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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김학철, 김석범의 국적은 어디인가?
윤동주, 김학철, 김석범의 국적은 어디인가?
  • 이혜진 l 세명대 교수
  • 승인 2021.10.2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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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과 정체성의 대중심리

몇 년 전 중국 옌볜을 방문했을 때,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나는 옌볜작가협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과회에 동석했다. 다음 날 일정은 룽징(龍井) 명동촌(明東村)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 생가를 중심으로 한 답사를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윤동주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윤동주의 국적은 어디인가에 대해 물어봤다.

 

윤동주 생가

윤동주 생가의 입구에는 중국어와 한글로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씌어 있다는 사실을 두고 많은 한국인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경험을 자주 접해왔기 때문이다. 중국의 백과사전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도 시인 윤동주의 국적은 중국, 민족은 조선족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옌볜작가협회의 70대 작가들 사이에서 윤동주는 ‘조선족’이라는 의견과 ‘한국인’이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데는 물론 각각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1945년 향년 29세의 시인 윤동주가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사망할 당시 그의 국적은 ‘대일본제국’이었다. 즉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공식적으로 일본인이었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나고 자랐지만, 북간도로 떠나기 전 명동촌 사람들의 고향은 함경도 회령이었다. 그는 평양과 경성에서 중학교와 대학교 시절을 보냈고, 도쿄와 교토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1943년 일본 관헌에 체포돼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숨을 거뒀다. 한국에서는 단지 짧은 학창시절을 지냈을 뿐 굳이 따져본다면 그의 출신지는 북한이며, 북간도 명동촌이 1932년 만주국에 편입됐던 사정을 고려해도, 그의 생애는 북한과 중국과 일본에 깊이 관련돼 있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한다면, ‘윤동주는 한국의 대표시인’이라는 주장을 위한 근거가 궁색해질지도 모른다. 

한편 ‘항일 빨치산 문학의 기원’(김윤식)으로 평가받는 소설가 김학철의 이력은 보다 더 다이내믹하다. 191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그는 1930년 원산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에 서울의 보성고보에서 수학하다가 1936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팔로군 소속의 조선의용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37년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했고,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평생 한쪽 다리에 몸을 의탁한 채 전 생애를 이어갔는데, 이는 1941년 하북성의 ‘호가장(胡家庄) 전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돼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전향선언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때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소속이었기 때문에 전투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면 전쟁포로로 분류돼 제네바협정에 따라 처리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김학철은 스좌장(石家莊)에 위치한 일본총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옮겨졌다. 이것은 당시 일본군이 김학철을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출옥하자마자 서울로 귀국했다. 하지만 1946년 월북을 감행한 그는 평양에서 5년간 <로동신문> 기자생활을 하던 중 북한 정치체제에 환멸을 느껴 또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작가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에 ‘반혁명스파이’로 몰려 10년간 투옥생활(1967~1977)을 한 후 1985년, 지도에도 없는 ‘조선’ 국적에서 중국 국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방대한 분량의 한국어 작품을 생산해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지만 1980년대 한국에서 그의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과 장편소설 <격정시대>는 한때 베스트셀러로 유통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2001년에 그는 공식적으로 중국인이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장편소설 <화산도(火山島)>(1965-1997)의 작가 김석범은 192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대학 문학부 미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이전에는 주로 일본에 거주했지만, 1943년 부모의 고향인 제주도에 1년간 머무르며 청년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할 계획을 가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잠시 국학전문대학을 다녔으나, 1948년경 다시 오사카로 밀항했다. 재일조선인 김석범은 현재 남과 북이 분단되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조선적(朝鮮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그는 현재 지도에서조차 사라져버린 ‘조선적’을 남북한의 ‘통일국적’으로 간주하면서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중의 한 명이다. 

이렇듯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들의 국적은 당사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국의 자의에 따라 강요당하거나 박탈되는 과정을 거쳐 모호하게 정립됐다. 즉 전전(戰前)에는 법적으로 일본인과 동등한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었던 재일조선인들은 패전 직후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외국인의 지위로 전환되면서 돌연 난민의 상태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가 분단된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인이 돼버린 재일조선인들은 외국인등록신청서의 ‘국적란’에 어느 쪽의 적(籍)을 기입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패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이 국적을 선택하는 행위란 자신이 나고 자란 일본국이 아니라 분단된 조국 한반도의 어느 한쪽을 취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통일국가 수립을 지상과제로 간주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분단된 한반도의 한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통일국가 수립의 대명제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이 현재까지도 일본, 남한, 북한 중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지도상에서 증발해버린 ‘조선적’을 고집하며 결국 ‘무국적자’로 남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2015년 90세의 작가 김석범이 서울에서 열린 <화산도>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려 했을 때, 그의 ‘조선적’을 문제 삼아 한국 정부가 입국 불허 조치를 감행했던 것은 현재까지도 그가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난민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리샹란
마를레네 디트리히

세습적 희생자 의식의 정신사

한편 과거 제국 일본이 점령한 만주에서 ‘만영(滿映)의 전설적인 간판스타’로 불렸던 리샹란(李香蘭)은 만주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으나,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겸비해 일본 국책영화에서 일본 남성을 사랑하는 중국 여성의 역할을 도맡아했다. 부모의 출신지를 따라 그의 본적은 일본 사가현이었으며,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였다. 하지만 유년시절 노래 솜씨가 빼어났던 야마구치는 베이징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던 데다 ‘대중에 거부감을 주지 않는 소녀’라는 이유로 ‘일만친선’을 목적으로 한 문화활동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오족협화’ 이념을 선전하는 데는 중국에 대한 침략 이미지가 강한 일본인보다는 중국인이 더욱 적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야마구치는 ‘오족협화를 위한 중국 소녀’의 이미지를 갖춰나갔지만, 결국 어느 순간 ‘진짜 중국 중국인 소녀’로 둔갑해버렸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중에 조선과 홍콩 등에서 공연을 했던 리상랸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거대한 팬덤이 형성되기도 했다. 즉 ‘리샹란’은 만영의 상업자본과 만주의 국가권력이 공모한 ‘대동아공영의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만주국 이데올로기인 ‘민족협화’의 이미지를 전파해가면서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 스타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본명), 리샹란(李香蘭, 중국), 판슈화(潘淑華, 중국), 리코란(일본), 이홍란(홍콩), 이향란(조선) 등 시대와 장소, 심지어 정치적 이유에 따라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는 ‘3등 국민’인 중국인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고 또 일본이 패전하자마자 중국인들은 일제히 일본인임을 숨기고 중국인으로 행세해왔던 리샹란을 매국노로 몰았다.

패전 후 리샹란은 중국에서 ‘한간(漢奸)’ 혐의로 전범재판에 회부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일본인 호적을 통해 극적으로 구조된 뒤 일본인으로 회귀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이 ‘야마구치 요시코’가 ‘리샹란’으로 둔갑해 제국주의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그를 냉대했다. 전후 일본에서 야마구치 요시코는 결국 재기에 실패했다.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자서전을 펴낸 뒤 전쟁고아나 위안부 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등 오욕의 역사와 정면대결하면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이념에 적극 편승해갔다. 1974년 54세로 일본 자민당 참의원 의원에 당선된 것은, 마침내 ‘일본인으로의 회귀’에 대한 승인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야마구치 요시코는 1979년 TV 아사히의 방송 프로그램이었던 <안녕하세요! 북조선(こんにちわ! 北朝鮮)>의 리포터의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단독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고 이 일은 일본에서도 대서특필됐다. 당시 김일성은 해외 언론 접촉을 기피하고 있었는데, 과거 중국에서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청년시절 자신 역시 ‘리샹란’의 팬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야마구치 요시코의 인터뷰 제안에 응했다. 야마구치는 1992년 정계를 은퇴한 이후에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청하는 등 제국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자는 발언을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영광의 흔적을 무너뜨리는 일을 선도했다. 

전후 일본이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태도는, 전후 독일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인 사죄의 태도와 대조적이어서 종종 비난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패전 직후의 독일 역시 자국의 과오를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가령 독일 태생이었지만 히틀러의 제3제국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사례는 패전 독일이 오욕의 역사와 대결하면서 자국의 과오를 승인하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 독일에서 막 스타덤을 형성하고 있었던 마를레네는 히틀러의 지원을 뿌리치고 미국에 망명,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 독일의 적이었던 연합군을 위한 무대에서 노래하면서 영원한 병사들의 연인이 됐다. 그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는 포멀 매니시 슈트 차림은 세련된 도회적 멋과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팜므 파탈’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급기야 할리우드의 ‘섹시 심벌’로 등극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지 약 40년 만인 1979년 영화계를 은퇴했을 때조차 연합군의 프로파간다였다는 이유로 독일 국민은 그를 조국의 배신자로 간주했다. 그런 탓에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독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2차 대전 중 ‘독일의 배신자’라고 야유하던 대중의 냉대에 대해 말년의 디트리히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독일 태생이며, 언제나 독일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조국이라 부를 만한 것을 상실했을 때 미국은 나를 반겨 주었다”라고. 디트리히는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고, 미국에서 누렸던 분에 넘치는 명예를 인정했다. 훗날 전쟁의 한복판에서 독일을 떠난 이유에 대해 디트리히는, “그것은 가슴 아픈 시간이었지만 그때 나의 행동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라는 답변에 이어, 자신의 반파쇼 의식은 ‘품위에 대한 감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응수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겪은 고통을 잊을 수 없었던 독일인들에게 디트리히의 태도는 매우 독선적으로 비쳤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비참한 경험과 회한을 공유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할리우드를 은퇴한 이후 그는 공식석상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끝에 1992년 5월 6일 90세로 사망했다. 디트리히가 사망한 지 10년이 흐른 2002년 독일 정부는 그를 ‘독일 명예시민’으로 추서하고 그의 고향에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을 조성하는가 하면 생전의 바람대로 파리에 있던 그녀의 묘지를 베를린으로 이장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것은 2차 대전 발발에 대한 책임과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가적 반성의 기운이 일던 시기 역사적 과오에 대한 성찰의 일환이자 평화주의 달성에 기여할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하자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국의 반역자를 용서하는 일이란 독일인들에게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독일인에게도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기 위해 조국의 반역자와의 화해를 통해 과거를 극복해가는 과정은 여전히 힘겨운 일이었다.

이렇듯 제국-식민주의와 냉전시대를 경유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국적을 둘러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들의 국적이 시시각각 편의에 따라 정의돼온 사례와 대중의 히스테릭한 반응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연약한지, 또 거기에 기반을 두고 성립된 문화권력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확인시켜준다. 국가는 국민의 희생을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전쟁 영웅을 위한 추모원을 만들고 특별한 애도에 동참을 촉구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의 내셔널리즘은, 일본 내셔널리즘에 대한 대항의식과 반공주의가 결합될 때 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해왔다. 특히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는 한국인들에게 ‘세습적 희생자’(지그문트 바우만)라는 집단의식을 확산시켰다. 이들의 국적을 규정하는 과정이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셔널리즘을 근거로 삼는 것에는 ‘세습적 희생자의식’이 전제돼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세습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임지현)는 우리가 입은 피해가 가장 크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수동적 민족주의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적대적 상황에 처했을 때 공격적·배타적 민족주의로 나타날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국 근대 신문화의 발전과정을 돌아보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할 때 여전히 그것의 정신사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글·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됐다.


참고문헌
이혜진, <제국의 아이돌>, 책과함께, 2020.
이혜진, <1945년 해방과 패전의 서사>, 국제어문 제79집,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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