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처럼 대충 아무런 맥락에서 널리 또 편의적으로 활용되는 용어도 드물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쓰기 위해 꼭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아렌트가 생각한 개념은 염두에 두는 게 좋다. 그는 행위주체인 개인과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는 사회체제 사이에서 ‘사회’의 우위를 강조했다. 고도로 억압적이고 강력한 체제하에서 구성원은 체제를 스스로 또는 자발적으로 내재화함으로써, 악을 행한다는 자각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악이라는 게 진부하고 시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오히려 악인의 평범성을 말하는 듯하다. 악은 언제나 평범하지 않다. 아무리 사소한 악도 악이다. 물론 인간은 일상적으로 사소한 악을 저지르긴 한다. 평범한 인간이 그렇다. 다만 평범한 인간이라면 사소한 악을 저지르곤 어떤 식으로든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거악은 어떨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거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극도로 사악한 사람이기 마련이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극도로 사악한 범죄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악행을 저지르는 상황에 아렌트가 주목했다. 이 상황은 정상적이 아닐 것이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기제가 사회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렌트가 하려는 이야기이다.
평범한 인간이 저지른 악
<스텔라>는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다. 따지고 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필자가 직접 체험한 시기와는 다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나치로서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와 영화 <스텔라>의 시간적 배경이 겹친다.
영화의 주인공 ‘스텔라’(폴라 비어)는 1922년 독일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 시기에 나치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한 스텔라 골드쉬라크(Stella Goldschlag)를 모델로 했다. 나치로부터 ‘금발의 독’(Blonde Poison), 유대인으로부턴 ‘금발의 로렐라이’(Blonde Lorelei)라 불린 스텔라의 일생은 독일 현대사의 비극적 축도이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고 재즈 가수로 활동하며 미국 무대 진출을 꿈꾼 스텔라는 금발과 파란 눈의 미인으로,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특별히 ‘유대계’란 수식어 없이 그저 독일인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유대인 중 독일과 중부ㆍ동유럽에 거주한 그룹을 뜻하는 아슈케나짐에 속한다. 이 아슈케나짐이란 정체성은 사실 인종적이고 역사적인 근거가 희박한 것이어서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스텔라는 평범한 독일인의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텔라를 아리안적 외모라고 평한 대목을 눈여겨봐야 한다. 유대인은 나치의 왜곡이나 대중의 오해와 달리 인종적 정체성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시대를 만나 스텔라는 역사의 격랑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문제적 개인으로 처참한 흔적을 남겼다. 나치의 핍박이 시작되자 꿈 많고 발랄한 어린 재즈 가수가 군수공장의 여공으로 강제되고 장밋빛 미래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바뀐다. 순응적이지 않은 성격 탓에 그는 가짜 신분증으로 신분증 위조 브로커로 활동하며 가족의 곤궁한 삶을 해결한다. 나치의 눈을 피하며 아슬아슬하게 진행한 대담한 ‘불법’적 생계 활동은 밀고로 끝이 난다. 밀고한 사람은 그를 아는 유대인이었다. 체포와 탈출, 또 체포, 고문 등의 과정을 거치며 스텔라는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나치에 협력한다. 나치의 비밀요원 스텔라가 팔아넘긴 유대인이 적게는 600명, 많게는 3000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비극적 실존
당시 독일의 다른 대다수 비밀요원이나 많은 전범과 달리 종전 후 스텔라에겐 평범한 결말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아이히만은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됐지만, 무수히 많은 다른 ‘아이히만’은 전후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생업으로 돌아갔다. 일본에 비해 독일이 전쟁범죄에 더 전향적으로 책임지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전쟁 범죄가 단죄받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평범하고 선한 많은 독일인이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행한 죄악은 ‘악의 평범성’으로 뭉뚱그려져 역사에서 정죄를 모면했다.
스텔라는 전쟁범죄의 희생자이자 가해자이다. 그러나 이중의 존재라기보다는 희생자이자 피해자로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스텔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는 희생자이다. 유대인으로 나치를 위해 일하며 가족을 살리려고 몸부림쳤지만 그의 부모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종전 후 숨어 지내다가 1945년 체포돼 10년을 복역했다. 형기를 마친 후, 베를린에서 열린 2차 재판에서도 유죄를 선고받지만, 가중 처벌하지 않는다는 판결로 풀려났다. 나치의 하수인이 돼 동포를 팔아넘겼다는 죄의식을 평생 벗지 못한 그는 사건으로부터 50년가량이 지난 1994년에 72세의 나이로 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킬리안 리드호프 감독은 20년 전 신문에서 스텔라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쉴 새 없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 질문이 현대의 관객에게도 유효하다 느꼈고, 생존과 타락을 오간 양면적 캐릭터를 스크린으로 불러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주연 배우 비어의 소회도 비슷하다. 비어는 “재즈 가수를 꿈꾼 17살의 스텔라에게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그의 이기적이고 끔찍한 행위를 경멸하는 감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허구적인 목적으로 활용할 수 없으며 캐릭터의 양면성을 정의하기 위해선 진실에 매우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리드호프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는 제작진의 의도대로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시스템에서 생존을 위한 행위가 어떻게 자기 파괴와 영혼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이 영화를 평한 외신에선 ‘타락’이란 용어를 즐겨쓴다. 감독도 사용했다. 사실 타락이란 용어는 ‘악의 평범성’과 연결짓기에 더 적합하다. 스텔라의 삶은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시스템에서” 생존을 도모하며 처절하게 행한 행위가 생존으로 이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결국 자기 파괴와 영혼의 상실로 귀결하였음을 입증한다. 사악한 사회시스템에 귀의한 ‘악의 평범성’을 실현한 당시의 평범한 독일인들과 달리 사악한 사회시스템으로부터 철저하게 압착당한 스텔라에겐 타락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스텔라의 행동을 칭찬할 수는 없겠지만, 동료 시민들과 ‘평범한’ 조국애를 실천하였을 뿐인 가해자와 대조적으로, 가해할 때조차 피해자였던 철저하게 헐벗은 단독의 실존에 ‘타락’이란 말로 나는 돌을 던질 수 없다. 전적인 고통의 풍경에서 공감할 것은 그저 고통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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