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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키 17>의 '크리퍼'는 왜 <괴물>의 괴수를 닮았는가?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키 17>의 '크리퍼'는 왜 <괴물>의 괴수를 닮았는가?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5.03.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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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노벨문학상 작품을 한글로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봉준호 감독은 그보다 한발 앞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 4관왕을 석권했지만, 한국 관객은 그의 신작을 보기 위해 “1인치 자막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미키 17>이 제시하는 거대 담론이 한국 사회와 유리된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은 아니다. 계급과 연대, 환경 보호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천착하는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가장 ‘봉준호다운’ 것을 들고 왔다. 그가 한국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을 떠올려본다면, <미키 17>의 코드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언뜻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미키 17>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기억을 전혀 간질이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을 단번에 떠올리게 만드는 곳곳의 장면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배치된 연결고리에 가깝다. ‘대만 카스텔라’가 ‘마카롱’ 가게로 바뀌었을 뿐, 영화를 가득 메운 냉소는 누가 봐도 봉준호의 것이다. 하지만 기시감의 정체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국한 지어서는 안 된다. 영화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타 SF 장르와 현실 세계, 그리고 감독 본인이 몇 번이고 존경을 표했던 김기영의 생명 정치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없이 다뤄진 인간 복제 기술은 차치하더라도, <미키 17>이 선보인 SF적 상상력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미디어를 장악한 권력자가 대중을 우롱하는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세계관은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가여운 것들>(2023)에 이어 우스꽝스러운 사내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마크 러팔로의 연기만이 돋보인다. 실존 인물을 그대로 빼다 박은 캐릭터는 거장의 이름에 걸맞은 신선함을 안겨주었을까? 고리타분한 우생학이 득세하는 와중에 우주 개척을 선도하는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은 금방이라도 트위터에 나치를 찬양하는 글을 게시할 것만 같다. 하지만 21세기에 계엄령이 선포된 2025년에 특정인을 연상하는 가벼운 풍자는 이렇다 할 파괴력을 갖지 못한다. 다가올 미래상을 선취해야 하는 SF가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현실에 미치지 못하며 발생한 참사다.

 

차라리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미키 17>을 보며 <옥자>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작품 모두 부정한 권력에 맞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를 다룬다. 그런데 어째서 여섯 방향으로 겹겹이 갈라지는 ‘크리퍼’의 구강 구조는 <괴물>의 괴생명체를 닮아있을까?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구해준 귀염둥이가 백주대로에 무고한 시민들을 습격했던 괴수의 외양을 닮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기묘한 우연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20년 전의 <괴물>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 무리가 힘을 합쳐 괴물을 해치우는 괴수 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괴물>은 이면에서 번뜩이는 불균질한 정치성을 통해 독보적인 사회 풍자물로 자리매김했다.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오프닝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제 어떠한 첨언조차 사족으로 느껴질 만큼 유명한 씬이지만, 장면이 전환된 후 카메라가 도달한 지점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커다랗고 시커먼 것이 물속에 있어.” 자살을 결심한 남자가 한강을 바라본다. 공식 설정에 따르면 돌연변이로 태어나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던 괴물은 자살자를 잡아먹고 처음으로 인육에 맛을 들였다. 상위 포식자에 불과했던 크리처가 실패한 하류 인생을 잡아먹고 식인 괴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괴물>의 괴수를 또 다른 소외계층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리한 관점일까? 작품 전반에 배어있는 정치성은 <옥자>와 <미키 17>을 거쳐 비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요구한다. 미군의 화학 살상제 ‘에이전트 옐로우’ 속에서 죽어가는 괴물과 죽은 딸을 업은 강두(송강호)의 처지는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책임한 미국인을 아버지로 둔 괴수는 자본의 논리가 떠민 인간을 삼키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완성했다. 비록 어린아이를 해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뿌연 안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악을 처단하는 카타르시스보다 차라리 일종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괴물>을 인간 대 비인간이 아닌 소외계층 내부의 혈투로 바라본다면, 박 사장의 집에서 서로를 죽이려 안간힘을 쓰던 <기생충>의 가엾은 두 가족을 떠올릴 수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언제나 개개인의 행동이 아닌, 폭주하는 사회 시스템을 파국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한다. 야만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살인의 추억>과 <플란다스의 개>는 물론이거니와 계급구조를 수평적으로 시각화한 <설국열차>는 말할 것도 없다. <옥자>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반대로 <괴물>의 두 소외계층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게 된 것도 모두 착취가 일상화된 사회 구조 때문이다.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시스템의 존재를 망각한 <기생충>의 하층민을 거쳐, <미키 17>은 다시 열렬한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관객을 이끈다.

 

“믿음을 보이라며”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는 혐오를 부추긴다. 혐오는 생명을 담보로 유지되는 체제에서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아 발생하는 비효율을 손쉽게 해결한다. 평생을 멸시 속에 살아간 미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다며 자책하는 그에게 친구가 건네는 위로의 말은 다정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건 너 때문이 아니야. 차량 결함 때문이었잖아.”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이 구조의 모순을 깨닫게 된 계기가 복제인간 사이에 벌어진 치정이라는 사실이다. ‘내 여자’를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수컷의 본능은 ‘멀티플’을 생산하는 시스템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고, 끝내 ‘섹스 체위’를 통해 일격을 가하며 공멸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섹슈얼리티가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하녀>(1960)와 <화녀>(1971)의 신화는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하지만 <미키 17>에 김기영 영화에서 보였던 어떤 영화적 균열의 지점은 찾을 수 없다. 미키의 기억이 다음 개체에 온전히 보존되는 것처럼, 봉준호의 필모그래피가 한데 응축되어 할리우드 자본으로 지나칠 정도로 매끄럽게 프린트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균열의 지점을 찾자면 “너도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토니 콜렛의 유령적인 목소리일 텐데, 종국에 겨우겨우 벌어진 이 작은 틈은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인간 본연의 힘’에 의해 손쉽게 봉합된다. “죽음이 두렵구나. 인간이라는 뜻이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연대를 꿈꾸던 영화가 돌연 ‘인간 본연의 힘’으로 회귀하는 선택은 미묘하게 찝찝함을 남긴다. <설국열차>의 기차를 파괴하던 대담함은 어디로 갔는가? 계급을 한번 거꾸로 뒤집었으니, 해피엔딩으로 남을 셈인가? ‘슬픔의 삼각형’은 아직 그대로인데.

 

사진 출처 :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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