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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총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는가?
그들은 왜 총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는가?
  • 강우정, 안치용, 박수연기자
  • 승인 2020.12.15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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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⑧실미도 부대의 진실

1972년 3월 10일, 청년이 죽었다. 

 

초병살해죄. 청년 임성빈이 죽은 이유였다. 성빈은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은 청년이다. 그는 실미도를 지키던 병사들을 죽인 죄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실미도엔 왜 가게 되었고 또 왜 병사들을 죽이고 탈출하려고 했던 것일까. 행상을 하던 22살 젊은 청년은 왜 북파공작원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이에 앞서 1968년 1월 21일엔 북한 특수부대가 서울에 잠입해 청와대 습격을 기도한 1ㆍ21사태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났다. 31명 중 29명은 사살되고 1명은 도주하였으며, 1명이 생포됐는데 그가 김신조이다. 기관단총, 권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북한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코앞까지 진출한 사건은 남한 사회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김신조 인터뷰 사진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12-19 방영
김신조 인터뷰 사진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12-19 방영

 

북한은 왜 이런 무모한 도발을 시도했을까. 특수부대원들이 정말 박정희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전쟁을 불사할 생각이었을까. 1960년대 후반 북한 공작원들의 대남 침투가 급격하게 늘어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대남정책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베트남과 한반도 정세

 

원래 북한의 대남정책은 ‘군사’보다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54년 12월 23일 김일성은 “남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북반부의 넉넉한 사회에의 참을 수 없는 동경”을 만드는 것이 대남정책의 목표임을 천명했다. 경제의 우위를 통해 남한에 대한 북한의 전반적 우위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 축출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책을 모색했다. 

북한은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는 연방제를 먼저 제의했으며, 연방제를 통해 남북 간의 적대감과 대립감을 해소하려고 했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정책은 ‘접근’으로 표상되는데, 경제적, 이념적으로 우수한 북한 체제를 남한이 많이 접하게 되면 남한 곳곳에서 지역혁명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북한의 연방제 제의는 남한 대학생들을 열광케 했으며, 통일 담론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1961년 남한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며 한반도 정세가 급변한다. 반공을 최우선한 정권에게 더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북한 정부 내에서 평화통일보다 민족해방 전쟁론 등과 같은 ‘혁명’에 초점이 맞춰진 논의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정치적 확산, 물리적 강요에 의해 조국통일을 실현하자는 발상이었다.

대남 정책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요인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1965년 한국군 전투병의 월남 파병이 시작되자 북한은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지시로 타국의 민족해방운동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1965년 5월 20일 북한 최고 인민회의는 남한의 월남 파병 행위를 북한에 대한 침략행위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미국, 한국과 달리 베트남에 별다른 원조를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전쟁 선포에 가까운 이러한 강경 발언은 대체로 대외용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반도 내에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북한은 중국 혁명과 베트콩의 전략을 모티브로 하여 남파공작원 및 간첩 육성에 몰두했다. 훈련소를 만들어 집단 교육 4개월, 개인 교육 2개월 등을 거친 공작원들을 남파했다. 베트남에 파병한 남한 내부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임으로써 미국과 남한에게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는 효과를 주려고 노렸다. 북한의 이러한 의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1ㆍ21사태였다.

영화 '실미도' 스틸 컷
영화 '실미도' 스틸 컷

 

남한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대남 정책에 대응하여 북파공작원 육성을 준비했다. 박정희는 1ㆍ21 사태 직후인 1월 26일 전국 군ㆍ검ㆍ경, 중앙정보부, 여당 등의 수뇌부가 참석한 비상회의를 열었다. 박정희는 독자적 대북 응징보복 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평양을 공격하기 위한 실미도 부대가 탄생하게 된다.

 

 

처음부터 국민은 도구였다.

 

정부는 공안 네트워크를 활용해 각지에서 공작원을 물색했다. 교도소 또한 주요한 공작원 모집처였는데,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감자에게 형 면제를 내걸면 그들이 모집에 쉽게 응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수는 원래 형 집행 후 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해야 하므로 그들을 북파공작원으로 차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법무부의 방침에 따라 민간인으로 탐색대상을 확대한다. 중앙정보부에 제출된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에 “실제 귀환은 극난의 사실”이라고 적시되어 있기에 북파공작 후 살아서든 죽어서든 돌아올 확률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과 기록이 있거나 가족이 찾지 않는 청년을 중심으로 물색범위를 넓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31명이 선발되었다. 청와대를 급습한 김신조 일당과 같은 숫자의 인원이었다. 요리사, 서커스 단원, 소매치기 등 이들의 경력은 다양했고 조직생활을 경험한 소위 ‘깡패’도 많았다. 그중 성빈은 당수에 특기가 있었고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실미도에 들어온 사례였다. 실미도에 들어온 대다수 청년은 통념처럼 죄수가 아닌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왜 실미도에 자원한 것일까.

공군2325부대 특수공작대가 중앙정보부에 제출한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에 그 이유를 짐작게 하는 내용이 있다. 계획서는 이들의 대우조건으로 현역사병 계급 부여, 교육수료 후 하사관 또는 장교 임관, 상당액의 특수수당 지급 등을 제시했고, 중앙정보부가 승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 대우조건은 준수되지 않았고, 감언이설로 모집이 이루어졌음이 나중에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성빈은 6개월의 훈련을 받고 북에 갔다 오면 충분한 보수와 미군부대 취업 등을 약속받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교육지가 섬이 아니라 서울이라고 들었으며 훈련 기간 중 휴가도 약속받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복무조건이라 할 “실제 귀환은 극난의 사실”과 같은 공작의 위험성을 고의로 숨겼다. 장교 임관이나 미군부대 취업 등은 애초에 이행 가능성이 희박했다. 결국 국가가 애초에 실현이 불가능한 대우조건을 내걸어 청년들을 현혹해 돌아올 수 없는 지옥으로 몰아넣었다고 봐야 한다. 북한에 가서 공작을 마치고 생환하기란 “극난의 사실”이기에 모집과정에서 어쩌면 아무 말이나 무책임하게 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훈련과 부대 운영 과정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68년 4월 684북파부대로 불린 실미도 부대가 탄생한다. 군에서 운영하는 부대였지만 부대원의 군적은 없는 실미도 부대의 목표는 김신조 일당이 소속된 북한 124군을 능가하는 기량을 갖추는 것이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시행했고 성과가 향상되지 않으면 가혹하게 체벌하였다. 6개월의 훈련 결과 이들은 6km를 26분에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산악 훈련, 게릴라 전술, 장애물 돌파, 총검술 등 훈련을 거치며 이들은 침투작전에 필요한 완벽한 전투병기로 길러졌다. 부대원들은 산악에서 시간당 10km 이상을 주파하였고 명중률 98% 이상의 사격능력을 보유하였다. 또한 낙하산과 기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돼 서울 오류동에서 경북 포항시까지 기구를 9회 정도 사용해 이동하는 야간 침투 훈련을 수행했다.

실미도 부대원 / 실미도 전우회
실미도 부대원 / 실미도 전우회

 

훈련 성과는 좋았지만 반대로 훈련 환경은 최악이었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원은 일반 병사와 달리 TV가 있고 담배 등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좋은 환경에서 훈련받을 수 있다고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일반 병사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 던져졌다. B조 소대장 김씨는 훈련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부대원을 끌고 가 물속에서 10여 분간 집어넣고 밟았다. 숨이 붙어있자 백사장에 얼굴만 나오게 묻은 채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대로 두었다. 

가혹행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유는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6개월의 훈련 기간에 휴가와 외박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문제는 약속된 훈련 기간이 끝난 뒤에도 외박과 외출, 심지어 편지까지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감옥에 수감된 것과 다름없는 생활이 3년이나 계속됐다.

실미도를 지키는 기간병은 부대원이 화장실을 갈 때조차 총을 들고 따라와 감시했다. 그들은 구보 중 어느 부대원의 달리기가 늦으면 그의 발뒤꿈치를 조준사격하였다. 가혹행위가 일상이고 항상 감시받아야 하며 사소한 이유에도 죽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실미도였다. 

부대원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탈영사건이 발생했다. 탈영병들은 곧 잡혔고, 부대원들은 동료인 탈영병을 집단으로 구타할 것을 명령받았다. 때리다 기절하면 다시 물을 부어 깨운 다음 다시 때리는 등 구타를 반복했고 그렇게 탈영병 2명이 사망했다. 1970년 늦가을엔 부대원 3명이 탈영하여 젊은 여성 2명을 감금하여 강간한 사건이 발생했다. 탈영병들은 검거과정에 모두 사망했다. 

 

데탕트,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실미도

 

국가는 왜 죄 없는 청년들을 3년 4개월이나 ‘실미도’란 최악의 환경에 구금하여 방치했을까. 요약하면 부대창설 이후 북파 가능성이 매우 줄어들면서 부대 해체 및 부대원 처리에 관한 책임을 공군과 중앙정보부가 서로 떠밀며 회피했기 때문이다. 처음과 달리 실미도 부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관심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따라서 이 부대의 처리를 두고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자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실미도 부대의 북파는 왜 실현되지 못했을까. 실미도 부대 창설 이유와 마찬가지로 그 답은 베트남 전쟁에서 찾아진다. 실미도 부대의 시작과 끝에는 베트남 전쟁이 자리한다.

1960년대 후반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은 변화를 겪었다. 유럽과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국제 금융체제에서 독점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상실하는 중이었고, 맞수 소련은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국제정치ㆍ경제ㆍ군사적 헤게모니의 약화에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이 겹쳐 미국은 어려움에 처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소련ㆍ중국과 관계를 미국이 주도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세계의 안정과 자본주의 진영의 안보를 확보하고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전환은 베트남 전쟁을 명예롭게 종결하고, 군비경쟁을 지양하여 미군의 해외 주둔 비용을 절감할 기회였다. 1969년 7월 괌을 방문 중이던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지상군을 개입하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독트린 발표 한 달 뒤 닉슨은 박정희를 샌프란시스코로 초대한다. 한미정상회담은 주한미군의 철수 및 한국군 감축 유도에 관한 미국의 계획 전달 그리고 이에 대한 박정희의 이해를 구하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다. 

반공을 정권 유지의 핵심으로 삼은 박정희 정권은 닉슨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고, 박정희는 닉슨에게 닉슨 독트린의 범위에서 한국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닉슨은 박정희의 요청을 받아들면서도 언제든지 검토 가능한 대상이라고 여지를 남긴다.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다시 대통령이 되고자 한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최대한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닉슨은 벼랑 끝의 박정희에게 남북한 긴장 완화에 남측 정부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을 요구했다. 

닉슨은 과거 북한의 대남정책과 같은 논리에서 유사한 대북정책을 요구했다. 남한이 북한의 경제성장 속도를 따라잡은 상황에서 역으로 북한에게 평화노선을 제안함으로써 남한이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게 닉슨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과정를 통해 북한 체제가 남한의 자본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남한이 먼저 손을 내밀어 평화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압박했다.

정권의 연장을 위해 미군 철수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박정희는 닉슨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한미정상 회담 1년 후인 1970년 8월 15일 남한 정부는 평화통일기본구상(8ㆍ15 선언)을 북한에 제의했다. 또한 소련과 중국이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공산국가와 수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들의 가슴에는 억울함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미도 부대는 박정희 정권의 관심사에서 밀려났다. 3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그들은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심했다. 성빈은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 중앙청에 가서 국무총리를 만나 4년간 고생한 내용과 국가에 배신당한 사실을 직접 호소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전원 자폭할 결심을 했다.”

 

다른 실미도 부대원 김창구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앙청 광장이나 시청 광장에서 휴대하고 있던 총기를 땅에 놓고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세상에 폭로하고 후배들에게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자폭하려고 했다.”

 

1971년 8월 23일 6시 30분 실미도에 최초의 총성이 울렸다. 이것을 신호로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간요원들이 실탄을 장전한 소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을 죽이지 않고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고 실미도 부대원들은 판단했다. 

같은 날 11시 30분 배를 타고 이동해 인천 송도 부근에 하선한 부대원들은 오후 1시경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매복 중이던 육군과 총격전이 발생했고 이때 여러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했으며 버스운전사 역시 총상을 입었다. 부대원들은 타이어가 파열된 버스를 버리고 다른 버스를 탈취하여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러던 중 서울 영등포 세무서 앞에서 버스 운전사가 도망쳤고 부대원 장정길이 운전대를 잡고 서울 대방동 3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기 중인 경찰과 총격전이 일어났다. 이때 운전을 담당한 장정길이 총탄을 피하느라 고개를 숙이며 운전하는 바람에 버스가 위태롭게 주행하다가 결국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버스가 멈춰선다. 이때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수류탄 폭파 후 병원으로 이송되는 실미도 부대원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수류탄 폭파 후 병원으로 이송되는 실미도 부대원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남은 부대원들은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자폭을 시도했다. 살아남은 부대원은 모두 4명으로 이들은 (기이하게도) 군사법원으로 넘겨져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다. 민간인 6명, 경찰 2명, 군인 18명이 이날 사건으로 사망했다. 실미도 부대원은 이날 탈출과정에서 20명(실미도 2명, 인천 조개고개 3명, 버스 자폭 15명)이 숨졌다. 탈출에 앞서 탈영병을 포함하여 훈련 중 7명이 사망했고, 자폭에서 살아남아 생포된 4명은 사형되었으니 실미도 부대원 31명 전원이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 표현대로 ‘귀환’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북한이 아니라 실미도에서 귀환하지 못했다.  

 

사태수습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1971년 8월 23일 오후 3시 10분 김재명 대 간첩 대책본부장은 이들을 공비라고 발표했다. 3시간 후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특수범들의 난동사건으로 정정 발표하면서 실미도 부대원들이 특수 격리된 사형수와 같은 중형 범죄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명백한 허위사실이었다. 실미도 부대 창설의 책임은 중앙정보부, 공군, 그리고 대통령에게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이 당시엔 은폐되었다.

사건 당시 8.23 사태를 무장공비로 보도하고 있는 기사
사건 당시 8.23 사태를 무장공비로 보도하고 있는 기사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실미도에 있던 관련 자료는 소각됐으며 남은 자료는 국군정보사령부에 넘겨졌다가 1997년에 이 모 소령이 본인 업무와 무관하다는 판단하에 그것들을 소각했다.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은 군사재판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반면 군 수사기관은 의도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하였다. 재판관할권 자체가 논란거리였다. 부대원들은 법적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었고 군사재판에서도 민간인 취급을 받았다. 군법회의법(1987년 군사법원법으로 명칭 변경) 제2조 제3항에 따라 초병살해죄는 군사법원의 관할이지만, 민간인이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민간법원 및 수사기관으로 이첩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구속 사실과 번호인 선임이 가능함을 가족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으며 국선 변호인이 선정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그해 12월 6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2심에서는 변론이 생략되었고 항소는 기각되었다. 이어 부대원들은 상고를 포기했고 12월 30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1972년 3월 7일 사형집행명령이 내려지고 3월 10일에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은 사형되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부대원들이 상고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사실이다. 실미도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월남 파병 등 생존 부대원들에 대한 직간접적 회유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민간법원에 관할을 이전하지 않은 사실과 함께 고려해본다면 대법원에 자료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파병 등으로 회유했다는 증언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이들의 사형집행은 가족들에게 통보되지 않았고 형 집행 후 시신 역시 인도되지 않았다. 그들의 시신은 불법 매장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구체적인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매장지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미도 부대의 진상 파악은 2005년 과거사정리법 제정에 따라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구성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자체 조사가 전부다. 실미도 조사 보고서는 결론에서 관련자들의 증언 거부 등의 사유로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2020년 5월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31명의 부대원이 알리고 싶었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강우정ㆍ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농구하며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한다. 법과 철학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많은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다.

 

안치용ㆍ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ㆍ문학ㆍ신학 공부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죽음,역사의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박수연ㆍ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 재학. 호기심과 열정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균형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1. 이명례,「1968年 1.21事態 背景에 關한 硏究 : 1960年代 北韓의 南韓政勢認識과 南朝鮮革命戰略을 中心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1993.

2.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종합 보고서』 제 2권. 

3. 장준갑,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데탕트와 한미관계」, 『역사와 경계』 70, 부산경남사학회,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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