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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괴물이라는 존재의 평균치(平均値)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 (2023년 11월29일 개봉)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괴물이라는 존재의 평균치(平均値)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 (2023년 11월29일 개봉)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2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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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아닌 '다른 말'

무엇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신이 직접 쓴 각본이 아닌,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을 가지고 영화를 촬영했으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故 사카모토 류이치의 선율이 작품에 새로운 힘을 실어주었으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아이들에게 대본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디렉션이 이번 영화에서 완전히 바뀌었으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2023년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이 주는 의미는 또 무엇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걸까.

 

출처_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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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괴물>도 아이들의 마음을 그리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미루어보아 아이들의 성장 서사라고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곤란하다. 영화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오컬트 장르에서 종종 등장시키는 아이들의 악마성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물론 실제로 영화 초반, 5학년 무기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 이하 ‘미나토’)는 미지의 느낌에 따라 알 수 없이 움직이는 감응(感應) 행동을 난데없이 폭발시키기는 한다. 하지만 미나토의 엄마, 무기노 사오리(안도 사쿠라, 이하 ‘사오리’)는 아들의 이런 이상 기운을 감지한 직후, 그것이 담임 선생님, 호리 미치토시(나가야마 에이타, 이하 ‘호리’)와 관련이 있음을 알고 학교로 찾아간 후 일련의 또 다른 사건들과 마주한다.

 

엄마 사오리, 출처_다음
엄마 '사오리', 출처_다음

찾아간 학교에서 미나토의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사태를 정치적 수사(修辭)만으로 수습하려는 교장 선생(타나카 유코, 이하 ‘교장 선생’)의 무책임‘해 보이는’ 행동과, 담임 선생 호리의 뻔뻔‘해 보이는’ 태도에 절망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미나토의 엄마와 미나토 그리고 미나토의 친구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하나타, 이하 ‘요리’)가 엮여 있는 오해의 상황 역시 ‘~해 보이는’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서 ‘~해 보이는’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 말 안에는 우리의 오해와 진실 그리고 진심, 아니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안쓰럽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빌딩에 불이 난 사건을 기준점으로 삼아, 한 명 한 명의 시선에 따라 그 이야기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려 한다.

 

담임 선생, '호리': 출처_다음
담임 선생 '호리', 출처_다음

그 와중에 <괴물>의 숨겨진 층위에서는 미나토와 요리의 불안을 다룬다. 미나토의 불안은 “남한테 말할 수 없어서”,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말로 나타나고 요리의 불안은 “돼지의 뇌를 가져서”,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숨길 수밖에 없었던 침묵으로 나타난다. 미나토의 불안은 존재의 불안이지만 요리의 불안은 정체성의 불안으로 보이며 이 불안은 서로 교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 마음의 불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관계는 대부분 요리에게 전염된 듯 미나토에게 일방적으로 나타나는데, 미나토가 엄마에게 문득 던지는 질문들은 거의 요리가 던진 질문들이기 때문에 더 그래 보이기도 한다.

 

미나토와 호리, 헤드밴드 게임 출처_다음
호리(왼쪽)와 미나토(오른쪽), 헤드밴드 게임 출처_다음

그 사이에, 영화는 ‘누가 괴물인가?’를 마치 헤드밴드 게임(상대방 이마에 붙어있는 그림을 설명만으로 유추하여 맞히는 게임)의 제목처럼 사용한다.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정답을 알아내기 위해 이 게임 속 질문들은 추격전을 펼치듯, 정답이 무엇인지 (어쩌면 괴물이 누구인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영화에서는 미나토와 요리가 이 놀이를 즐기지만, 사실 그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벌어진다. 그렇게 그 게임에서 알아내야 할 정답은 미나토를 향하다가 담임 선생으로, 교장 선생으로, 요리로 차차 옮겨간다.

 

미나토와 호리, 출처_다음
호리와 미나토, 출처_다음

여기서 미나토는 (관객이 보기에) 그가 내뱉는 거짓말들로 인하여 유력한 정답(괴물일지도 모르는 정답)이 되어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나토의 거짓말은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결정적으로 그런 거짓말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은 이지메를 당하던 요리의 상황과 맞물린 담임 선생과의 엇나간 대화와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엄마 사오리의 물음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착한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에서도, 속 깊은 요리와의 대화에서도, 다정한 엄마의 진심 어린 질문에서도 왜 거짓말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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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짓말의 의미와 거짓말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앞서 언급한, ‘헤드밴드 게임’의 규칙을 빗대어 찾아볼 수 있다. 자기 이마에 그림을 붙여 놓긴 했지만 정작 자기는 볼 수 없어서 오로지 상대방이 던지는 힌트를 통해서만 그림의 내용을 맞힐 수 있는 이 게임은 직접 정답(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거기에 이르도록 ‘다른 말’을 해주어야 한다.

이때 다른 말은 정답이라는 진실을 의도적으로 빗겨 가야 한다는 점에서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진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나토의 거짓말은 그런 ‘다른 말’과 닮아있다. 실제로 미나토와 요리가 착한 담임 선생이 곧 알아차릴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부러 ‘거꾸로 써 놓은 글씨’ 역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서의 다른 말은 정답을 맞힐 때까지 멈춰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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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미나토의 거짓말은 어떤 진실, 아니면 어떤 정답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건네보려는 이른바 끊이면 안되는 대화의 시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담임 선생님에 관하여 거짓말한 것과 요리와의 관계를 숨겨려 한 것, 엄마의 질문에 거짓말한 것은 어쩌면 정답을 알려주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말’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정답을 빗겨 가기만 하고 거기에 한 부모 가정에 대한 편견까지 겹치면서 엄마는 물론 담임 선생과 요리와의 관계는 엉망이 되기 시작한다.

 

호리의 아빠, 출처_다음
요리의 아빠, 출처_다음

그렇다면 역시나 한 부모 가정의 문제(미나토와 엄마 사오리)와 폭력적인 아버지의 존재(요리와 아빠) 문제로 회귀하고 만 것인가. 그렇게 해석할 때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사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와해 되어 가는 상황을 이야기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단정 지으면 그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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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영화 <괴물>에서는 전작과는 조금 다른, 미세하지만 깊이 있는 차이를 감지해 낼 수 있다. 영화 초반 갑자기 “인간의 마음이 없다”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것은 그 전조다. 실제로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는 무책임해 보이는 교장 선생과 호리 선생을 향해 이 말을 던진다.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의 대사를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밝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대사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여기에 대해 나는 이런 해석을 해보고 싶다. 다소 결이 맞지 않아 보이는 이 대사는 그간 가족이라는 의미 안에 복잡하게 잠복해 있던 질문,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일지 모른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과 인간은 별개의 문제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이렇게 결연하게 질문을 엄마 사오리의 입을 통해 던질수록 아들 미나토의 불안은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증폭되는 불안의 정도만큼 정답으로서 인간의 마음이라는 의미가 (미나토 스스로도 설명이 어려울만큼), 그 난해함이 그만큼 컸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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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나토의 ‘다른 말’이 한층 더 깊이 이해된다. 미나토는 자신이 정답을 맞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말을 던지고 있는데, 사실 그 정답은 ‘인간의 마음’ 너머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른바 '오해하는 마음'에 가 닿으려 한다는 것. 그건 정답을 보고 있는 미나토 역시 알지 못하는 정답이다. 그러니 미나토는 그 정답을 꼭 맞혀주길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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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그 정답을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 정답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요리’이고 이를 검증한 사람은 ‘교장 선생’이다. 요리가 이해하는 우주의 “빅 크런치”(big crunch)는 그 정답에 이르는 결정적인 힌트이고, “실제로 어땠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 교장 선생의 말은 정답을 검증하는 조언이다. 모든 것이 붕괴하여 전부 다시 시작되는 빅 크런치는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일'(미사토가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로 이어지고, 실제로 어땠는지는 상관없다는 교장 선생의 말은 괴물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현재를 비관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말은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교장 선생, 출처_다음
교장 선생, 출처_다음

일단 모든 것이 붕괴하는 우주의 빅 크런치는 태풍을 동반한 폭우와 그로 인해 벌어진 산사태로 축소되어 나타난다. 그 와중에 산사태 방지 수로를 통과한 그 행동으로써 미나토와 요리는 새로 태어난 존재가 된다. 미나토와 요리가 밝은 세상을 맞이하면서 내달리는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새로 태어났음을 환희에 찬 채로 보여주는 맑은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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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영화는 새로 태어난 이후의 존재를 막연하게 '새로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게 한다. 심지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인간의 마음, 다시 말해 과하게 부풀리거나 지나치게 이상화(理想化) 되어버리고 마는 희망이나 행복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까지 한다. 교장 선생은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말은 본래의 행복과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처럼 들린다. 행복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이상의 희망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과한 희망과 행복의 이상화는 희망을 소독하고 행복을 평균화하려는 교장 선생의 그 말로써 최종적으로 정화된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것처럼 행동했던 교장 선생은 (그 외 모든 등장인물 들 역시) 그 말로써 자기가 있어야 할 다른 위치를 제대로 찾아간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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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을 말할 때마다 의례 가용하는 희망과 행복의 관습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정답은, 그렇게, ‘괴물’이 된다. 영화 <괴물>은 오해와 진실, 진심,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다르게 말하고 있는 존재들’을, 소위 새로 태어난 존재라는 ‘괴물’로 분류하여 자리 잡게 해 준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괴물은 거꾸로 읽어내야만 하는 글자로써, 동시에 외마디 비명 같은 큰 한숨으로 내뱉어야만 하는 브라스 악기의 소리로써 평범한 인간의 문자와 음성을 거부한다. 그런데 마침 거꾸로 읽어내야만 하는 글자와 한숨으로 내뱉어야 하는 악기 소리는 과함과 이상화를 전부 평균화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석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괴물'은 '괴물'에게 들러붙어 있는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벗어나게 한다고 말이다. '괴물'도, 괴물이라는 의미도 과하게 부풀리거나 지나치게 이상화 되어버리고 마는 시도에 늘 희생되어 오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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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들의 그 (거꾸로 읽어야 하는) 글자와 그 (한숨으로 부는) 소리는 오해하고 있는 '모든'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진심 (여기서는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는 정답)의 마음을 '어떤' 근사치(近似値) 아니면 평균값으로라도 알려주려고 시도하는 지독한 노력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 괴물의 글자와 괴물의 소리로써, 왜곡된 진실을 (그 진심을, 그 정답을) 평균값으로라도 '반드시' 알려야 하고 알아맞혀야 하는 '성공 불가능한 놀이'. 그 놀이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그러면 일단 이 영화를 이렇게 한 줄로 정리할 수는 있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인간의 마음 속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른 말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이는데 성공한 영화라고. 여기서 나는 이어 붙이는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정확한 정답으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답은 늘 평균치로만 존재할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누구라도 괴물로 보일 순 있지만, 누구도 괴물이 아님을 말하려 한다는 식으로 그 평균치의 의미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이 영화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다른 말'을 왜 최선을 다해 들어주어야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깨닫게 해줄 뿐이니까.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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