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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자유를 탈취하는 ‘그들’만의 자유
공동체의 자유를 탈취하는 ‘그들’만의 자유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3.09.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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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의 자유와 다른 윤 대통령의 자유
공동체 자유의 가치를 역설한 역사가 헤로도토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는 동방을 제패한 대국이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소아시아 해안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이 지역에 원군을 보냈다. 그리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의 속령 리디아의 수도를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대제국에 도전하는 아테네의 존재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로 진군하고 있을 때였다. 리디아의 한 부유한 귀족이 다리우스를 크게 환대했다. 부탁할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귀족은 호화로운 만찬을 차려놓고, 다리우스에게 겸손하게 간청했다.

“왕이시여, 군대에 제 다섯 아들이 있사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중 한 명이라도 저와 함께 남아 있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왕은 “네가 어찌 그런 요청을 하느냐? 너는 나의 노예이며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는 너의 아내까지 나에게 줄 의무가 있는 네가 감히?” 하고 호통을 쳤다. 다리우스는 그 귀족의 장남을 잡아, 그의 몸을 둘로 절단해서 군단이 지나가는 도로의 양편에 놓으라고 명령했다.

 

노예왕국 페르시아와 자유인의 공화국 아테네

이렇듯, 페르시아인들은 모두 왕의 노예였다. 노예로 불렸으며, 노예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당연히 주장하지도 않았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 이디스 해밀턴 지음, 이지은 옮김, 2009, 까치). 그는 자유가 부재한 페르시아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귀족이 수년 동안 왕의 호의를 누리다 관계가 틀어져 버렸다. 절대자 왕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페르시아 왕은 그 귀족을 초대해 고기를 대접했다. 귀족은 묵묵히 그 고기를 먹었다. 식사 후 뚜껑이 달린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뚜껑을 열어 본 귀족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구니에는 자기 외아들의 머리, 손, 발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왕은 재미있는 듯 물었다. “네가 먹고 있는 짐승의 종류를 이제 알겠느냐?” 그 귀족은 감정을 숨겨가며 대답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왕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저를 기쁘게 합니다.” 페르시아의 모든 신민은 이처럼 노예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기 위해 자기통제에 능숙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달랐다.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한 페르시아 장교가 몇 명의 그리스인더러 페르시아 왕에게 굴복하라고 종용했다. 그러자 그리스인들은 단호히 대꾸했다. “당신은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소. 당신은 한 번도 자유를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자유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르겠구려! 만약 당신이 자유를 맛보았더라면, 당신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창으로만 싸우도록 권하지 않을 것이요. 어쩌면 나무를 깎는 연장을 들고서라도 싸우라고 설득할 것이요.” 그리스인에게 자유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노예로 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으리라.

BC 492년, 세계를 제패한 노예의 왕국 페르시아와 자유인의 공화국 아테네의 대전쟁이 일어났다. 그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마찬가지였으니, 아테네에겐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1, 2차에 걸친 전쟁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이김으로써 자유인의 공화국을 지켜냈다. 이 전투의 결말은 ‘마라톤의 유래’로 잘 알려져 있다. 믿어지지 않는 전쟁, 믿어지지 않는 승리였다. 어떻게 소규모의 수비군이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맞설 수 있었을까? 헤로도토스는 그 비밀을 알아냈다. 페르시아가 공격하기 직전에 아테네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페르시아인과 싸울 때, 모든 것에 앞서 자유를 기억하라.”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것이다. 한 목격자는 그리스인들이 이렇게 외치며 적을 향해 힘차게 전진했다고 증언했다.

“자유를 위해서, 그리스의 아들들이여,
조국과 자녀와 아내를 위한 자유,
숭배를 위한, 우리 조상의 무덤을 위한 자유.” 

여기서 자유는 ‘자신의’ 자유가 아니었다. 이들에게 자유란 ‘조국과 아내, 자녀를 위한 자유’, 곧 ‘공동체의 자유’였다. 공동체의 자유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나와 내 가족의 자유도 지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출정 시 그리스 군인들 역시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그들은 로마인처럼 국가를 위해 몸을 불사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도 작고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 나아가 나와 내 가족의 자유를 지켜줄 공동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의 당시 복잡한 심리를 잘 드러내 줬다.

마라톤에서 아테네들인은 구보로 힘차게 전진했다. 자유를 수호하고자 딛는 자유인들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반면, 적의 지휘관은 채찍을 휘두르며 노예들을 전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자유인의 기백에 대항하는, 노예들의 수적 우세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페르시아전쟁을 무대로 삼아 당시 유명 작가였던 아이스킬로스는 극작품을 만들었다. 거기서 페르시아의 여왕이 묻는다. “누가 그리스인들 위에 전제군주로 군림하느냐?” 그러자 자부심에 넘치는 목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그리스인들은 누구의 노예도, 봉신(封臣)도 아닙니다.”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이겼다는 사실을 당시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인들은 힘들고 두려웠지만, 그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불사하며 힘차게 진군했던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자유를 지키고자 용감히 싸운 이유는 무엇보다 가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가족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더 큰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내 작은 자유는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지키고, 누리기 위해 필요한 비용과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동체의 자유를 탈취하는 윤석열의 자유

윤석열, 요즘 그는 입을 ‘자유’로 떡칠하고 있다. 마치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친 투사나 되는 듯 말이다. 자주 말하다 보면 스스로 믿게 된다던데, 이젠 자신이 대한민국 자유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고 착각하는 모양새다. 불가해한 고무줄 시력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이 말이다.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두 군대에 갔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렵고 힘들지만 내가 아니면 내 가족과 공동체의 자유를 지켜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의 시력’으로 자유수호의 책무를 면제 받은 자가 목청을 돋우며, ‘자유’라는 단어를 악을 쓰며 외치고 있다. 제대로 된 근대국가 중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인 나라도, 이런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도 정상이 아니다. 그의 자유는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며, 타인의 자유를 탈취할 자유이며 공동체의 의무를 회피할 자유다. 나아가 오로지 의무를 타인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영달을 위한 자유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유는 왕이 되어 우리를 노예로 만들 자유다. 검찰들의 자유왕국은 국민들이 노예가 되는 왕국이다. 우린 자유로운 공화국을 희구하는데도 말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도 거뜬할 정도로 건강한 자가 고무줄 시력으로 병역을 면제받았으며, 그 후 온갖 영화와 권력을 다 누렸다. 그러고서도 전사한 ‘군인’들의 영전에서 울컥했단다. 소시오패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가증스럽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신원식 의원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했다. 그런데, 신원식은 2020년 6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 다수는 ‘군대 안 간 이명박·박근혜보다 군에 다녀온 노무현·문재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말에 “그 점은 상당히 아쉽다”며 “군 미필자가 앞으로 국가지도자가 되는 것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고 답한 바 있다. 그런 신원식은 병역 면제자 대통령, 윤석열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이비 자유주의자를 보자니 천불이 나, 작년에 읽었던 책을 복기해 봤다. 윤 대통령이야 수치심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그를 찍은 분들은 꼭 읽어 보시면 좋겠다. ‘윤석열의 파렴치한 자유’는 오히려 ‘그리스인의 고매한 자유’를 배반하고 있으며 ‘공동체를 적에게 노예로 헌납할 자유’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라도!

 

 

글·한성안
경제학자, 문화평론가. 영산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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