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이봄영화제] 그때의 나는 어디를, 무엇을, 어떻게 탐험하고 있었는가? - <소녀의 세계>
[이봄영화제] 그때의 나는 어디를, 무엇을, 어떻게 탐험하고 있었는가? - <소녀의 세계>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8.12.03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영화에서 소녀들이 중심이 된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문득 떠오르는 몇몇 작품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서술에 의문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자. 그들을 괴롭히는 사건을 시작으로 하지 않은 소녀들의 서사가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찌질하고 치졸할지라도, 힘을 얻기 위해 치기어린 몸짓을 휘두르던 소년들이나(<품행제로>(2002), <바람>(2009) 등), 믿음의 상실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우정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이야기했던 소년들(<파수꾼>(2010) 등), 현실 폭력과 계급의 은유 한복판에 놓여 있던 소년들(<말죽거리 잔혹사>(2004), <명왕성>(2012) 등)과 생존에의 갈급을 토해냈던 소년들(<거인>(2014) 등)이 만들어냈던 다종다양한 감정과 그에 따라붙던 해석을 생각한다면 대체로 (어떤 이유에서든) 피해자에 머무르며 안타까움을 자아내던 소녀들의 이야기는 사실 매우 단조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디선가 보았던 보이시하고 멋진 여자 선배와 그를 마음에 둔 여고생이라는 설정, 그래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던 <소녀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환기시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연극반 선배 하남(나라)을 좋아하는 친구의 연극반 오디션을 돕던 선화(노정의)는 우연히 연극반 선배 수연(조수향)의 눈에 들어 연극반에 들어가고, 선화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을 맡으면서 로미오를 맡은 하남과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으로 <소녀의 세계>는 간단히 요약된다. 그러나 이 짧은 줄거리 사이에서 표현되는 사소하고 작은 감정들은 섬세한 과정을 거쳐 솔직하게 표현되며 소녀들만의 이야기를 쌓는 데에 집중한다. 이러한 표현이 중요한 것은 ‘어디선가 보았던’ ‘설정’,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분명 여중, 혹은 여고의 어디에선가 분명 존재하는 서사에 대해 가감 없는 감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의 세계>는 하남을 둘러싼 후배들의 감정에 어떤 의아함이나 고민의 시선을 굳이 부여하지 않는다. 선화와 하남이 보내는 시간들에 등장하는 무지개, 무수한 별빛들, 동화 속을 거니는 듯한 화면과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미지의 탐험과 같은 한 과정임을 보여주는 은유 등은 소녀의 시기에 녹아든 감정에 대해 특별히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선화를 둘러싼 친구들과 가족들의 명랑함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면서 선화의 탐험에 어떠한 우울함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들은 한편으론 소녀들의 감정들을 단순화시킨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분명한 감정이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화는 자신의 시선이 하남을 쫓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이성 친구 우철(조병규)에게 질문한다. 너네 학교도 그런 게 있느냐고, 선배를 좋아해서 따라다니고 선물 주는 애들이 있느냐고. 우철은 한 마디로 정리한다. ‘돌았냐. 토 나오게.’ 이 같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차이는 <소녀의 세계>가 청소년이라 뭉뚱그려지는 범주에서 소녀의 모습을 예민하게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같은 여자인데도 엄마와는 몸을 가진, 그리고 생각을 가진 선화의 소녀기(期)만의 고민과 환희와 아쉬움, 들뜸 등은 그렇게 <소녀의 세계>에 녹아 있다.

표면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과의 병치를 이루며 흘러가는 이 영화에는 가느다란 이야기의 줄기 하나가 더 뻗어 있다. 다소 희미하지만 선화와 그의 언니 선주(조수하)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선화는 ‘아토커’, 즉 아이돌 아스트로 스토커로 소문이 나 왕따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선주를 은근히 무시하지만, 선주는 이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의 공간을 아스트로의 포스터로 가득 채운다. 선화는 하남과의 관계를 통해 사랑이란 우주처럼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의 언니에게 사과를 건넨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이 사과 속에는 선주가 아이돌을 향해 보냈던 그 열렬한 사랑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응원이 담긴다.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사랑을 먼저 알아버린 언니에 대한 인정. 앞으로 잘할게라는 동조. 소녀들의 사랑은, 그때의 사랑은 그렇게 그곳에 있었다.

 

* 이봄영화제
상영 : 2018년 12월 5일 (수) 오후 7시 영화 상영 및 해설
장소 : 이봄씨어터 (신사역 가로수길)
문의 : 070-8233-4321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송아름(영화평론가)
송아름(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