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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선수와 역도 영화 <킹콩을 들다>
장미란 선수와 역도 영화 <킹콩을 들다>
  • 임정식 | 영화평론가
  • 승인 2023.07.3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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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장미란 선수가 지난 6월 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제2차관으로 발탁됐다. 장미란 선수는 현역시절 국내외 주요 대회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둔 역도의 간판스타였다. 대표적인 수상사례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 세계역도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런던올림픽은 9명이나 도핑 양성 판정을 받을 만큼 약물로 얼룩졌는데, 장미란 선수는 이 대회에서 ‘무공해 동메달’을 획득해 화제를 모았다. 재단 설립과 후배 지원, 박사학위 취득과 용인대 교수 재직도 장미란 선수의 프로필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운동선수 출신이 문체부 제2차관에 임명된 것은 이번이 최초는 아니다. 박근혜 정부 때 박종길 선수(사격), 문재인 정부 때 최윤희 선수(수영)가 제2차관에 발탁된 적이 있다. 문체부 제2차관에 발탁된 체육인은 모두 비인기 종목 선수 출신이다. 아마도 임명권자들은 비인기 종목 선수가 가진 ‘스토리’를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인기 종목 운동선수의 차관 발탁은 최근 스포츠영화의 제작 흐름과 비슷한 점이 있다. 2000년대 스포츠영화는 실화를 소재로 하고, 비인기 종목을 주로 다루며,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도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킹콩을 들다>(2009·감독 박건용)가 있다. <킹콩을 들다>는 전남 보성 지역 역도부 학생들이 2000년 제81회 부산 전국체전에서 총 15개의 금메달 중에서 14개를 차지하고, 출전선수 5명 가운데 4명이 3관왕에 오른 실화를 각색한 영화다. 지도자들 가운데 정인영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역도 남자 52kg급 금메달리스트인 전병관 선수를 키워내기도 했다. <킹콩을 들다>는 실화, 비인기 종목, 여자 주인공, 국가대표와 같은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특징이 응축된 작품이다. 

 

여성, 운명을 개척하고 ‘영웅’이 되다

<킹콩을 들다>는 두 개의 플롯으로 구성돼 있다. 국가대표였다가 부상으로 은퇴한 뒤 폐인처럼 살아가던 이지봉 코치의 이야기와 역도에 문외한이었던 시골 여중학생 박영자가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국가대표가 돼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박영자의 캐릭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영자는 고아이고, 돈이 없어서 사격부에서 쫓겨나고, 친구들이 먹다 남긴 급식, 우유 심지어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학교에 다니는 인물이다. 하지만 박영자는 이지봉 코치를 스스로 찾아가 힘자랑을 하며 역도부원이 되고, 마침내 태극마크를 단다. 박영자는 모험과 도전의 주체로서 엄혹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다.

<킹콩을 들다>의 서사를 박영자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①사격부에서 쫓겨나고 돌봐주던 마을 할머니도 사망한다. ②이지봉을 찾아가 역도부에 지원한다. ③숙식해결이 가능한 합숙소에서 생활한다. ④지역대회에 출전했다가 망신만 당한다. ⑤이웃 학교 체육 교사의 계략으로 합숙소가 폐쇄된다. ⑥훈련을 거듭해 지역대회에서 우승한다. ⑦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지봉과 헤어진다. ⑧이지봉이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⑨국가대표가 돼 올림픽에 출전한다. 이렇게, ‘고아 소녀’ 박영자는 역도를 통해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박영자는 2000년대 스포츠영화 여성 캐릭터의 특징이 집약돼 있는 인물이다. 국내 스포츠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역할과 성격은 2000년을 전후로 구분된다. 2000년대 이전 스포츠영화에서 여성 인물은 조연 혹은 단역으로서 수동적, 순종적인 캐릭터에 머물렀다. 이 시기의 여성 캐릭터는 남성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화해주고, 스포츠의 이분법적 성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역할만 담당했다. 이런 특징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영화 <꿈은 사라지고>(1959)부터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까지 지속해서 나타난다. 

반면 2000년대 스포츠영화에는 주체적, 진취적,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10편가량 되며,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행동하는 조력자’로서 남성 인물의 재탄생을 이끈다. 여성 인물이 운동선수로 등장하는 사례가 많아진 것도 새로운 현상이다. 이 경우, 여성 인물은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킹콩을 들다>를 포함한 2000년대 스포츠영화 여성 캐릭터의 특징은 1) 운동선수인 주인공 2) 국가대표 3) 10대 소녀 선수들의 꿈과 도전 4) 행동하는 조력자로 요약할 수 있다. 

<킹콩을 들다>에서 박영자는 모험과 도전의 주체가 돼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박영자의 친구들도 가난, 부상, 질병, 고아, 장애와 같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내면의 성장을 이뤄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한다. 스포츠영화에서 주인공이 고귀한 신분을 지닌 경우는 매우 드물다. 주인공과 관련된 경제적·신체적·정신적 조건이나 환경도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런 점에서 비인기 종목의 여성 주인공인 박영자는 안성맞춤인 인물이다. 우리 사회의 소시민인 일반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하기에 적절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박영자의 이런 특징은 영화의 메시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희망과 용기를 줬던 주인공, 영화가 현실이 될까?

스포츠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경기에서 패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킹콩을 들다>도 박영자의 금메달 획득 여부를 알려주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 심각한 허리 부상을 안고 출전한 박영자는 금메달 획득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박영자가 패배자인 것은 아니다. 영화의 심층 서사에서 박영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다. 현대의 영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의해서 진정한 영웅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영화의 이런 메시지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실화를 다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영화의 주인공은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내면의 성장과 정신적인 재탄생을 이룸으로써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더구나 여성 인물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벽과도 싸워야 한다. 예를 들어 <YMCA 야구단>(2002)의 민정림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유교적 이데올로기, <코리아>(2012)의 현정화는 남북분단과 독재정권이라는 엄혹한 시대 상황과 투쟁한다. <야구소녀>(2020)의 천재 야구소녀 주수인이 겪은 사건들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누구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향해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킹콩을 들다>의 박영자는 복합적인 캐릭터다. 모험과 도전의 주체라는 영웅적인 면모 이외에 이지봉 코치의 조력자 혹은 정신적인 스승이기도 하다. 이지봉은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를 지낸 인물이다. 하지만 부상으로 은퇴한 뒤 나이트클럽의 호객꾼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옛 감독의 소개로 보성여중 역도부 코치가 되지만, 선수 지도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한낮에 낚시하러 가고, 훈련시간에는 의자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잠을 잔다. 하지만 이지봉은 박영자의 뜨거운 열정으로 인해 마음을 바꾸고,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박영자는 이지봉을 ‘정신적 죽음’의 상태에서 구해낸 조력자이자 재생과 구원의 매개자인 셈이다. 

한국 스포츠에서 여성 선수들은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 맹활약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는 금메달 7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해 남성 선수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또 여자양궁은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9연패를 달성했다.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은 1984년 LA 올림픽부터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5개 대회에서 연속으로 은메달 3개,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박세리, 김연아 선수도 스포츠영웅으로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여성 선수들의 이런 활약이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여성 캐릭터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여성 캐릭터는 주체적, 진취적, 능동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킹콩을 들다>의 박영자처럼 그들은 무수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강인한 의지로 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하고, 그런 행적이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비인기 종목 출신의 장미란 선수는, 박영자처럼 다시 한번 대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영화가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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