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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돈도 '가오'도 없는 사회적 포르노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돈도 '가오'도 없는 사회적 포르노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4.09.0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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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테랑

 

계급갈등과 불공정, 불평등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나날이 심해지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비율이 주는 듯하다. 노동운동의 단일대오가 깨진 데다 노동운동에 거는 기대가 예전만 못하다. 점점 더 양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민노총이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면서 이제 민노총을 기득권 집단으로 보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저항이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는 까닭은 통치가 더 정교해졌기 때문일까. 정부가 아니라 지배계급으로 보면 그런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사회가 다원화하고 복잡다단해지면서 저항의 대상이 불명확해졌고, 대립전선이 계속 늘어나고 겹치면서, 명확하고 거대한 적이 보이지 않게 된 변화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2015년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베테랑>은 이러한 사회변화와 관련이 있다.      

 

명확한 거악과 사회적 포르노     

<베테랑>에서는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격렬하게 대치한다. 도식은 할리우드이지만 내용은 한국판이다. 정의롭고 마냥 직진 스타일인 형사 서도철(황정민)과, 무능하고 타락했지만 안하무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 사이의 대결을 코믹 액션으로 그렸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전통의 형사물을 택한 건 영리했다. 공권력은 이 단어에 ‘권력’이란 말이 들어간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체로 강자의 편이고 결코 약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공권력이 권력을 행사하는 본유의 속성으로 인해 드물게 다른 권력, 예컨대 금권 같은 곳과 충돌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권력 행위이지 정의의 추구가 아니다. 검찰과 경찰이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는 국민이나 시민은 거의 없고, 실제로도 그들은 정의에 관심이 없다. 사회안정을 목표로 만들어진 공권력이 본래 설립 목표를 잊고 권력 행위에 집중할 뿐이다. 부수적으로, 어쩌면 우연히 치안이 이루어진다. 특히 물리력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일수록 더 근육을 쓰고 싶어 안달하기 마련이다. 

영화 <베테랑>은 공권력의 이런 속성에 착안했다. 그러나 극화를 위해 가공을 세게 하다 보니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경찰의 활약상을 그리게 됐다. 서도철이 “죄 짓고 살지 마라”는 말을 달고 살며 “감당할 수 없는” 거악에 맞서 근육질 권력을 행사하는 건 물리력 중심 권력기관의 특성 중 하나이긴 하다. 결과가 같다고 하여도 여기서 본질은 정의가 아니라 근육 자랑이라는 게 기억되어야 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은 제작진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보러 온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 경찰 권력이 금권을 비롯한 더 큰 권력의 충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뭐라고 하기 힘든 게 거의 모든 관객 또한 ‘충견’과 비슷한 삶을 산다.

현실에서 응징할 수 없는 금권을 ‘근육’이나 자랑하는 일개 형사가, ‘근육’ 말고는 관객과 다를 게 없는 경찰이 혼내주는 게 그래서 통쾌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그러므로 가장 부패한 권력을, 관객과 매일반인 형사가 응징하는 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준다.

자유경제원에서 이 영화를 사회적 포르노라 부르며 비난했는데, 바로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이었다. 포르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욕망만을 골라 형상으로 구체화한다. 모두가 공유하는, 혹은 모두가 공유하게 된 욕망을 현실로 누릴 수 있는 소수의 능력이 자본주의에서 권력이다. 누구에게 가상인 것이 다른 누구에겐 현실이 된다. 현실을 가상화하고 유통하여 현실 대신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 사회적 포르노인 셈이다. 사회적 포르노를 만들어낸 것이 류승안 감독의 재능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이 영화는 SM의 성격까지 갖는다. 서도철이 조태오에게 행하는 응징과 가하는 폭력은 금지된 폭력이기에 영화적으로 성취된 일종의 사회적 사디즘이 된다. SM은 쌍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조히즘도 작동한다. 금지된 폭력의 비자발적 수용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을 법하다. 단지 재벌의 실상을 풍자했다는 사회성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것이 아니다. SM이 가미된 사회적 포르노가 되었기에 영화가 성공했다. 풍자와 포르노가 별개인 건 아니다. 두 특성이 겹쳐지고 증폭한다.      

 

응징의 주체     

코미디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등장인물에서 희극성이 엿보인다. 희화화가 더 강하게 들어간 쪽은 ‘서도철과 아이들’이다. 서도철 외에 20년 경력의 승부사 오팀장(오달수), 위장 전문 홍일점 미스봉(장윤주), 육체파 왕형사(오대환), 막내 윤형사(김시후) 등 서울청 광역수사대 강력반 구성원은 모두 나사가 하나씩 빠진 사람 같다. 막내는 얼굴과 안 어울리는 사투리를 쓴다. 마치 개그 배틀을 벌이는 사람들 같다. 

재벌3세를 때려잡는 면면이 황당해야, 그래야 말하자면 모종의 현실성 반성에서 멀어질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관객의 심리적 저지선을 돌파하려면, 응징하는 주체에게 현실성이 떨어지는 캐릭터를 부여하는 우회 전술이 필요하다. 지랄 같은 현실에 만화 같은 솔루션이 잠깐은 먹힌다. 영화가, 관객에게 전해진 일종의 마약인 셈이다.

직접적인 노자 대결을 피하고 중간에 공권력을 개입함으로써 또한 이념적인 거부감을 우회했다. 노조에 가입한 트럭 운전수 배철호(정웅인)가 스토리라인에서 점화 역할을 맡는데, 배철호는 외주노동자이다. <베테랑>이 개봉하고 보수언론에서 이 영화를 이념적으로 꽤 공격했다. 예컨대 동아일보에 게재된 “베테랑의 공식 ‘재벌은 악(惡), 민노총은 선(善)” 같은 칼럼은, 굳이 안 읽어도 제목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내가 보기엔 <베테랑>은 민노총도 우회했다. 대기업과 정규직 중심의 노동자단체 민노총이, 급증추세인 외주노동자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는, 재벌에게 얻어맞고 모욕을 당한 해고 노동자 배철호가 민노총이 아니라 형사 서도철에게 도움을 청하고, 실제로 형사 서도철이 자살로 위장된 투신 사건을 해결하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으로 스토리를 짰다. 재벌을 악으로 본 것은 맞지만 민노총을 선으로 보지는 않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영화 속의 선과 악에 과장이 들어있는 게 사실이다. 영화에서 그린 것과 같은 재벌이 현실에 똑같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오‘를 그렇게 중시하는 서도철 같은 형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 묘사한 선과 악을 모두 허위로 볼 수는 없다.

일단 악은 엄연한 실제이다. 추상으로서, 총체로서 재벌은 조태오와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은 재벌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도덕성으로 자제하는 개인적 자질이지 재벌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은 100% 허위이다. 서도철이 보인 것과 동일한 의지를 불태우는 경찰이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의지가 실현될 수는 없다. 개인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경찰력의 시스템이 지닌 본원적 한계 때문이다. 공권력은 금권을 넘어서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다. 서도철이 보인 돈 없는 ’가오‘는 만화적 상상력이다.     

 

마약 같은 영화     

영화의 최초 기획은 서도철 등 광역수사대 경찰이 자동차 절도 및 밀매조직을 소탕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차례 각본이 바뀌면서 지금의 영화가 됐다. 최초 기획안을 압축하여 영화 초반에 넣고, 그 과정에 서도철과 트럭 운전수 배철호를 만나게 했다.

극중 조태오의 캐릭터는 타락한 재벌을 종합선물세트로 구성한 것으로 관객은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차피 재벌 2ㆍ3세의 생활은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비밀의 생활은 앞서 언급하였듯 가능성의 영역과 가끔 터져 나오는 불미스러운 뉴스를 통해 구성된다. 사회적 존재로서 그것이 재벌의 실체이다. 재벌가의 구성원에게 돈은 엄청난 특권이지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타락의 함정이기도 하다. 대중은 함정에 추락한 재벌만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재벌에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의 실체는 없다.

여담으로, 유아인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재벌 연기가 여러모로 너무 현실적이었는데, <베테랑2>에서 볼 수 없게 돼 안타깝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글 안치용, 사진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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