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5월 7일, 바티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17일 만에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달 앞선 3월 5일, 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영화 <콘클라베>가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덕분에 거의 동시에 영화 안팎의 두 콘클라베를 경험했다. 두 경우 모두 초반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5월 8일 TV뉴스를 통해 흰 연기를 올리는 굴뚝을 보며, 어쩌면 실제도 영화처럼 진행됐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니니 상상의 영역이 많겠지만, 나름의 비교를 해보고 싶다. 팩트 체크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애초에 비교는 어렵다. 현실에서 콘클라베를 목격하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적 상상이 더 자유로웠을 수 있다. 그 부분을 살펴보고 싶다.
닫힌 공간, 열린 질문
2025년 5월 8일, 콘클라베를 통해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가 선출되었다. 하얀 연기가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장면과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이 환호하는 장면이 중계되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에 선 새 교황과 환하게 웃는 추기경들의 모습도 곧바로 전해졌다. 언제나 그랬듯 탁 트인 밝은 공간과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가득한 이미지였다.
반면 영화 《콘클라베》는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시스티나 성당과 숙소인 산타 마르타의 집, 이동하는 차량 내부라는 제한된 공간만 등장한다. 등장인물도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들과 이를 보조하는 수녀들뿐이다. 침묵 속에서 반복되는 투표와 식사 장면, 중정과 복도, 계단 등에서 조심스럽게 나누는 대화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익숙한 지붕 위 검은 연기도 영화에서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또한, 강렬한 붉은색이 어둠 속을 가득 채운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라서 긴장감이 더 커진다. 영화는 큰 사건 없이,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과 시선, 숨소리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관객 역시 폐쇄된 공간에 함께 머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의외로 크고 본질적이다. “누가 신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 조용히 반복된다. 관객 역시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처럼 고민에 빠지게 된다.
1인칭 서사의 힘
영화는 로렌스 추기경의 시선을 따라간다. 1인칭 시점의 서사 전개다 보니, 보다 내밀하고 주관적인 감각이 전달된다. 그는 교황 선출 과정에서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하며 자격 검증을 조용히 진행하고, 그 내용을 공개할지 말지 고민하는 인물이다. 중심인물이 계속해서 의심하고 흔들리다 보니, 관객 역시 외부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다. 미디어를 통해 바깥에서 3인칭 시점으로 지켜보던 콘클라베와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이러한 시점의 선택은 단순한 구성상의 전략이 아니다. 권위의 중심에 있는 인물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제도 자체의 불안정함이 드러난다. 관객은 그 불안의 결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바로 그 모호하고 침묵에 가까운 서사가, 오히려 더 강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그래서 로렌스가 남기는 말들은 유독 깊게 다가온다.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의심’은 단지 개인의 태도를 넘어서, 제도와 신앙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제안한다. 관객은 이 내면화된 시선을 통해 교황이라는 직무, 가톨릭의 권위와 신념 구조까지 다시 보게 된다.
하나의 진실 대신 다양한 시선
영화는 바티칸이나 가톨릭 교회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물론 뉴스로 접해 본 성 추문이나 비리 사건들이 언급되고, 일부 추기경의 과거가 조심스럽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중심은 제도보다는 인간에 있다.

콘클라베가 진행될수록, 그 안에서 드러나는 건 특정 종교의 이면이라기보다, 다양한 성향과 이해관계를 지닌 인간들이 부딪히는 현실이다. 누군가는 주저하고, 누군가는 확신하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설 줄 안다. 그들이 나누는 갈등과 화해, 의심과 설득의 순간들은 오히려 익숙하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에 던져지는 반전은 ‘다양한 시선의 필요성’이라는 주제를 더욱 강하게 환기시킨다. 다양한 언어와 입장에 이어 관객 앞에 놓이는 질문은 이렇다. “이마저도 신의 뜻일까?” 이 물음은 확신에 기초한 하나의 진실보다, 불완전한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성숙한 신앙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가톨릭 내 여성의 역할, 다양한 국적과 언어를 지닌 추기경들의 구성,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상징적 반전까지 “신의 뜻은 단 하나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그 틈에서 스스로 질문을 꺼내보기를 기다린다.
지극히 인간적인 콘클라베
영화 <콘클라베>에서 목격하는 추기경들은 이상적이지 않다. 그들은 고뇌하고, 주저하고, 때로는 욕망 앞에서 흔들린다. 영화는 그 인간적인 모습들을 특별히 미화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신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결국 인간이며,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화 밖의 콘클라베가 떠오른다. 발코니 위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추기경들의 사진은 ‘퇴근짤’이라는 별명과 함께 유쾌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에서 본 긴장한 얼굴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물론 그 웃음이 단지 해방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콘클라베>는 그 내면의 과정을, 침묵과 시선, 그리고 질문으로 담아낸다.
두 콘클라베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모두 허상 같기도 하다. 어쩐지 조금은 혼란스럽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이나 에피소드가 다를 뿐, 많은 이들이 고민했을 거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걸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그들의 선택이 우연이든 신의 뜻이든, 세상에 빛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갈등과 긴장의 상황에도, 리더나 대표자를 찾는 현명한 해법이 찾아지길 바란다.
특히 영화가 마지막에 던지는 질문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 “모두 함께할 수 있겠는가?” 닫힌 공간 안을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그 안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의 질문들이 겹쳐 보인다. 그렇기에 <콘클라베>는 종교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교육 관련 연구를 지속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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