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전문 평론가들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를 통해 월요 시네마를 진행하고 있다. 첫 월요시네마는 지난 3월 25일 심영섭 피프레시 한국지부 회장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 >로 문을 열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되어 올해 심영섭 평론가가 2년 임기의 13대 회장에 취임했다.

사회자 : 안녕하십니까? 피프레시 코리아 회장 심영섭입니다. 오늘 발표해주실 회원님은 수백 편의 영화, 다큐, 드라마를 번역했고 영화이론과 통합예술치료를 공부하신 이화정 선생님이십니다. 이화정 선생님은 <더 칼럼니스트>에 수년간 영화 칼럼을 연재하셨고, 현재 <SBS 스브스 프리미엄>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비평을 연재하고 계시고요. 영화를 소개하는 라디오 방송을 진행 중이십니다.
발제자 : 안녕하세요. 이화정입니다. 오늘 발표할 인도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든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신인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선정이 됐을 만큼 이제 세계적인 지명도를 갖춘 감독이 됐습니다. 여성이나 계급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인도에서 여성감독이 이렇게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감독이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파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만큼 본인의 경험과 생각을 골고루 담아낸 작품입니다.
빛처럼 떠오른 신인감독 파얄 카파디아
먼저 파얄 카파디아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카파디아 감독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카파디아 감독의 어머니는 인도의 저명한 비디오 아티스트, 나리니 말라니이고 아버지는 정신분석가입니다. 카파디아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비디오 아트 편집과정을 지켜보면서 자랐고 자연스럽게 영상매체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고 해요. 그래서 영화감독의 길까지 선택하게 된 거죠. 이 영화의 제목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도 어머니의 예술작품으로부터 빌려온 것입니다. 뭄바이 출신으로 인도 영화 텔레비전 연구소에서 연출을 전공했습니다. 장편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지만 그 전에 “무지의 밤”이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2021년 칸영화제에서 최고의 다큐멘터리에 주어지는 황금눈상을 수상했습니다. 무지의 밤은 저는 보지 못했는데요. 이 영화는 감독이 수년간 시간이 날 때마다 거리의 모습,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모아놓은 아카이브와 다큐를 위해 찍은 영상들을 조합해서 만든 영화라고 합니다. 카파디아 감독은 그렇게 특별한 목적이 없이 사람들의 일상과 거리의 모습을 찍는 걸 즐긴다고 해요. 무지의 밤이 다큐지만 극영화 같은 영상도 들어가 있듯이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도 오프닝 시퀀스는 다큐멘터리처럼 시작됩니다. 카파디아 감독은 이렇게 다큐와 극영화가 섞여 사실과 상상이 교차하면서 발생하는 순간들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왜 인도는 이 영화를 오스카 후보작으로 추천하지 않았을까
첫 작품인 다큐멘터리가 호평을 받으면서 극영화의 투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극영화는 저예산 영화이면서 여러 국가로부터 투자를 받았는데요. 정작 인도 내에서는 이 영화를 인도영화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있었습니다. 인도영화연맹의 회장은 이 영화는 인도영화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있고 유럽영화를 흉내낸 영화에 가깝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오스카상 후보작으로 출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영화는 발리우드 영화로 알려진 서사와 촬영방식과는 다릅니다. 그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카파디아 감독은 인도영화연맹의 편협성을 지적했어요. 인도영화연맹은 13명의 남성으로 구성돼있고, 인도에서 여성문제가 많은데도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문제를 주제로 한 영화는 거의 상영될 기회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도 사회 내에서 여성의 문제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자의식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문제에 대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남녀간의 로맨스를 주제로 대중성과 오락성 위주로 제작되는 발리우드 영화에서는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으니까요. 카파디아 감독은 격한 감정이나, 극적인 전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삶에 반영해서 조용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도시 뭄바이의 의미
이 영화에서는 뭄바이라는 대도시가 마치 하나의 캐릭터이며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 그 무게감이 큽니다. 파얄 감독은 대도시를 묘사하기 위해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와 샹탈 애커만 감독의 <뉴스 프롬 홈> 이라는 다큐를 참조했다고 해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서는 뭄바이로 온 익명의 이주자들이 뭄바이에 대해 말합니다. 반면에 세 주인공들은 뭄바이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뭄바이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거리감을 두고 뭄바이에 대한 표현을 하는 사람들은 형체 없이 그냥 목소리만 나오죠. 감독은 이렇게 두 가지 방식, 즉 익명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주인공들의 표정을 통해서 뭄바이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뭄바이를 느끼게 만들죠. 뭄바이는 영화산업과 패션산업이 발달된 상업도시인데, 영화는 뭄바이의 랜드마크나, 화려한 거리를 보여주지 않아요. 카메라는 간호사들이 근무하는 병원과 아파트, 전철역 같은 한정된 곳을 비춥니다. 특히 전철을 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역에 빼곡히 몰려 있는 장면은 낯익은 풍경이죠. 굳이 뭄바이가 아니라도 대도시의 출퇴근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서울을 생각할 수도 뉴욕을 생각할 수도 있죠. 대도시를 향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 대도시를 향하게 되죠. 그리고 도시의 피곤한 삶에 지쳐가지만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기대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마음속에서 어떤 상상을 만들어냅니다. 삶을 버티어나가기 위해서 갖게 되는 생존력이라고나 할까요. 감독은 인터뷰에서 갈망, 혹은 동경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갈망이 있기 때문에 할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빛과도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둠과 빛을 대비시키는 방식도 참 흥미로운데요. 바로 이런 아이디어와 연결이 돼있습니다. 고향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돈을 벌기 위해 뭄바이로 온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절박한 사연을 안고 있어요. 왜 뭄바이로 오게 됐는지 각자의 사연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나옵니다. 결혼하지도 않고 임신을 하게 돼 온 사람도 있고, 가정불화 때문에 집에서 나오게 됐다는 등 사연은 갖가지입니다. 공통점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대도시로 온 거죠. 각 가정에서 한명은 뭄바이로 올 정도라고 합니다. 뭄바이는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대규모의 슬럼가도 형성돼있습니다. 영화중에 그런 대사들이 나옵니다. ‘뭄바이는 꿈의 도시가 아니라, 착각의 도시다.’ ‘덧없음에 익숙해져야 한다.’ ‘오래 살았지만 이 도시에 속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뭄바이에서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라고 말해요.

뭄바이는 이주민이 애초에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키는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는 도시가 되어갑니다. 뭄바이 정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이 영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뭄바이 정신을 비꼬듯이 이야기합니다. 뭄바이에는 암묵의 규칙이 있다. 즉 뭄바이에서는 아무리 시궁창에서 살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뭄바이 정신이다. 뭄바이를 착각의 도시라고 표현하면서, 그런 착각, 환상을 가지지 않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죠. 대도시 속에 갇힌 채, 억눌린 자아를 상징하는 단어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제목에 나오는 ‘빛이라 상상하는 것’의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이 영화를 신비한 분위기로 만드는 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는 것과 현실의 격차를 의미하기도 하죠. 그렇게 ‘빛이라 상상하는 것’의 의미는 영화 속에서도 여러 번 그 느낌이 바뀝니다. 뭔가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느낌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데 그 점도 이 영화를 몽환적으로, 그리고 신비하게 만듭니다.
어둠 속에서 상상해야만 하는 빛의 이미지에 어울리게 대도시의 노동자로서 현실은 밝게 묘사되지 않아요. 두 주인공인 프라바와 아누의 표정도 밝지 않습니다. 프라바는 거의 무표정에 가깝고 아누는 뭔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각자가 느끼는 외로움이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되는데요. 아누는 근무시간에도 공허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청진기를 주변 사물에 갖다 대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가슴에 대는 장면에서도 아누의 영혼이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느낌, 그리고 본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열망처럼 느껴집니다.

시적인 하이브리드 영화
다큐와 픽션을 섞은 하이브리드 형식은 카얄 감독이 좋아하는 연출방식입니다. 포스터의 홍보문구에서도 보듯이 아름다운 시적인 영화라든가. 마술적 리얼리즘, 시적 리얼리즘, 에세이 영화라고 이 영화를 표현하는데요. 그 이유는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침묵, 표정, 음악을 통해 심리적인 움직임을 탐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심리가 설명적인 대사를 통해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상황파악을 위해서는 배우의 표정과 소소한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되는데요. 시적인 영화라는 표현과는 달리 이 영화의 시작은 다큐멘터리처럼 시작됩니다. 뭄바이라는 대도시를 묘사하기 위해 다큐 형식을 택했는데요. 이 오프닝 시퀀스는 감독이 뭄마이를 어떻게 묘사하고 싶었는지 보여줍니다. 야채시장과 꽃시장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갑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그것도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시장은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휴식 없는 피곤한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뭄바이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밤의 영화라고 표현한 평론가도 있듯이, 뭄바이를 배경으로 밤 장면들이 대부분이고 어둡게 촬영됐습니다. 간호사인 프라바와 아누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그리고 공동주택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도 조도가 낮게 촬영됐습니다. 전철을 타고 거리를 돌아보거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프라바의 표정에서는 특별한 감정을 읽기가 힘듭니다. 프라바역을 맡은 여배우, 카니 쿠스루티는 스크립트를 보고서 이 프라바라는 캐릭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이 들지 않는 캐릭터라고 표현할 정도로 프라바는 많이 억제되어 있고, 대사나 표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요. 다른 캐릭터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격정적인 감정 표현 대신 상황과 무관한 행동, 자신의 상황에 감정을 밀착시키지 않고 거리감을 두는 모습, 원치 않는 삶을 수용하는 듯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어떤 반란을 품고 있는 모습이 세밀하게 표현됩니다. 그렇게 직접적이지 않고 어떤 매개물에 감정을 반영하는 표현방식 때문에 이 영화가 산문이 아닌 시적인 느낌을 주게 만듭니다. 인도의 몬순시기 때문에 비가 쏟아지는 장면들이 나오는데요. 연애 중인 아누는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 속으로 네게 키스를 날릴게.”라고 말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고, 억압된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감성적인 대사를 날리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어둠 속에서 상상하는 빛과 어울리는 장면들이죠.

세 여성 캐릭터를 통해 보는 인도 여성의 정체성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여성들의 캐릭터, 그리고 여성들간의 관계입니다. 카얄 감독은 어린 시절에 4세대의 여성들과 함께 집에서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세대 간 소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성들간의 세대 차, 우정, 오해, 수용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고 해요. 자라면서 경험했던 여성들간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이 이 영화에도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주제였다고 해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감독은 ‘사랑하는 나의 자매와 할머니를 위해’라는 자막을 넣고 있는데요. 이 영화에 나오는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 이렇게 세 명의 여성 캐릭터를 연상시키죠. 영화에서는 이 세 캐릭터들이 서로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세 명은 각각 나이 차이가 있어요. 여기서 프라바와 아누는 자매관계처럼 나오고 파르바티는 어머니 세대를 연상시킵니다. 프라바와 아누는 성격과 생각이 매우 다릅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세대차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서로 의지하면서도 갈등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어요. 프라바는 현 시대의 인도여성을, 아누는 변하고 있는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영화에서 주 서사는 프라바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관심을 더 끄는 캐릭터는 아누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누는 여성의 마음속에서부터 일기 시작하는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영화에서는 프라바가 아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는 모습을 통해서 여성으로서 프라바의 정체성이 바뀌는 과정, 주체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파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여성의 시간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해요. 감독은 인도에서 여성들은 스스로 보수적인 도덕성의 굴레를 씌우고 거기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지적했는데요. 바로 프라바가 대표적인 여성입니다. 프라바는 남편 될 사람을 보지도 못한 채 집안의 결정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아누 역시 자신이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를 집안에 알리지 못한 채, 부모로부터 계속 선을 보라는 압박을 받고 있어요. 경제력을 앞세운 남편 후보감을 찍은 사진들이 우스꽝스럽게 나오는 장면들이 아누가 느끼는 결혼에 대한 생각과의 격차를 보여줍니다.
프라바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돌아오는 상상을 하면서 남편을 기다립니다. 결혼하자마자, 독일에 일하러 가서 일년째 연락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것은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법적인 부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프라바가 생각하는 법적인 관계는 도덕성과 이어지죠. 프라바가 한 밤중에 일어나서 의사가 건네준 시집을 꺼내 핸드폰의 빛으로 읽으며 미소 짓는 장면이 나옵니다. 프라바 역시 외로움을 느끼지만 자신의 외로움은 결코 법적인 가족 관계를 벗어나서 해소돼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비슷한 맥락의 장면이 영화 초기에도 나옵니다. 간호사인 프라바가 나이 든 여자 환자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인데요. 이 할머니 환자는 약을 먹지 않아서 프라바가 왜 그런지 묻는 장면입니다. 할머니는 약을 먹으면 악몽을 꾸게 된다고 말해요. 그런데 그 악몽은 바로 남편의 환상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죠. 실제로 남편에게 구속받는 의미로 삽입된 장면도 나옵니다. 아누가 병원을 방문한 한 여성과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여성이 남편의 정관수술에 대해 묻는 장면인데요. 정관수술을 하면 어떤 혜택을 주는지 물어봅니다. 이 장면에서도 아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따분하게 앉아 있던 아누가 적극적으로 응대합니다. 여자는 남편이 정관수술을 하면 정력이 떨어진다면서 거부한다고 말하죠. 그러자 아누는 실망한 얼굴을 하고 상대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피임약을 무료로 건네줍니다. 결혼과 임신에 여성의 결정권이 없는 현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을 아누의 표정을 통해 읽을 수 있죠.
이 영화에서 언급해야 할 중요한 장면이 있는데요. 포스터에도 사용된 장면입니다. 아누가 빨간 색 물체를 들고 있고 프라바가 뒤에서 함께 보고 있는 모습인데요. 포스터를 보면 이게 뭔지 잘 알 수가 없죠. 영화를 보면 그 물체가 밥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프라바의 아파트에 발신자에 대한 정보가 없는 소포가 배달됩니다. 처음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신형 빨간 색 밥솥을 누가 보냈을까 프라바와 아누 두 사람이 의아해하는데요. 수신자가 프라바로 되어 있지만 아누가 더 관심을 보입니다. 소포를 뜯고 밥솥을 살피는 것도 프라바가 아닌 아누죠. 여기서도 아누와 프라바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비교가 됩니다. 아누는 메이드 인 저머니라는 영어 글자를 발견합니다. 독일제 밥솥이라는 근거 하나로 독일에 간 프라바의 남편이 보냈다고 짐작을 하죠.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의 주제와 관련해서 감독의 가장 강력한 의도가 이 장면에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밥을 한다는 행위는 결혼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보통 생각되죠. 이 영화가 여성들에게 많은 공감을 일으켰다면, 인도라는 배경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다거나, 무슨 중요한 일로 집을 비울 때도 우리 밥은 어쩔 거냐라며 밥걱정만 하는 남편의 실화가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하고요. 곰국을 끓이면 남편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농담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죠. 그런데 이 밥솥 장면에서 프라바의 태도는 매우 모호합니다. 아누는 프라바의 남편이 보냈다는 사실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그저 밥솥이 최신형이라는 데만 관심을 보입니다. 최신형 부엌살림은 여성의 자본주의적 위치를 의미하기 하죠. 영화에서는 요리를 주로 프라바가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식사준비에 별 관심이 없는 아누가 그 밥솥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 밥솥이 고급스런 최신형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도 두 사람의 세대 차를 보여주고 있어요.

프라바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요. 그런 프라바가 한 밤중에 일어나서 우연히 밥솥을 발견하고 끌어안는 장면이 특이해보였습니다. 평상시 프라바의 모습과는 다르거든요. 프라바가 밥솥을 끌어안는 모습은 관능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프라바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장면이지만, 이 외로움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남편을 사랑한다거나 그리워서라기보다는 밥솥이 상징하는 가족 단위의 생활을 꿈꾸는 그녀의 욕망,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장의 부재로 인한 공허감을 스스로 끌어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남편의 부재는 자신의 정체성도 모호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아누 캐릭터는 프라바와 대비되는 신세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지만 아누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확신이 없어 보입니다. 프라바와 월세를 나눠서 내는데, 이번 달에는 월세를 내지 못하겠다고 프라바에게 양해를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더군다나 그런 일이 이번 한번뿐이 아닌 것으로 보이죠. 아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고양이를 만지면서 애정을 표시한다거나, 프라바를 갑자기 껴안는 장면에서 아누의 성향을 짐작할 수가 있죠. 아누는 자기중심적이고 철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 역시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남자친구와 만날 때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죠. 집안에서 허락받지 않는 교제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아누가 남자친구와 사귀는 것을 다른 간호사는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프라바에게 다른 간호사가 아누를 주의시키라고 지적합니다. 더군다나 교제의 상대가 이슬람교도라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힌두교가 주류인 인도 사회에 깔려 있는 이슬람 교도에 대한 혐오감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런 무언의 압박 속에서도 아누는 교제를 계속 합니다. 아누는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지만 결혼 자체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집안에서 이슬람교도와 결혼을 허락할 가능성이 없지만 허락한다고 해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누는 결혼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가족이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는 관습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프라바는 그런 아누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프라바는 아누에게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어”라고 말하죠. 프라바는 현재 결혼생활을 유지한다고도, 아니라고 하기도 힘든 자신의 모호한 상황을 운명으로 수용하는 모습으로 다시 보여주죠.

마지막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파르바티는 병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있고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아가는 여성입니다. 파르바티는 남편이 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프라바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남편한테 연락이 끊긴 지가 얼마나 됐느냐’ ‘연락이 없으면 먼저 해봐야지’ ‘해외에 나가면 기억을 잃거나, 정신을 잃는 법이야’라고 말하면서 부부 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죠. 파르바티는 자신이 살던 주거지를 빼앗길 위기를 맞게 되고, 파르바는 변호사를 소개하면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결국 현실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이 심리적으로 서로 연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대기업이 지으려고 하는 건물의 공사장에 와서 돌을 던지는 장면입니다. 평상시 프라바의 태도와는 달리 처음으로 행동으로 가장 적극적인 항의를 하는 모습이죠. 이 장면은 인도뿐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도 문제가 되는 대기업의 횡포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파르바티에게는 아들이 있지만 정작 가족에게서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영화에서 가족이란 법적인 관계는 삶에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해요. 세 여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프라바에게도 따스함을 주는 존재는 남편이 아니라, 프라바에게 호감을 표현하면서 시집을 건넨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였죠. 아누에게도 가족은 남과 다름이 없어요. 자신을 전혀 이해해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남자친구의 존재에 대해서도 숨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누는 집에서 자꾸 선을 보라고 종용하기 때문에 엄마에게서 오는 전화가 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남편도 없고 서류도 없어서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한 파르바티는 결국 오랫동안 살아왔던 뭄바이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프라바와 아누는 함께 동행을 합니다. 뭄바이에서는 파르바티와 아누의 관계가 묘사되지 않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버려진 지 오래라 불도 들어오지 않는 파르바티의 누추한 시골집에서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어떤 대사보다 함께 인도풍의 춤을 추는 이 모습이 더 강한 친밀함과 연대성을 보여줍니다.
대도시와 대비되는 바닷가 마을
파르바티가 고향으로 오는 장면부터 영화의 2부가 시작되는 것처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뭄바이에서는 어두운 배경이 대부분이었는데 갑자기 밝은 화면으로 바뀌죠. 그리고 세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과 심리상태도 달라집니다. 프라바티가 옷을 입은 채로 바닷가로 들어가거나 아누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 그리고 술을 함께 나눠 마시는 모습은 뭄바이에서 보였던 억압의 끈이 풀리는 느낌을 주죠. 그리고 아누는 자신을 따라온 남자친구와 숲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섹스장면을 카메라는 꽤 오랫동안 세심하게 훑고 지나갑니다. 아누는 남자친구와 나누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동안 사회와 자신 스스로가 얽어 매였던 도덕성의 구속을 벗어던집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도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동굴의 암벽에는 여러 부조물들이 보입니다. 갇혀 있는 여성들의 자아처럼 생각되는 장면이었어요. 아누를 쫓아온 남자친구 시아즈는 한 부조물을 보고 “아누, 너를 닮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굴 안에는 연인들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문구들이 많이 새겨져 있는데 아누는 한 문구를 찾아내고 시아즈에게 이건 네가 쓴 거지?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연인들이 동굴 안에 자신의 사랑을 표시한 걸로 보이는데요. 이런 동굴 속 장면 역시 신분간의 엄격한 차별이 있고, 혼사가 가족에 의해 정해지는 인도사회에서 채워지지 못하는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재와 부재, 긍정과 부정의 혼재
존재와 부재, 긍정과 부정라는 상대적인 개념이 계속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라는 존재감은 어디서 느낄 수 있는가라고 주인공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듯 했어요.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감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계속 충돌하는 느낌이죠. 하지만 결국엔 충돌이 아니라, 대비되면서 서로 수용하고 흡수하는 느낌이었어요. 어둠과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는 긍정적인 의미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빛의 개념도 긍정적으로만 표현되지는 않았습니다. 빛을 상상한다는 말 자체에 현실에서는 빛을 찾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고요. 그럼에도 관객은 제목을 들었을 때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빛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싶은 기대를 갖게 됩니다.
파르바티의 고향은 바닷가 마을입니다. 이 바다에서 프라바는 생각지도 못했던 중요한 사건과 만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하는데요. 이 영화에서 환상까지 연결시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넣은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파르바티의 고향에서 프라바는 생각지도 않게 물에 빠진 한 남자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남자의 등장은 프라바가 가지고 있었던 경직된 생각에 큰 변화를 주게 됩니다. 원래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떠나기로 했는데 낮에 아누와 남자친구가 숲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프라바는 거부감을 느끼고 당장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물에 빠진 남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익사 직전에 있는 남자를 소생시키면서 프라바는 자신을 향해 ‘저 여자가 남자를 살렸어’라고 말하는 타인들의 시선을 어색하면서도 새롭게 받아들입니다. 본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때부터 달라졌을 거라 생각해요. 갑자기 등장한 이 남자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습니다. 정체성이 부재한 미지의 남자죠. 이 남자는 매개체의 역할을 합니다. 남자는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렸고 그 빈 공간에 프라바 남편의 환상이 들어옵니다. 이 장면 역시 기억의 부재 속에 프라바가 원했던 환상이 끼어드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여기서 프라바는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져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표현합니다. 프라바가 자신의 삶에서 주체적으로 변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영화는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식으로 마무리 짓지 않습니다. 아누와 프라바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어떤 식으로 해결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공기는 이전보다 훨씬 따듯해졌음이 느껴지죠.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없다면, 빛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만들어내서 위안을 받듯이 어둠과 빛은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고 서로 수용하는 느낌을 줍니다. 동굴 안에서 아누와 아누의 남자친구 시아즈가 나누는 대사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아즈는 아누와 사귀면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앞날에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이죠. 너를 사귀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즈는 ‘그런데 두려움은 너를 보는 순간 사라진다.’라는 긍정적인 말로 끝을 맺어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결과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성을 의미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위안을 주고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현실과 환상을 혼재시키면서 가치 있는 선택에 대한 물음과 용기에 대한 묻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어둠 속에서 환상과도 같은 꿈을 갖는다는 것이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적극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에 그렇게 존재와 부재, 긍정과 부정을 교차시키면서 우리가 처한 일반적인 삶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처한 상황의 성격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는 그런 극과 극의 혼재,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갈등 속에서 어느 정도는 수용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빛이라는 상상 혹은 환상
주인공인 프라바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영화는 실제의 빛을 사용해 상상의 빛을 연상하게 돕습니다. 한 밤중에 프라바가 핸드폰의 빛을 통해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는 같은 병원의 의사가 준 시집을 읽는 모습,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모습 뒤로 영사실에서 새어나오는 빛, 그리고 아누와 남자 친구가 동굴에 들어갔을 때, 새어 들어오는 햇빛,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시골 카페에 매달린 작은 전구에서 나오는 불빛 등,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어둠 속에 빛나는 조명들이 등장합니다.
남편의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프리바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 그리고 자신의 열망을 진정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졌던 원래의 열망을 남편의 환상을 통해 말하게 한 다음, 비로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억눌러 왔던 진심을 토로합니다. 처음에 남편의 환상은 당신을 데려오고 싶어, 전과 같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들려주죠. 남편이 독일에 간 후에 프라바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현 상황에서 법적으로 가장 행복할 수 방법이니까요. 현 체제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쉽게 행복이라는 환상에 빠질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러나 프라바는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는 강렬한 대사를 환상의 남편에게 전달합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요. 프라바의 대사가 연락이 끊긴 남편을 상대로 이혼청구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얽매고 있는 결혼이라는 체제의 굴레, 도덕성이라는 굴레로부터 정신적으로는 벗어났음을 고백하는 대사입니다.
프라바는 모든 면에서 억제된 사람입니다. 아누가 남자친구와 혼전 섹스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고 기분이 상해서, 그날 밤 당장 뭄바이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규범이 내면화된 사람인데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아누의 남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고향에 대해 물어보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하죠. 그런 프라바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고 평온해보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기준이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강요되고 내면화되어서, 그 기준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해졌을 때, 인간은 행복하지 않죠.
저는 이 영화의 엔딩 씨퀀스가 현실과 거리감을 둔 채로 바라보면서 양가적인 모든 것들을 수용하지만, 그 안에서 변화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와도 연결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고요.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것이 힘들어요’라고 이야기하지만 빛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힘을 영화 속에서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고, 그런 점이 관객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에 이 영화가 꾸준하게 입소문이 나면서 생각보다 꽤 오래 영화관에 머물게 했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몰입과 감정이입을 영화 관람의 가장 큰 즐거움과 목적으로 생각하는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영화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지 않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관객에게는 마음속에 있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영화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 A]
사회자 : 발제 감사합니다. 영화를 아주 상세하게 잘 분석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일단 사회자가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시작을 하겠습니다. 빛은 잡히지 않지만 거기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이잖아요 그래서 뭄바이에서 이 빛이라는 게 굉장히 무지개처럼 사람들이 잡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 존재의 형이상학적인 꿈을 얘기한다는 생각을 했구요. 영화에서 말 대신 문자가 오고가고, 아누는 엄마의 전화도 일부러 받지 않고, 프라바는 독일에 있는 남편한테 전화를 하지만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고, 또 선로가 물에 잠겨 통신이 끊기고. 이런 식으로 뭄바이에서는 어떤 단절과 끊김 현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밤에 유령처럼 깨어나서 밥솥을 껴안고 잃어버린 것의 온도를 기억하려는, 유령처럼 깨어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프라바를 좋아하는 의사가 시를 지어서 줬잖아요? 거기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내 꿈은 내가 남겨둔 자꾸 흩어져 있는 일상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과 밥솥이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빛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단절에 관한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꿈 이런 것들을 그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과연 빛만을 조명할까? 여쭤보고 싶습니다.
발제자 : 단절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 대도시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 서로 별로 소통이 되지 않죠. 사람들이 빼곡하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외로움보다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크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바티가 서류로 실제 거주했다는 증명을 하지 못해서 쫓겨나게 될 때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내가 사라지면 아무도 모를 거야. 흔적 없이 사라진 데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프라바가 우리 병원 사람들은 다 알아요라고 이야기를 해요. 어. 그러니까 이제 그 서류로 인간관계는 서류로 증명이 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 자체가 증명이잖아요. 그런 게 또 긍정적으로 같이 겹쳐지면서 나오는 모습 같고 영화에서는 이렇게 부정과 긍정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있는 그런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참여자1 : 뭄바이라는 곳이 산업화되고 여러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어떤 그 한국의 과거를 보는 듯한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사랑에 굉장히 방해가 많잖아요. 독일로 남편은 독일로 가버리고 또 그렇고 종교가 다른 그 억압 때문에 사랑이 자유롭지 못하고 뭐 그런 말하자면 우리의 뭐 과거에 여러 가지 장애가 많았던 그런 공간을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게 얼마나 정말 따뜻하고 또 가능성이 열려 있 거를 보여준 것 같아요. 특히 이 감독이 뭄바이에 화정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이 조도를 굉장히 낮게 해서 추가적인 조명을 하나도 안 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한 게 우리 삶은 이렇게 이 삶의 조건을 굉장히 어렵게 해 놓고 거기서 이제 만드는 빛이나 상상이 더 소중하다. 그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굉장히 어두우면서도 서정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런 점이 되게 소중하게 생각되고 꼭 그 잃어버린 우리의 과거의 기억 추억 이런 거를 우리가 잊지 말자 하는 그런 느낌으로 저는 이 영화를 봤어요.
참여자 2 : 저는 밥솥 얘기가 인상 깊었는데요. 그것까지 생각을 못 했는데. 제가 독일에서 공부한 지, 30년 가까이 돼 가는 것 같은데 독일에서 밥솥을 생산한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갔어요. 우리는 밥을 주식을 한 나라가 아닌데 제가 있을 때도 밥솥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여자 등장인물들이 세대라고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나이 차이가 너무 별로 안 나서요. 2, 30살 정도 차이가 나야 이게 세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정도 차이가 안 나서 현지 인도의 세 가지 유형의 여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파르바티는 제일 나이가 많은데 가장 독립적이고 또 그 노조 활동도 하고 또 그 집을 나가야 되는데도 건물주하고 싸우면서 나가지도 않죠. 가장 강력하고 독립성이 강한 여성으로 보였고 오히려 그 프라바 같은 경우가 수능 순응하고 적응하고 현실적인 그런 스타일로 보였거든요. 물론 이제 아누 같은 경우는 그냥 철없는 그런 신세대가 맞고 어느 나라든지 늦게 발전한 나라들은 저 압축적으로 발전하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발제자께서 얘기하셨지만 이 빛이라는 게 좀 애매하잖아요. 빛보다는 상상에 오히려 더 초점을 둬야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상상이 어떻게 실천으로 연결되는가가 하는 초점이고 마지막에는 전체적으로는 상상을 하느냐 안 하느냐 상상을 또 어떻게 하느냐 그 거기에서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풍부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빛을 상상 못 하는 경우가 있고 상상하는 경우가 있고 상상을 해도 어떻게 그 존재를 상상할 것인가 어떤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거죠. 그래서 상상이 오히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여자 3 : 행방이 묘연한 남편한테서 온 밥솥 그리고 같이 그 일하는 그 의사가 준 시들이 어떻게 보면 프라바를 얽매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밥솥에 밥을 하지 않았잖아요. 근데 밥을 갖다 주거나 실제로 어떤 뭐를 하는 게 아니라 밥솥만 줬어요. 그리고 시도 뭔가 꿈을 꾸게 하는 그런 게 아니라 대안이 없잖아요. 자기 떠나니까 뭐 붙들면 나 여기 있겠다 하는데 그것도 굉장히 수동적이죠. 저는 그 장면이 제일 인상 깊던데 그 낯선 남자를 구해서 그 남자에게서 남편의 어떤 환상을 보지 않습니까? 자기한테 빚이 주거나 아까 꿈 상상 그런 거를 해결해 줄 수 없는 그런 것까지 다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에 그 엔딩 시퀀스에서 칠같이 어둡잖아요. 어두운데, 전구가 좀 떠 있고 거기에서 음악이 들리고, 그리고 이제 그 판 돌리고, 저기 노래하는 뒤에 그 한 꼬마 소년 유쾌하게 춤추고 하는 그 소년 그러면서 이제 끝나는 게 정말 인도 영화답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그 엔딩 시퀀스에서 나온 음악을 끝까지 듣는다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끝까지 우리가 그 빛이라 상상하는 그런 것을 거기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관객의 모습도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빛을 우리가 보는 게 아니라, 어둠을,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여자 4 : 저도 밥솥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고 싶은데요. 프라바가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얼마나 억압을 당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그 밥솥이 도착한 시점이 의사로부터 시집을 받을 때잖아요. 의사가 떠난다고 했을 때 “이제 가도 될까요? 기차를 놓치겠어요”라고 말을 하면서 프라바가 자리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 프라바의 뒷모습이 약간 슬로우가 걸 이 전체 영화에서 유일하게 슬로우 모션으로 슬로우를 걷어서 찍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그게 프라바의 마음을 조금 담아놓은 장면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시집을 읽을 때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읽고 있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것조차도 다 이러한 그 결혼이라는 제도 이런 그 가운데 놓여 있는 억압당하는 어떤 그 한 여성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인도라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랑과 결혼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저는 굉장히 정치적이고 저항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했고 또 그 여성의 연대를 다루는 방식도 저는 굉장히 페미니즘 영화 성격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어떤 여성 결혼 인도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를 다루고 있고 그 제도 속에서의 여성의 해방과 연대라는 정치적이고 여성적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좀 해보았습니다.
참여자 5 : 저는 이 영화가 깐느에서 주목을 받았다라고 했을 때 왜 상상이라는 단어를 썼을까라고 궁금해졌거든요. 제가 화용론이라든가 담화론 이쪽에 관심이 있다 보니. 빛을 하고 상상하는 것이 아닌 빛이라고 상상이 아니라 빛이라고 생각하는 빛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빛이라고 상상하는 일까? 이런 것들이 조금 궁금해 했어요. 근데 오늘 그니까 발제를 들어보니까 이게 예전에 <추락의 해부>라는 영화처럼 말에 파묻혀 있는 어떤 실체 그다음에 이미지들을 통해서 서사가 드러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캐릭터의 말을 따라가게 되는 그런 영화가 있는 반면, 이 영화는 그 캐릭터의 마음을 따라가면서 상상을 하면서 봐야 되는 그런 영화구나라고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고 잠시 들었습니다.
사회자 : 이건 이제 화정 선생님이 한번 설명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는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는데 만약에 인도 사람이 이 영화를 들으면 수많은 인도의 지방 사투리들이 각 지방 언어로 독백을 하잖아요? 근데 그게 막 어떤 건 뱅골어고, 어떤 거 뭄바이의 언어고, 뭐 영어고 이런 식이라고 합니다. 언어와 이미지에 대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께서 잠깐 답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발제자 : 언어와 이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진 않았는데요. 이주자들이 여러 곳에서 오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다양성을 그렇게 묘사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대 도시라는 곳이 진짜. 감독은 그 심포니라는 그 단어를 쓰더라고요. 여러 가지 소리들이 모여서 하나의 심포니가 되듯이 대도시가 그런 곳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거든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바벨탑처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더 단절과 그런 소통의 장애도 있고 뭐 그런 게 있겠죠? 더 외로움을 더 느끼겠죠. 그 의사도자기가 힌디어를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 생활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고 말하잖아요. 그것도 그렇고 그런 단절감 같은 거 그런 걸 보여주죠. 가네샤 축제가 영화 중간에 나오거든요. 몬순 시즌이 끝날 무렵에 그런 축제 기간이 있다고 해요. 축제의 장이 바로 대도시에서 쌓인 여러 가지 억압과 단절과 소통을 좀 잠시나마 허물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사회자 : 아주 좋은 해석이신 것 같아요. 그 단어들이 달라서 저마다의 생각을 저마다의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그것들이 진짜 심포니처럼 이렇게 막 어우러지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소통이 좀 힘들어 보이고 그 의사도 그래서 힘들어 보이고 그래서 어떤 이미지들 밥솥이라든가 이런 빛이라든가 바다라든가 하는 그 언어를 넘어선 이미지들이 그토록 영화의 마지막에 해방감을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인도 관객들만 느낄 수 있는 뉘앙스일 것 같아요.
참여자 6 : 저는 이 영화 굉장히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방금 말씀하신 그 가네샤 축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이 가네샤 축제가 이 영화의 중간에 위치를 하고 그 전과 후가 많이 달라지거든요. 이 가네샤가 장애물을 제거하는 신을 의미한대요. 그래서 이 축제를 기점으로 이 세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장애가 하나씩 해결되는 구조로 후반부가 만들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파르바티는 집을 원했지만 가질 수 없어서 시골로 가고요. 그 다음에 아누는 사랑이 허용되지 않다가 시골에서 사랑이 허용되잖아요. 그리고 주인공. 프라바는 환상을 통해서 남편에게 거절할 자유를 얻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회자 : 네,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발제하신 선생님의 소감을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발제자 : 저는 라깡이 했던 ‘환상이 받쳐주지 않으면 현실은 유지될 수 없다’라는 말도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떠올랐어요. 상상이 가진 힘이 우리를 결국에는 이렇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는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아이가 춤추는 장면이 굉장히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나중에 이게 줌 아웃이 되면서 나중에 움직이는 건 오직 그 남자 아이 하나뿐이에요. 마치 그 정지된 장면처럼 보이는데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뭔가 변화의 조짐, 인도 사회에서 여성들이 변할 수 있다는 그 움직임을 상징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했고요. 감독은 인도 여성이 너무 도덕심에 사로잡혀 가지고 이혼을 해도 되는 상황인데도 이 이혼하는 걸 죄악시하면서 억지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굉장히 안타까웠고, 그런 문제점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담으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면을 보는 사람도 있고 저런 면을 보는 사람들도 있고,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자: 어둠 속에서 부서지는 숨결처럼 빛이 반짝이면 우리는 무언가 거기에 있다고 그 존재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지요. 우리 서로가 그런 빛이 되어주는 한, 아마도 어 어둠이 너무 짙고 길어도 우리는 그 터널을 빠져서 나와서 바다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처럼 여성 감독 파얄 카파디아가 만든 영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 모든 면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발리우드식 영화와 다른 영화 <우리가 빛을 상상하는 모든 것>.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과연 뭄바이에서도 서울에서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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