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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백조(Gray Swan), 욕망의 세레나데
회색 백조(Gray Swan), 욕망의 세레나데
  • 최양국 |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3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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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 백조 그리고 욕망

색깔이 바뀌면 욕망이 변한다. 백조가 떠나간 5월의 자리는 헛헛하다. 생장하는 초록과 철새로 그 시공간의 욕망을 채워 간다. 국내에는 약 500여 종의 철새가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겨울 철새 중 하나가 백조다. 예로부터 백조(Swan, 순우리말로 고니)는 외적으로 표출되는 색깔과 자태로 인해 우아함과 순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즐겨 듣는 음악 중에도 제목에 ‘백조’가 들어가는 곡들이 있다. 차이콥스키의 최초 발레곡 <백조의 호수>,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백조의 노래> 그리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백조의 호수>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변신의 대명사다. 1877년 러시아 초연 이후, 악마·남성·한국무용 등 다양한 유채색의 발레 작품으로 재해석돼 무대에 올랐다.

 

이제 우리는 무채색(하양·White, 검정·Black, 회색·Gray)의 백조를 쫓아 유채색의 욕망 여행을 떠난다.

인간은 욕망하므로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 근거인 욕망에는 비우기, 벗어나기, 채우기(정신적·물질적·사회적 유형) 그리고 진화하기가 있다. 

 

하얀 백조(White Swan)와 내적 성찰의 욕망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정식 명칭: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극장)에서 발레극 <백조의 호수(Swan Lake)>를 만난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지크프리트(Siegfried) 왕자는 20세 생일 전날 깊은 숲속 호숫가에서 우연히 악마 로트바르트(Rothbart)의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오데트(Odette) 공주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오데트에게 저주를 걸며 그녀를 탐낸 악마 로트바르트는 자신의 딸 오딜(Odile)을 보내 왕자를 유혹하게 하고, 계략에 걸린 왕자는 오딜을 오데트로 착각해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이에 상심한 오데트는 자살하려고 하나, 지크프리트가 나타나 만류하며 진정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 직후 로트바르트가 나타나 오딜과의 결혼을 강요하지만, 이를 거부한 지크프리트와 오데트가 함께 춤을 추고는 호수에 몸을 던진다. 이 순간 사랑의 힘으로 둘의 저주가 풀리고 로트바르트는 몰락한다. 두 사람은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오데트의 지크프리트에 대한 사랑은 하얀 백조로 상징화돼, 볼쇼이 극장 앞의 빨간 튤립과 함께한다. 발레극 <백조의 호수> 속 하얀 백조는 우리의 존재 근거인 ‘비우기’와 ‘정신적 채우기’의 욕망을 대변한다. 지크프리트와 오데트는 악마의 유혹에 대한 거부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향한 정신적 채우기를 지향하는 욕망의 주체다. 욕망의 대상인 비우기와 정신적 채우기는 긍정의 보완 역할을 하며, 빛을 모두 반사해 ‘색의 없음’을 나타내는 ‘하양(White)’과 어우러져 3/4박자의 왈츠를 춘다.

욕망의 주체인 우리들 삶은 실선, 파선, 쇄선 중 자신만의 선을 선택하며 좌표를 찍어가는 행위의 궤적과 같다. 비우기와 정신적 채우기를 위한 욕망의 궤적은 쇄선(점과 짧은 선분을 교대로 배열한 선)이 그려가는 원형을 좇는다. 쇄선은 점으로 머무는 들숨과 짧은 선분이 돼 이동하는 날숨으로 나타난다. 중간중간 여백의 공간과 또 다른 선분을 만들어 가기 위한 숨 고르기를 하며 쉬어간다. 내적 성찰을 하며 연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에 대한 적정한 연민의 여백을 가질 수 있을 때, 닫혀진 네모를 벗어나 대상을 향한 열린 마음의 원형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결과를 내지 못한 사건들과 차마 이루지 않은 욕망이 역참(驛站)에 머무르며 웃고 있다. 

 

검은 백조(Black Swan)의 외적 표출을 향한 욕망

차이콥스키의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변주한 영화<블랙 스완>을 관념 문화인 언어가 변용된 OTT(Over The Top)를 통해 접한다. 대런 애러노프스키(Darren Aronofsky) 감독이 제작한 <블랙 스완>(국내개봉, 2011)은 발레극 <백조의 호수>의 서사와는 다른, 주인공인 발레리나의 인간 본성에 초점을 둬 무겁고 비극적인 분위기로 변주한 심리 스릴러물이다. 

<블랙 스완>은 새롭게 무대에 올릴 <백조의 호수>를 1인 2역의 발레극(한 사람이 백조와 흑조의 역할을 표현)으로 변주한다. 공연 감독은 극 중 주인공이자 발레리나인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에게 백조와 흑조의 캐릭터를 모두 표현하도록 요구한다. 백조가 우아함을 표출하며 연민을 자아내야 하는 것이라면, 흑조는 적극적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관능적 욕망의 분출이 필요하다. 니나는 백조와 흑조라는 상반된 연기를 소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전직 발레리나인 어머니의 엄격한 규칙과 지나친 간섭에 따른 스트레스를 각성제 복용과 변모된 동성애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환시와 환청으로 연결되며 건강을 해친다. 결국 경쟁자인 동료 발레리나를 살해하는 환각상태를 경험한다. 니나는 자아를 비추던 거울을 깨서 자기 자신을 찌르고 완벽한 흑조로 변신한 후, 관중의 환호와 함께 오버랩되는 OTR(Over The Rainbow)을 안으며 역설적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니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 안에는 백조와 흑조가 공존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니나는 욕망의 달성을 위한 목적의 수단 전치(轉置)에 대해, 강한 본능적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타아(他我)에 대한 간접 살해를 통해 자아를 향한 직접 살해로 귀결된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이란 세상에 없다는 인간의 양면적 본성을 검은 백조(Black Swan)로 상징화해 나타낸다. 영화 <블랙 스완> 속 검은 백조는 우리의 존재 근거인 ‘벗어나기(정상의 비정상화; 금기, 타락 및 자아의 일탈 추구)’와 ‘물질적 채우기’의 욕망을 대변한다. 사악한 자아에 대한 냉소를 보여주는 니나는 벗어나기와 물질적 채우기를 지향하는 팜므파탈적 욕망의 주체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벗어나기와 물질적 채우기는 부정의 보완 역할을 하며, 빛을 모두 흡수해 ‘색의 없음’을 나타내는 ‘검정(Black)’과 어우러져 6/8박자의 그림자로 흔들린다.

 

회색 백조(Gray Swan)를 향한 욕망의 세레나데

욕망의 주체인 우리의 삶은, 삼원색 간 어울림에서 나오는 고유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화폭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에 대해 각자의 보색 조명과 각도로 수용하며, 씨줄로는 다양한 변화에 대응하고, 날줄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의 도형과 공간에 색을 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아 추종’에 불과한 정물화 그리기는 경계해야 한다. 화랑에 올리는 자아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 NFT)’이 돼야 하지 않을까? 사건과 결과, 그리고 이뤄낸 모방형 욕망으로만 가득 채워진, 역참(驛站)이 사라져 버린 길의 텃새가 된다는 것은 마뜩잖다.

이제 무채색의 여행은 그레이 스완(Gray Swan)이 사는 섬을 찾는다. 경제 용어로 ‘그레이 스완’은 시장에 이미 알려져 있거나 예측 가능한 악재지만 적당한 해결책이 없어 위험이 상존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측 가능하며 해결책이 있는 것과도,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서 갑자기 발생해 시장에 큰 충격을 주는 것과도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좌표를 결정하는 핵심 인자일 수 있다. 문화는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면서 인위적으로 생산하고 창조해내는 모든 현상을 나타내는 상부구조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그것의 인적·물적 기반인 경제라는 하부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나선형 성장의 길을 걷는다.

형태적으로 육지와 바다를 하부구조로 하는 섬은, 상부구조로 서 있다. 하부구조인 육지와 바다가 경제를 나타낸다면, 상부구조로서의 섬은 우리의 문화와 연관된다. 모든 빛을 반사해 색의 없음을 나타내는 백조가 ‘무소유’와 ‘생명’의 상징이라면, 모든 것을 흡수해 색의 없음을 나타내는 흑조는 ‘유소유’와 ‘죽음’의 상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무소유-생명~유소유~죽음-무소유. 데칼코마니(Decalcomanie). 살아간다는 것이 백조에서 흑조로 향하는 시간 발레극이라면, 우리들의 궁극적 지향점은 백조와 흑조 사이의 어느 지점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하양에서 출발해 검정에 도달하기 전, 그 어느 지점을 향한 시간여행은 우리들 욕망의 ‘진화하기’에 다름 아니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또 다른 진화의 모습들은 우리의 성장 함수의 결괏값으로서 함께한다.

상부구조인 섬이 하부구조인 육지와 바다로 연결돼 있듯, 우리들 욕망의 참값도 서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 섬은 ‘밈(Meme)’이라는 문화적 유전자와 집단의 소용돌이적 정서에 휩쓸리는 의식적·무의식적 연결고리로, 육지의 원초적 몸짓과 바다의 태곳적 손짓 위로 머리를 내민 우리들 자아의 현재진행형과 같다. 그러나 연결의 욕망을 나타내는 우리들의 ‘사회적 채우기’는 눈이 부시게 하얀 무채색의 향연에 갇혀 피상적 연결만을 자랑한다. 초연결 시대는 우리를 씨줄과 날줄로 옥죄어 오고, 속속들이 지배하며 배설하려 한다. SNS를 통한 연결이 지능화되고 몰아적 의존도가 높아만 가며 네모의 울타리는 더욱 좁고 견고해진다. 갖은 조명과 각도로 시의적절하게 비추는 온갖 탐욕적 음모론들은 대부분 회색 백조인 듯하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우리 유기체적 생태계가 무채색을 바탕으로 다양한 유채색의 꽃들을 피워내기 위해, ‘깨어 있음’과 ‘거듭남’이 어우러진 회색 백조의 발레극을 5월의 어느 날 밤 가족과 함께 보고 싶다. 우리나라 전통 세레나데인 <봉황곡>을 봉새 그리고 황새와 같이 듣고 싶다. 욕망이 변하면 일상이 바뀐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 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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