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극우가 학생인권선언을 왜곡하는 법
극우가 학생인권선언을 왜곡하는 법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3.07.31 18: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6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파리 본사에 모인 세계 30개 국제판 발행인들은 극단적인 극우의 부상과 이들에 의한 역사의 조작을 심히 우려했다. 프랑스는 물론,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칠레, 헝가리, 우루과이, 일본 등 각 국제판 발행인들은 자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정치 현상을 고발하듯 나열했다.(관련기사 참조)

1990년 미·소 진영 간의 냉전이 끝나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미국 자유민주주의 승리에 힘입어 제국 간, 문명 간, 정치와 경제 모델 간의 충돌이 종식된다고 주장한 대로 달러, 자유무역, 나이키, 맥도날드 등 미국 소비재가 득의양양하게 국제사회를 지배했다. 이념전쟁의 종식으로, 흔히 좌파로 일컬어지던 서구식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도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한걸음 씩 물러났다.

1990년대 후반,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정당들이 대거 유럽 국가들에서 집권세력으로 등장했으나, 이는 냉전 이후 10여 년간 경쟁과 효율, 긴축재정과 친기업적 규제 완화 등 우향우로 치달은 우파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안정책 없이 집권한 좌파세력은 우파 정책을 베끼면서도 ‘현실주의적 사회주의’(프랑스 조스팽 정부), ‘쇄신주의적 사회주의’(독일 슈뢰더 정부), ‘제3의 길’(영국 블레어 정부)이라는 화려한 레토릭을 구사했다. 이는 결국, 유권자들의 정치 환멸로 이어졌다. 

묘하게도 이 무렵, 대한민국에서도 좌파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민영화, 규제 완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취했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이 취한 친기업·반노동 정책에 머쓱했는지 ‘신자유주의적 좌파’라는 모호한 레토릭을 구사했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충실한 우파보다 더 민주적이며, 더 공화주의적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좌파의 변질은 최근 우리가 지구적으로 목도했듯, 유권자들의 정치혐오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좌도 우도 아닌 탈이데올로기적인 극우 포퓰리즘 정치세력의 대거 등장을 가져왔다. 

극우는 본연의 정치 이념과 철학에 충실하려는 전통적인 보수 우파와 확연히 다르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정치지형도를 만들고, 유권자들에게 불가능한 공약을 남발하고, 사실과 역사를 조작한다. 마치 선동술에 능한 히틀러의 매끄러운 혀, 괴벨스처럼. <르디플로> 연례 모임에 참석한 각국의 국제판 발행인들이 열거한 극우 정권들의 ‘사실 및 역사’ 조작 사례는 차고 넘친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친정부적인 부역 언론과 부역 지식인들을 병풍처럼 두르고서 말이다.

극우적 성향의 인도 모디 총리는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서 인도 이슬람교도의 과거와 간디 같은 특정 인물을 역사에서 지우려 든다. 에스토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에서는 소련의 모든 흔적을 지워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  유럽에서도 지난 역사의 주인공과 목격자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20세기 역사의 서사는 민주주의자와 전체주의자 간의 대결 구도로 축소되고, 공산주의자와 나치의 유사성과 공모를 가정하는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리크 제무르와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관한 공론에서 역사조작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필리프 페탱 장군(비시 프랑스의 수장)의 명예 회복이나 수정주의 논리(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유대인을 구할 수 있었다는 관점)로의 회귀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멜로니 정부는 4월 25일(해방 기념일이자 파시스트 정권에 맞선 봉기의 날) 기념행사를 열어, 이날을 자유를 기념하는 날로 탈바꿈시켰다. 폴란드에서도 역사 조작이 이뤄지고 있다. 폴란드 정부는 유럽 유대인 학살에 자국이 협력한 기록을 지우고 관련 연구를 금지한다.

역사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핵심이기도 하다. 크름반도는 과연 어느 나라 땅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은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특히 플로리다 주지사 론 드산티스는 학교의 교과서와 커리큘럼을 바꿔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등의 역사를 미국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다시 쓰려고 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세계에서 역사는 점점 더 현실적인 정치, 경제 문제로 떠올라 정부를 선출하고, 전쟁을 시작하고 또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역설적으로 역사의 이런 결정적인 역할 때문에 점점 더 역사를 제대로 알기 어려워진다. 학교에서는 역사과목 교육시간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미래의 의사결정자들에게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기업인이나 공과대학생, 고위 공무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위인전, 영웅담, 야사, 외사, 풍문 등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 빈약하고 얄팍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떠한가? 대통령은 극우성향의 한국자유총연맹 창립기념행사에 참석해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들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UN)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청하며,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 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고 발언해, 과거 정권의 정체성을 전면 부정하고, 친일 독재를 미화하고 제주 4.3 사건을 ‘좌파 세력이 대한민국 성립에 저항한 반란’으로 규정했던 대안 교과서 필진을 통일부 장관에 임명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국가보훈부가 일본군 출신 고(故)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 명시된 친일 행적 문구를 삭제하고,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 당연직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구성된 광복회의 회장을 배제해 유관 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집권세력은 최근의 무역수지 적자, 경제불황, 수재 피해의 원인을 인프라 기반을 닦지 않은 좌파정권의 포퓰리즘 정책 탓으로 돌리고, 청년들의 실업급여까지 좌파정권이 던져준 달콤한 ‘시럽’이라며 액수 축소를 획책하고 있다. 집권층의 역사적 사실 왜곡에 힘을 얻은 극우세력은 유튜브 등에 명명백백한 사실조차도 제멋대로 조작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을 북한군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심지어 1977년 이리 폭발사고, 1980년 사북 탄광노동자들의 시위 조차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며, 좌파세력의 ‘박멸’을 외치고 있다. 

급기야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사망 소식으로 사람들이 슬픔에 젖은 가운데, 집권 세력과 친정부 언론은 좌파 정권이 허용한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추락과 공교육 붕괴의 원인이라고 앞 다퉈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당, 지자체와 협의해 교권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자치 조례개정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친정부 언론은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제물로 바치듯, 평소 그의 교육철학을 공격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의 어디를 살펴봐도 교권을 추락시키고 공교육을 뒤흔들만한 문구는 없다. 1등만 기억하도록 서열화한 학교에서 학생들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여고괴담> 시리즈의 조연이 되지 않는 것은 그나마 이같은 제도적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여야 정치권, 교육계가 머리를 맞대어 최선책을 찾는 게 순서일 것이다. 무분별한 아동학대신고로부터 교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아동학대처벌법과 초·중등 교육법개정이 필요하고, 교사의 업무를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좌파의 정책부터 공격하고 보는 것은 고질적인 만성적 좌파 책임 전가로 보인다. 문제가 터지면 무조건 좌파 정권 탓을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은 지지세력을 결집할 수 있을지언정, 상식을 갖춘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치혐오만 유발하는 처사다. 

부디, 집권세력은 극단적인 극우의 유혹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 국가의 백년대계인 교육문제를 놓고 좌파 운운하며 비난하는 것도 듣기에 민망스럽다.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서민의 아픔에 공감하고 눈물을 닦아줄 진정한 좌파가 있기나 한가? 오래전에 사망 선고를 받았거나 실종된 마당에….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