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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3) - ‘확장된 표현형’, 인간이란 무엇인가?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3) - ‘확장된 표현형’, 인간이란 무엇인가?
  • 안치용 l 인문학자
  • 승인 2021.02.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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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세상을 겪으며 진부하지만 새삼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rototype)’을 떠올리게 된다. 도킨스의 유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의 ‘유전자의 긴 팔’ 논의에서 언급된 내용이 아예 『확장된 표현형』이란 하나의 책으로 논의가 확장되어 출간됐다. ‘확장된 표현형’의 세계에서 주체는 유일하게 유전자이다. 고등생물은 유전자에 의해 간택된 운반자로 ‘확장된 표현형’에 불과하다. ‘확장된 표현형’은 도킨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자면 근대인이 되찾은 신(神)이다.

유전자는 ‘확장된 표현형’인 운반자를 때로 갈아탄다. 갈아타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만으로 우리는 이미 바이러스와 숙주 사이의 관계와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 사이의 관계가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모성애, 유전자의 흉계?

코로나19바이러스감염병을 겪으며 의학상식이 높아져서 바이러스와 세균을 구분하는 일반인이 많아졌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통상 미생물로 분류돼 인간 같은 고등생물과 대별되는 듯 설명된다. 생물학자가 아닌 나의 직관적 분류법에 의거하면 바이러스와 세균 사이의 유사성보다 세균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더 크다. 바이러스는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중간 성격에 해당하기에 독자적 생명체로 살아갈 수 없고 숙주를 필요로 한다. 반면 세균과 인간은 바이러스와 달리 독자적 생명체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다. 도킨스가 말한 ‘확장된 표현형’이다. 

물론 바이러스도 ‘확장된 표현형’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간접적 생존 방식조차 유전자의 선택으로 본다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택한 분류가 하나의 유비로서 성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착취하며 살아가기에 숙주와 공생해야 하며 어쩌다 숙주를 죽이면 자신도 소멸한다. 여건이 갖춰진다면 마음껏 생명력을 발산하고 싶은 여느 생명체와 달리 바이러스는 생명력의 발산을 자제해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았다. 발산과 자제 사이에는 보기에 따라서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소설이기에 주인공이 당연히 인간이지만 제목이 제목인지라 코로나 시대에 ‘페스트’ 또한 주목받았다. 흑사병으로 번역되는 페스트는 유럽 중세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질병이다. 소설 『페스트』는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 북부 해안의 작은 도시 오랑(Oran)을 무대로 한다.

페스트는 코로나19와 달리 바이러스가 아니라 세균에 의해 전파되는 감염병이다. 감염병은 인간 중심의 명명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감염병이지, 페스트균에게 감염병은 생명력의 분출이자 확산이다. 

포유류인 인간이 생명력을 분출하며 확산하는 방법은 바이러스나 세균과 다르다. 인간은 유성생식하는 생명종이다. 암과 수라는 성의 구분과 결합에 의지하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분열하는 방식인 무성생식과는 판이한 유성생식 방식을 발전시켰다. 생명종의 번식전략 고도화이자, 도킨스 관점을 채택하면 유성생식을 통한 유전자 전달방법의 효율화와 고도화인 셈이다. 체세포 복제라는 반칙이 등장하긴 했지만, 인간은 다른 성(性)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를 후대로 전할 수 없다. 다른 성을 찾아내, 이른바 짝짓기를 통해 자신을 후대에 전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그 지분은 절대 50%를 넘지 않는다. 반대로 아버지를 증오하는 자식이 있다고 한다면 유성생식한 포유류로서 자신 몸의 50%나 아버지로 채워야 하는 태생적 저주를 수용해야 한다. 

한마디로 사실상 ‘자체 복제’인 무성생식과 달리 유성생식에서는 자체의 일부를 쪼개서 다른 개체가 스스로를 쪼개어 내어놓은 부분과 합체하여 후손을 만들어낸다. 이 방식이 생식의 주체로서는 불만스러울 수 있는 게 시간이 흐를수록 최초 주체의 흔적이 희미해진다. 반면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의 관점을 따르면 유성생식이 더 많은 표현형을 제공하게 되므로 유전자 입장에서 유성생식은 편익이 늘어나는 만족스러운 방식이다.

유전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암과 수 또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게 더 강력하게 끌리는 유성생식 메커니즘이 긴요하다. 상호끌림의 프로그램은 기본설정에 해당한다. 여기에 거의 기본에 준하는 추가 사양으로 모성애가 주어진다. 모성애를 포유류인 인간의 유성생식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극단적 설명법이긴 하지만 아주 틀린 얘기라고 하기는 힘들다. ‘결과물’ 대신 인간의 유성생식 메커니즘의 핵심요소라는 표현도 타당하다. 

그러나 만일 이 수준에서 이야기를 종결짓는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단지 경제결정론이라고 말하고 끝낸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될 터이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상부구조의 역동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모성애가 생물학적 범주와 무관하지 않지만, 적어도 인간의 모성애는 그 범주 너머에 위치한다. 모성애가 포유류 생존전략의 귀결이긴 하지만 생물학결정론을 초월하는 말하자면 인간다움 혹은 숭고함과 관련한 특정한 가치가 모성애에 투영됐다는 얘기다. 인간은 생물학적 규정, 관점에 따라 곤경을 극복한 뒤에 혹은 극복하며 문명과 사회를 발전시킨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종이다. 모성애에도 같은 도식이 적용된다. 따라서 모성애가 유전자의 흉계에서 비롯한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종의 모성애는 유전자에게 세게 한 방을 먹였다고 말해야겠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소설 『페스트』는 감염병이 창궐한 시기의 인간을 다룬다. 소재 면에서는 생명종 간의 싸움이다. 페스트균 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대격돌.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면 생명력을 가능한 한 많이 분출하여 정복하고, 만일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도망하는 원칙으로 생명종은 존립한다. 이길 수 없을 것 같은데 도망할 수도 없으면 그때는 운명을 논해야 한다.

인간이 지구 행성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올라선 데는 개체의 경쟁력과 함께 인간종이 찾아낸 협업시스템이 주효했다. 다른 생명종보다 효율적인 번식이 가능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식 가치 존엄 등과 같은 추가적인 의식을 인간은 발굴했다. 이런 추가적인 특성이 지적 생명체인 인간이 지구를 덮어버리는 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확실하지는 않다. 지능과 같은 개체의 경쟁력과 인간종의 협업시스템의 기여는 뚜렷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존엄 등과 같은 추가적인 특성이 인간종의 번식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것 같지는 않다. 

『페스트』의 주요 등장인물 중에는 오랑에 취재하러 온 기자 랑베르가 있다. 취재하러 왔다가 느닷없이 도시가 봉쇄돼 그곳에 갇힌 랑베르는 계속해서 탈출을 꿈꾼다. 그러다가 막상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페스트가 만연한 도시에 잔류하기로 결정한다. “행복을 택하는 게 뭐가 부끄러우냐”라는 의사 리유의 탈출 권유에, 랑베르는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 대답이 잔류의 이유다. 생존보다 부끄러움을 피하는 것을 더 우선했다. 

의인법을 써서 만일 페스트균이 랑베르였다면 페스트 씨(氏)는 무엇보다 일각의 지체 없이 오랑을 탈출했을 것이기에 저런 문답을 주고받지 않았을 터이고, 행동과 별개로 더 더군다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을, 부끄럽다는 이유로 포기한 랑베르의 행위에서, 인간을 전복된 의미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는 아니지만 종종 유전자 대신 ‘확장된 표현형’ 자체의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유전자의 기세를 꺾어버린다. 유전자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어 무력한 생존을 이어가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비록 자신이 ‘확장된 표현형’에 불과하여 유전자의 영원성에 비해 미미한 현존에 불과하지만 이 미미한 현존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존재를 건다. 개체가 ‘확장된 표현형’ 자체의 의미를 천착하는 상황은 유전자에게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다. 개체가 단순 전달자의 역할을 포기하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균과 달리 인간은 리비도와 타나토스를 동시에 표출하는 존재다. 생명력과 자기파괴가 공존한다. ‘확장된 표현형’이란 규정이 대부분 유효하지만, 때로 확장을 거부하고 즉 전달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에 골몰하다 보면 리비도와 타나토스가 결합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낮과 밤>, 2008 - 스티벨 베르크

소설 어머니의 전형성과 ‘확장된 표현형’의 맥락

고리키의 『어머니』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전형성이 강조된다. 전형성이란 것이 현실의 군더더기를 어느 정도 정리하여 인물의 특성에서 세계의 침로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도록 한 것이어서 대체로 주인공에서 고귀함이 우러날 수밖에 없다. 사소한 문제는 『어머니』의 어머니가 너무 고귀해서 소설에서 약간의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대학생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어머니의 그 고귀함으로 인해 감동한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만, 무결이란 것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무결의 현상은 오히려 무결하지 않은 증좌라는 사실을 세월이 알려주어서인지 지금은 덜 전형적인 전형성에 더 기대를 품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성과 함께 소설 『어머니』는 모성을 전개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모성은 앞서 살펴본 대로 생물학적 본능이고, 동시에 본능을 극복한 인간의 고귀한 본성이자,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듯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신화다.

아마 세 가지 설명 중에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기보다는 세 가지 모두가 모성을 설명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물학적 본능은 우리가 포유류라는 데서, 고귀한 본성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데서, 그리고 강요된 신화는 우리가 유사 이래 만들고 유지한 사회가 가부장제라는 데서 찾아진다.

가부장제의 기원에 관한 많은 설명 중에서 사냥꾼과 양육자 모델의 분업이란 것이 있다. 인간 여성이 다른 포유류에 비해 유난히 생리혈을 많이 쏟는다는 사실에 착안한 설명이지 싶다. 인간 여성의 이러한 비효율적 생리는 외부로부터 철분 유입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런 필요가 사냥꾼 남성과 분업 혹은 의존으로 연결됐다고 이야기한다. 철분 공급자로서 사냥꾼 남성과 양육자이자 가사 담당자로서 여성이란 이러한 분업 모델은 과학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신화 또는 이야기에 가깝다.

여성이 어떻게 의존과 종속으로 이어지는 최초의 분업관계를 맺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시발을 재미있게 풀어내고 또한 그러한 가부장제하에서 남성에게 왜 부성이 의의를 갖지 못했는지를 그려내는 모종의 설명력이 발견된다는 게 흥미롭다. 게다가 인간은 포유류다. 인간의 아이는 항상 여성의 배를 통해서 태어나고 젖을 통해서 양육된다. 낳을 수 없고 젖을 물릴 수 없는 남성은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는 여성에게 대신 더 많은 철분을 공급한다는 설정이 ‘확장된 표현형’의 관점에서 유의미했을 터이다. 

인간 여성은 폐경을 통해 남성과 별개인 협업체계를 구축한다. 인간 남성이 죽을 때까지 번식과 성(性)에서 혹은 ‘확장된 표현형’의 확장에서 경쟁한다면 인간 여성은 나이가 들어 폐경함으로써 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성(性)에서는 완전 퇴장이라고 하지 말아야 하겠으나 대체로 전반적인 퇴장의 모양새를 취한다고 한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거의 인간종에게서만 목격되는 폐경은 나이 든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의 조력자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종의 생존과 번성에 큰 이점이 되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나이 든 여성이 번식 경쟁에서 물러나 젊은 여성의 번식을 후견하는 데 따른 편익은 크다. 단순히 경쟁 압박을 줄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경쟁과 출산ㆍ양육의 경험을 전수하고, 나아가 직접 젊은 여성의 출산과 양육을 조력함으로써 인간종의 번식효율을 높였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분업과 여성 내에서 세대 간의 협업은 번식효율 제고와 함께 가부장제의 고착과 확대로 연결되었다. 남성은 내부에서 경쟁하고 여성은 내부에서 협력하는 상이한 구도는 성을 기준으로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를 확고히 하는 한편 남성 내에서 ‘확장된 표현형’의 역할 수행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일상적 적대 풍경을 낳았다. 인간종의 번식에 유리한 환경은 ‘확장된 표현형’의 기능 수행에도 유리한 것이어서 유전자는 도킨스의 지적대로 인간종과 인간 개체, 그리고 인간 존재를 확실하게 압도한다.

여기서 가부장제는 억압을 강화함으로써 ‘확장된 표현형’의 기능을 더불어 강화한다. 여성혐오와 성적 착취는 부계 유전자의 전달이라는 강박과 깊숙이 연결되는데 문제는 아무리 강력한 강박과 강제가 작동한다고 하여도 유전자의 전달은 모계를 통해서만 확인된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부계 유전자의 전달 강박증은 가부장제 강화와 상호 되먹임하며 구조적으로 고도화하였지만 현상적으로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자 전달이 입증되는 인간 포유류의 본원적 한계로 인해 인간 남성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인간 여성의 속임수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제는 부계 유전자 전달 강박 아래 ‘100% 부계 전달’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지만, 사실 가부장제가 성공적일수록 가부장제는 ‘확장된 표현형’의 기능 충실도를 높일 뿐이었고 캐치프레이즈는 사실과 무관하게 강박을 덜거나 속임수의 확률을 낮췄다는 플라시보 효과 정도나 구현하였다.

20세기 후반 이후 유전자검사는 이런 ‘속임수’를 잡아낼 수 있게 했다. 이 속임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여성 자신도 모르는 속임수일 수도 있다. 앞으로 유전자검사가 더 정교해지고 더 편리해지는 시대가 도래할 텐데, 그때는 속임수가 완전히 사라질까. 더불어 강박에서 풀려난 계기를 확보한 남성이 가부장제를 포기할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될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페스트』 속 랑베르의 발언에서 이 ‘혼자’는 인간종을 의미하지 남성이란 특정한 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은 같은 방향으로 전진해야 할 텐데 여전히 이 둘은 상충하거나 적대적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이 맥락에서 말한 휴머니즘은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사이비 휴머니즘에 불과하다고. 이 휴머니즘은 유전자가 ‘확장된 표현형’을 이용하듯,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보편성을 주는, 말하자면 또 다른 ‘확장된 표현형’을 이용하는 양태에 다름아니다.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관련하여 인간종의 (결국 유전자의?) 양육구조보다 더 강력한 적정성과 효율성을 구현한 시스템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확장된 표현형’은 살펴봤듯 어이없이 가부장제와 연결된다. 인간이 단지 포유류란 이유만으로 ‘확장된 표현형’은 여성해방에 적대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사냥꾼과 양육자 모델처럼 이것 또한 하나의 이야기이기에 정색할 필요는 없다. 

사소한 논점으로, 소설 『어머니』에서 발견되는 적잖은 가부장제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념 때문에 자식을 포기하는, 러시아 혁명기의 다른 어머니 이야기는 이 소설의 큰 흐름인 가부장제와 상충한다. 이념은 모성애를 극복한다. 이 상충은 ‘확장된 표현형’에서 어떤 맥락을 찾아낼까. 마찬가지로 정색할 필요는 없지만 ‘확장된 표현형’의 맥락이 살짝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그 끊김은 ‘확장된 표현형’의 맥락에서 사소한 장식에 불과할 것이다.

 

강간을 화간으로 만드는 각각의 상이한 관점

남아공 소설가 존 맥스웰 쿠체가 쓴 『추락』에서 플롯의 핵심인 강간 사건은 기이한 결말을 맺는다. 문명 이전 단계에서 강간이란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했는지는 애매하며 지금에서야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강간은 적어도 문명 이후의 사건이며, 현재와 같은 의미로는 형법에 의한 처벌이 가능해진 근대국가 출범 이후에야 하나의 사건이 됐다.

강간은 문명 이전과 달리 항상 일종의 사회적 행위로 명백한 범죄였다. 강간이 사회적 행위라는 말은, 근대 국민국가의 출범 이후에도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통해 강간범이 신생아의 아버지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순간 사실상 면책되곤 한 데서도 확인된다. 근대의 법체계가 무력해지면서 생물학적 번식과 가부장제의 폭력이 일상적인 권위를 행사한 장면이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가부장제 사회의 기제가 작동하며 강간은 강제로 화간이 된다.

이 대목에서 가부장제는 ‘확장된 표현형’과 협력한다. 성폭력은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한 ‘확장된 표현형’의 확장구조에서 환영받는다. 인간을 ‘확장된 표현형’으로 격하하고 유전자를 만물의 주재자로 추앙함에 따라 모든 인간적인 가치는 상각된다. ‘확장된 표현형’이란 용어는 사실 누구나 이미 이해하고 있는 번식의 개념을 상업적 수사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영역에서라면 이런 표현이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만 가부장제 질서와 성폭력 등을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만드는 논리구조라는 점에서 ‘확장된 표현형’이란 용어의 해악은 적지 않다.

소설 『추락』에서 강간당한 주인공은 임신 사실을 알고도 낙태를 선택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간과 임신, 낙태와 출산은 ‘확장된 표현형’과 가부장제의 폭력이란 문맥을 살짝 벗어난다. 문명화 시대 강간에 대한 생물학적 대응이라고 할 낙태를 자의에 의해 주체적으로 거부하고 출산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주인공은 앞서 언급한 일반적 성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인식과 태도를 보인다. 물론 소설의 사건은 사건이면서 동시에 비유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남아공 인종차별의 역사와 새로운 시대를 소설적 비유로써 모색하려는 작가정신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 논의가 석명되지 않는다.

‘추락’으로 번역된 소설의 원제는 ‘Disgrace’이다. 모호하지만 간단하게 소설 속 강간 사건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disgrace’를 통한 ‘grace’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린다면 과도한 상상이긴 하겠지만, 기독교에서 신의 육화는 인간에서 신의 ‘확장된 표현형’을 구현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신의 추락과 좌절을 통해 옛 인간의 단절과 새 인간에게 ‘확장된 표현형’을 선물하는 것이었다고 할진대, 아주 무관하지는 않겠다.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을 비틀어 쓴 이 ‘확장된 표현형’은 ‘disgrace’를 통한 ‘grace’의 회복과 같은 문법을 취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확장된 표현형’보다는 ‘주체의 확고한 표명’이 더 중요하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이 표명이 중요한 것은 인간은 단지 바이러스의 숙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새롭게 자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반드시 자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자각의 대상이 바이러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이 글은 『어머니』(막심 고리키), 『거대한 잠』(레이먼드 챈들러), 『추락』(J. M. 쿠체), 『수상한 라트비아인』(조르주 심농), 『빌라 아말리아』(파스칼 키냐르), 『페스트』(알베르 까뮈)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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