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호 구매하기
[안치용의 문화 톡톡]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민의 지배는 정언명법이다
[안치용의 문화 톡톡]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민의 지배는 정언명법이다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21.06.21 00:5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플라톤이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모색하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 혹은 민주주의에서 이상국가의 대체물을 찾았다. 그에게는 이상사회의 이념 자체보다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아를 쫓느라 이데아와 분리된 공허한 현실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질료와 형상이 통합된 가능한 최선의 현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목표였다.

물론 지금의 민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하는 민주정체 또는 민주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정치의 주인이다는 공식적 강령은 동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불가피한 체제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이상으로 폴리스가 커지면 민주정체 외에 다른 정치적 대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단의 판단이 현명하다고 받아들이는 한편 최고 권력 또한 민중이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의 폐해를 우려하는데, 대표적인 게 중우정치나 선동정치이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면서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면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법의 지배 아래서 민주정체를 유지하고 나아가 그 국가는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제공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지금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관점이다. 현대 국가들 중에 국민에게 단순한 생존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국가가 적지 않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 그러하다. 상당한 수준으로 경제가 성장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적인 생존이 보장받지 못하는 경계밖의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지금에 비해 생산력이 많이 떨어진 고대 그리스에서 생존을 넘어선 훌륭한 삶이란 전망이 제시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 사람이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란 사실이 더 놀랍다.

현실주의자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슷한 견지에서 잘 정돈된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일상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여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노예제도와 연관성만 뺀다면, 이 발언은 장차 도래할 이상사회에 관한 칼 마르크스의 발언을 연상시킨다. 계급사회를 넘어서 도달한 이상사회에서 사람들은 최소한으로 노동하고 사냥하고 돌아와서는 철학을 토론하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두 발언만으로 판단하면 두 사람이 같은 진영에 속한 듯이 느껴진다. 철학사에 진영논리를 적용하면 일반적으로는 플라톤과 마르크스가 같은 진영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된다. 최상의 현실주의는 결국 이상주의와 맞닿게 마련이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훌륭한 삶을 가능케 한 조건으로,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노예제가 기본값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 논의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사실 당시 그리스의 생산력 수준에서 노예의 노동 없이는 일상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여가를 가지는 삶이 불가능했다. 마르크스는 높은 생산력에 힘입어 적게 노동하고 여가를 즐기는 세상을 상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낮은 생산력을 노예노동으로 메우면서 마르크스가 상상한 것과 비슷한 세상을 상상했다. 물론 생산력이 매우 높아졌다고 하여도 계급이 철폐되지 않는다면 불균등한 분배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중의 유유자적한 삶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상사회의 조건으로 마르크스는 계급의 철폐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계급의 존속을 전제한 셈이다. 마르크스의 계급철폐가 작의, 즉 애써서 성취해야 하는 현상타파의 과제인 반면 아르스토텔레스의 계급존속은 부작의, 즉 현실에 저절로 주어져 있는 현상의 수용이란 차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노예제란 아킬레스건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의 지배와 법치주의를 정식화함으로써 정치사상사에서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민의 지배는 하나의 정언명법이다. 지배라는 구체적 행위 없이 말의 성찬으로 남용되는 경향이 뚜렷하긴 하지만 민의 지배는 어쨌든 변경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하기에 민의 지배를 배반하는 이들도 겉으로는 민의 지배를 표방할 수밖에 없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내용은 논외로 하고 외형상 민의 지배를 부인하는 곳은 하나도 없다.

법치 또한 근대 혹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법치는 대체로 관철된다. 그러나 용어 자체에서 가치가 드러나는 민의 지배와 달리, 꼭 가치가 아닌 기능만이 드러나는 법치라는 용어 특성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법치는 대체로 민의 지배에 복무하기는커녕 민의 통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는 맹점을 보인다. 작금의 법치는 민의 지배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민의 지배를 저해하고 나아가 민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다양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현실주의자는 보수주의자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온 내용을 종합하면,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정의(正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正義)는 평등한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결국 정치는 간단하게 말해 밥그릇 나누기, 그것도 공평하게 나누기를 뜻하는데, 공자라든지 동양 사상에서 주창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정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크게 보아 동양의 선현과 같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러나 현대 국가에서 정치는 경제와 분리되며 정치집단이나 자본가집단이 암묵적 합의하에 이러한 정경분리를 구축하고 유지하며 확대하려고 한다. 지금 정치가들의 정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사기치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구하려면 중용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도 논의되는데, 간단히 말해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를 구하려면 중용을 구해야 하며, 여기서 법이 곧 중용으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에서 해방된 이성을 법이라고 말했다.

욕구에서 해방된 이성’, 즉 법을 잘 준수하는 것이 중용과 정의에 연결된다고 한다면 이 때 앞서 논의한 법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닌 셈이다. 법의 지배를 이야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기존의 법을 지켜야 하고, 지키는 법이 온당해야 한다는 두 가지 전제를 내세웠다. 사실 기존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법의 지배란 말을 반복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지키는 법이 온당해야 한다는 명제을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금언과 대조를 이룬다. 물론 단순히 형식논리상의 대조를 넘어서는 심오한 논의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경향의 차이는 뚜렷하다고 판단해도 좋겠다. 경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악법은 법이 아니라라고까지 생각을 밀고나가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대비되는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면목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법치는 개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자면 공동체의 윤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동일하게 중용이란 해법을 처방한 셈이다. 사실 혁명이란 급진적 계기와 모멘텀이 주어진 아주 특별한 시기의 장을 제외한다면 우리에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법 말고 다른 해법은 없지 않는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두 전제 가운데 후자에 대해서는 눈감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행사하는 세력에게 온당한 법이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법에 불과하다. 법을 만들거나 행사하는 데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혹은 명목상의 권한만 주어진, 그저 법을 지키도록 강요받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법은 욕구를 억압하는 폭력일 따름이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현실하에서 통상 보수주의자 또는 현실주의자로 취급받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많은 진보를 성취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나 약자들이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반면 강자들은 그 어느 것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조금 깊은 신학적 논의 차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퀴나스를 통해서 인간의 주체를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진보적인 기독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신이 직접 개진하든, 타인에게 영감을 주든,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현실을 깊숙하게 천착함으로써 심오한 통찰과 넓은 사유의 지평을 확보하는데, 가능한 진보가 심오한 이상보다는 가능한 현실에 기반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웅변한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1-06-22 01:07:12
하느님의 종교인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의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하느님과 별개의 철학인 도교,불교를 이해하는것도 어느정도 필요합니다.도교는 유교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점에 주안을 두지 않고, 후대에 갈수록 불교의 보살같은 용어도 사용하여,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 이어진 유교의 하느님(天).공자님과 맞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원래부터 창조신 브라만에 항거하여 부처가 새로 만든 후발신앙으로 브라만을 섬겨온 인도에서도 다시 배척받게 된 인도발 신앙입니다. 창조신보다 높다는 Chimpanzee류의 부처를 받드는 무신론적 Monkey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불교와 섞인 후대의 중국 도교도 그런 위험을 가지고 있는 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철학.민속적으로만 접근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