼 폴리스가 되면 안 될 까닭이 무엇인가?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 어디에도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지면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없다. 국가의 주권이 시민에게서 나오듯, 기업의 경영자를 노동자가 선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기업의 전문경영인이, 주주가 아니라 노동자가 책임을 지는 체제가 될 때, 비로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노동의 비정규직화와 사회계층의 양극화, 그리고 자연과 생명의 파괴를 극복할 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진보정당조차 재벌 해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앞으로 우리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한국의 봉건적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원없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이 땅의 민중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한국의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할 것이다. 진보정당이 살아 있다면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자칭 진보정당들은 내심으론 자본주의 극복도, 재벌 해체도 포기했으니 주검에 지나지 않는다. 뜻이 죽었으니, 진보정당이 홀로 설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앞으로는 진보정당의 간판을 내걸고, 뒤로는 저보다 오른쪽에 있는 정당에 빌붙는 것이 진보정당의 습속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반MB 어쩌고 하면서 민주당과 동거하고, 진보신당은 진보 대통합을 핑계로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에 추파를 보낸다. 그러면서 합치면 국민이 감동할 것이라 몽상한다. 지금이 1987년인가? 만약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을 뛰쳐나와 민주당 및 국민참여당 등과 동서화합과 4대강 중단, 그리고 남북통일과 복지국가 건설을 내걸고 합친다면 나도 감동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민노당이 합치거나, 민노당 또는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이 합치는 것이 무슨 감동을 주는가? 당신 같으면 죽은 남편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늙은 과부와 야심만만한 젊은 총각의 결혼에 감동하겠는가? 살을 섞어도 어차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진보는 죽었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지금 진보정당들의 가장 치명적인 허위의식이 생겨난다.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러운 운행이니, 죽은 것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새로운 진보의 역사를 바란다면,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먼저 낡은 진보의 역사와 미련 없이 이별해야 한다. 언제나 생명의 씨앗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그러나 나 자신 속에 새로운 세계가 숨어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새로운 시대의 씨앗이 될 수 있겠는가.

글•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이사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학벌사회: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한길사·2004), <도덕교육의 파시즘>(길·2005), <서로주체성의 이념>(길·2007),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한울·2007),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휴머니스트·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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