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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PD수첩’을 두려워할까
권력은 왜 ‘PD수첩’을 두려워할까
  •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 승인 2010.09.0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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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ée]

문화방송 <PD수첩>은 주요 사실 몇 가지를 확인하고, 이미 얼추 그려진 4대강 관련 의혹을 더욱 선명히 정리하는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가 <PD수첩>과 그 제작자들에게 감사와 호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권력과 그 파견 사장이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요컨대 이번 사태에서 놀라운 점은 프로그램이 내놓은 새로운 사실에 있기보다는, 정권이 보인 추태에 가까운 반응에 있다. 그리고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은 현 정세에서 이명박 정권이 지닌 자신감 부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정치 불안감을 반영하며 또 이를 증폭시킨다.

사실 <PD수첩>은 지극히 평범한 프로그램이다. 주류 미디어에 배치돼, 상식적 저널리즘 역할을 수행한다. 제도권 내부에 편성된, 충분히 공유 가능한 지식을 전달하는 정상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다수 대중이 지닌 공통 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일반 시청자가 가진 공통 인식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다. 앞서기보다는 뒤따르는 편이다. 간혹 공분을 유발하는 역할을 자임하지만, 그런 촉매의 위상학은 당위적 실천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떠맡게 된 것으로 봐야 할 테다.

새로울 것 없는 내용에 과민반응

말했듯이, 이번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도 이런 프로그램의 전체적 속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낙동강 사업 수심 6m설’은 환경운동가나 토목 전공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펴오던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통령 개인의 의지가 강력히 작용했다는 인터뷰 내용조차 4대강 토목공사에 반대하는 대중이 심중에 늘 지녔던 의혹을 확인시켜줄 따름이다. ‘한국판 라스베이거스’, ‘호화판 카지노 유람선’ 같은 이야기는? 강정보로 직접 걸음해보시라. 건설 사업자가 스스로 설치한 선전 문구일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 신문들이 호들갑스럽게 떠들던 내용이다. 별반 새로울 것 없는.

그런데도 왜 대중은 이런 방송의 고지에 열호하고 그 검열의 공지에 분노했을까? 그래서 비판하고 저항해, 마침내 방송 실시라는 승리를 얻어냈을까? 거꾸로 권력과 그 파견자의 입장에서는, 대단하게 새로울 것도 없는데 대체 왜 그리 겁을 냈을까? 기각될 게 뻔한데도 방송불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사장을 통해 사전 차단코자 한 이유가 뭘까? 그래서 또 이리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되는 걸까? 혹 이들은 <PD수첩>에 대해 일종의 공포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집요한 시비와 간섭, 검열과 통제의 제스처들은 공포의 방증이자 콤플렉스의 표식이 아닐까?

▲ <페이스리스, 정체불명 2009>, 2009-구지윤
일개 <PD수첩>이다. ‘대안’이나 ‘독립’이라는 말과 거리 먼, ‘좌파’와는 무관한, 지상파 방송에 배치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런 <PD수첩>에 대해 정치권력이 보이는 누가 봐도 과도한 반응의 정체는? 이명박 정권뿐만 아니라, 지난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똑같이 나타났던 <PD수첩>에 대한 이상한 적대감의 뿌리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에 대해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 건가?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같은 신문들이 더하다. <프레시안>이나 <오마이뉴스>가 훨씬 더 세게 현 대통령을 비판한다. <레디앙>이나 <미디어스>와 같은 진보적 매체가 이명박 정부에 더 래디컬하게(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

이런 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명백히 주류인 <PD수첩>에 대해서만 유독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중층적으로 작용한다. 우선 첫 번째로, 텔레비전의 보편적 가시화 효과를 빼놓고 설명이 불가능하다. 맥루한에게 텔레비전은 단순한 채널이 아닌, 일종의 환경이었다. 잘 보이지 않거나 가려진 것들을 등장시키는 TV다. <PD수첩>은 이 드러냄·출현의 기능을 저널리즘 형식으로 잘 구현하며,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에서 행사되는 권력에게 현실의 이런 원격 광학화(Tele-visionalizing)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PD수첩>이 4대강 공사를 TV로 중계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두 번째는 주류 매체로서 <PD수첩>이 지니는 장점이다. ‘독립’과 ‘대안’을 내세우는 좌파의 생각과 달리, <PD수첩>은 주류 매체에 편성돼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제도권 방송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정보를 취득할 수 있고, 힘있는 채널이기에 권력에 그래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유능한 인원 가동, 많은 재원 지출이 가능하다. 완성도 높게 가공된 저널리즘은 일시에 광역대로 송출되고, 그래서 사실의 확실성과 진실의 투명성을 기대하는 대중과 동시적으로 접속한다. 거꾸로 사실의 불확실성에 기대고 진실의 불투명성을 원하는 권력에게는 주류의 근접성으로 말미암아 큰 불편을 야기한다.

통치적 신체의 바깥이 아닌 그 내부에 접착해 있기에, <PD수첩>은 내용적으로 별반 급진적이지 않으면서도 (정치, 자본, 이데올로기) 권력 질서를 위협한다. 관료화된 통치체계 내 이질적 종기 같은 존재가 된다. 안정적인 체질을 괴롭히는 변종의 혹이다. 권력에게 한마디로 목에 가시 같은 존재다. 그렇다. 몸 안에 단단히 박힌 가시다. 동질성 내부의 이질적 요소이자 정상성 내부의 변태적 존재로서, 권력의 정상 작동을 결정적으로 방해한다.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도 주변부에 위치한 진보 ‘언론’이나 독립 다큐가 아닌 지상파 방송을 타는 것이기에 권력이 그렇게 안전부절못하는 것이다. 중심의 흐름은 매우 세기에.

세 번째로, <PD수첩>은 원칙에 충실한 상식적 저널리즘이다. 판단을 피하거나 해석을 게을리하지 않지만, 그보다 사실에 우선 철저하다. 팩트(Fact)가 일차적이고, 팩트에 강하다.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주류 저널리즘이다. <PD수첩>의 대표로서 최근 맹활약 중인 최승호 PD가 지닌 무기도 ‘사실 확인’, ‘사실 제시’라는 평범한 원칙 이상의 별게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런 탐사 저널리즘 원칙의 고수가 프로그램의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 수집의 탐정수사 기법을 권력의 범죄와 비리, 타락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지닌 자들이 저리 민감한 것이다.

권력 내부에서 주류적 정공법

바로 여기에 <PD수첩>이 지닌 방송 저널리즘, 타 방송사의 PD 저널리즘에서 차별되는 성격이 있다. <PD수첩>은 날카롭게 벼린 사실 취재의 칼날을 파리 목숨 날리는 데 쓰지 않는다. 약자를 괴롭히는 짐승의 목을 따고, 소수자를 괴롭히는 야수의 심장을 겨냥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사실과 증언, 데이터로 무장할 수밖에 없는바, 권력을 상대로 한 철저한 준비와 호전적 태도가 권력을 늘 신경 쓰이게 만든다. 한국의 모든 권력이 유독 <PD수첩>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네 번째 이유다. 다수의 권력 네트워크가 소수자 <PD수첩>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이유다.

물론 극우세력이 늘 그렇듯 원색적 공세를 퍼붓는다. 그렇지만 사실에 근거한 비판은 결코 이들에게 쉽지 않다. 이념적 공세나 정략적 흠담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사실에 취약하고 진실에 특히 무력한 게 이 나라의 우파이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취재윤리, 이른바 ‘공정성’의 시비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권력과 그 지지의 보수우파는 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게 역설적으로 <PD수첩>의 존재론적 위상과 그에 대한 대중의 신뢰만 더욱 강화하는 꼴이 된다는 점이다. <PD수첩>의 정치적 역능을 제고하고, <PD수첩>을 둘러싼 정치화의 여지만 키워줄 따름이다.

그렇다고 침묵하거나 방관할 수도 없는 일. 그래서? 현 정권 초기에 가히 파시즘적 난폭함을 보였을 때조차 무단으로 ‘적출’할 수 없었다. 권력의 공포감 탓에 주류 저널리즘을 괴물처럼 키워놓았는데, 대중이 득달같이 성원하는데, 이제 물리적 제거는 한마디로 물 건너갔다.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이게 바로 <PD수첩>에 대해 권력과 그 후원자, 파견자들이 공통으로 처한 딜레마다. 그리고 이 묘한 상황을 틈타 PD들은 또다시 새로운 사실을 좇아 움직인다. 이번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도 <PD수첩>이 지닌 독특하고 기민한 정보 장치로서의 속성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컴퓨터, 휴대전화,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까지 장치로 정리하는 아감벤의 사유를 좇는다면, <PD수첩>은 확실한 반권력의 장치다. 또 푸코에 따르면, 개별 장치는 지배적인 ‘전략 기능’을 지니는바, <PD수첩>의 경우 그것은 사회적 공통성의 재발명이 될 것이다. 사실에서 시작한 진실 과정의 촉매제로서 정치·민주적 시간을 재구축해낸다. 정치 중지의 비상 시기이기에 특히 상식을 중시하면서, 이 장치는 상대적으로 뛰어난 수행성을 통해 시청자 대중을 끊임없이 정치 공간으로 주체화(Subjectification)한다. 권력이 장악한 정보, 권력이 독점한 지식을 ‘공통 이용’ 가능한 의제로 설정해낸다.

신성화된 권력을 세속화하는 힘

아감벤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은 비밀의 정치를 보편적 활동으로 ‘세속화’(Profanation)하는 기능을 다한 셈이다. 정치를 신성화(Consecration)하는 권력의 의지에 반하는 대중적이고 상식적이며 민주적인 장치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장치권력이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PD수첩>이 지닌 이런 장치로서의 잠재력이자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또 다른 장치들과 접속시키는 대중 주체들의 기민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장치를 미리 권력의 것으로 단정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공통 이용의 목적으로 적극 전유해야 한다는 아감벤의 제안을, 우리는 <PD수첩>에 대해 이미 채택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PD수첩>은 주류 매체에 배치돼 탐사저널리즘의 원칙을 고수하고 사실의 공통 이용 가능성을 도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방) 권력에 반하고 진실(과정)에 기여하는 특이한 존재다. (민주)정치의 가능성을 내부로부터 압박하는 소중한 물리적·텍스트적·이념적 장치다. 중심에 있고 주류에 속하기에 훨씬 강력한 담론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다. 권력 역감시의 전략적 장치이자, 선전 반대의 기능적 카운터 장치다. 권력은 이 리버럴한 장치의 작동을 늘 불편해한다. 크게 위험하지 않은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에 대한 권력의 무리한 검열 시도는 이 장치망의 여론 파생 능력에 대한 권력의 공포를 반영한다.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을 둘러싼 논란은 <PD수첩>이라는 사건적 프로그램의 사고 가능성, 그 정치적 의미를 다시 부각시킨다. 주류의 원칙과 제도의 기본을 따르면서 여전히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PD수첩>의 독특한 장치적 속성, 위상, 특장을 확인시킨다. 주류의 여론을 끌고 주류의 동정을 살 수 있기에 이 프로그램 장치는 권력에게 늘 골칫거리다. 권력을 좀먹는 암적인 존재다. 한편 대중은 내용의 강도와 상관없이 이 장치의 존재 자체에 열광적 지지를 표한다. 한때 공포에 가깝던 정치권력이 불안을 느끼는 정도에 비례해 제도 내부의 이 프로그램 장치에 신뢰를 보이고 희망을 품는다.

글•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소장,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겨레>에 고정 칼럼을 기고했고, 지금은 <미디어스>에 글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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