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구매하기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단절의 시대, 진정한 연결을 묻는 <세기말의 사랑>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단절의 시대, 진정한 연결을 묻는 <세기말의 사랑>
  • 송영애(영화평론가)
  • 승인 2024.11.25 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끔 우리는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지레짐작과 선입관으로 영화를 미리 평가하곤 한다. 임선애 감독의 <세기말의 사랑>(2024)도 그랬다.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자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떠올렸고, 반항적이고 독특한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예상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예상을 비껴가며 관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전형적인 캐릭터와 거리가 멀고, 이야기도 극단으로 치닫기보다는 이해와 배려로 마무리된다. 이들의 여정을 지켜보는 동안, 지레짐작으로 영화를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지기도 한다. 천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로 가까워지고 함께하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 스며들게 된다.

반전에서 반전으로

<세기말의 사랑>은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의 예상을 비껴간다. 제목과 포스터가 암시하는 자극적이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첫 시퀀스에서부터 칙칙하고 답답한 현실감으로 전환되며 관객의 선입견을 허문다. 영화의 색감은 처음부터 흑백으로 시작된다.

20세기 말,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는 영미(이유영)는 외모 때문에 ‘세기말’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희생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락이 끊긴 사촌 오빠 대신 아픈 큰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물론, 호감을 품고 있는 직원 도영(노재원)이 횡령한 회사 돈을 그조차 알지 못하게 메꾸기 위해 부업까지 뛰고 있다.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이 주변 사람들의 짐을 떠안고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때로 안쓰럽고, 심지어 바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단조로워 보이는 현실의 이야기를 예기치 못한 전개로 뒤집는다. 영화 초반, 영미와 도영 모두 횡령 사건으로 감옥에 가게 되는데, 호감 가는 성격과 행동으로 영미의 마음을 얻었던 도영은 유부남이었다. 형사가 수사를 통해 밝힌 횡령 이유는 아내의 명품 쇼핑으로 쌓인 카드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 중반부쯤, 카드빚에 얽힌 또 다른 사연이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잘못이나 기만으로만 보였던 사건에 새로운 관점을 더하며, 관객에게 그들의 선택 뒤에 숨겨진 복잡한 상황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전개 속에서도 인물들을 선악의 구도로 단순히 규정하지 않는다. 각 인물이 처한 현실과 그들의 선택이 얽히고설키며, 관객은 인간관계의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연결과 연대

21세기 초, 출소한 영미를 마중 나온 사람이 도영의 아내 유진(임선우)이라는 점은 또 하나의 놀라운 전환점이다. 흑백으로 표현되던 영화는 이 장면에서 원색적인 컬러로 전환되며, 새로운 국면을 암시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예상 밖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흔히 떠올릴 법한 한 남자를 둘러싼 갈등이나 싸움이라는 뻔한 클리셰를 완전히 벗어난다. 대신, 의외의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상처를 이해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영화는 이를 통해 관계와 연결의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연대와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극중 유진과 영미가 언급하는 맨드라미 꽃말인 ‘치정’과 ‘시들지 않는 사랑’처럼, 영화는 유머와 진지함, 희망과 불안을 교차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퉁명스러운 듯 따뜻하고, 불쾌할 줄 알았으나 유쾌한, 묘한 매력을 지닌 영화다. 영미가 마주하는 세상의 복잡한 감정선 속에서 우리는 피식 웃다가도 진지한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는 과연 잘 연결되어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세기말을 지나 24년이 흘렀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여전히 어렵고, 오히려 더 단절되어 가는 듯하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미디어와 SNS는 때로 역기능을 드러내며, 소통을 방해하는 장벽이 되었다. 세상은 더 촘촘히 연결되었지만, 진정한 소통과 이해는 여전히 쉽지 않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이 던지는 질문, “우린 잘 연결되어 있을까?”는 시대를 초월해 언제나 유효하다.

사람 일은 모른다. 오해했던 누군가가 뜻밖의 동지가 될 수도 있고, 관계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우리가 잃어버린 관계와 소통의 본질을 비추며,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게 만든다. 진정한 연결을 갈망하게 하는 영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교육 관련 연구를 지속해 왔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