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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영화의 인물은 왜 ‘마침내’, ‘붕괴’하게 되는 것일까?
박찬욱 영화의 인물은 왜 ‘마침내’, ‘붕괴’하게 되는 것일까?
  • 김경욱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8.3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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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영화의 인물은 흔히 자살을 선택한다. 예를 들면,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이수혁은 자신의 입에 총구를 넣고 방아쇠를 당긴다. <올드 보이>(2003)의 이우진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다. <헤어질 결심>(2022)의 송서래는 바다의 모래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 그들은 왜 마침내 붕괴에 이르러 자살하게 되는 것일까?

 

<헤어질 결심> 포스터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수혁의 죽음

<공동경비구역 JSA>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남북한 병사들의 총격전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북한군인 정우진과 최만수가 사망하고, 또 다른 북한군인 오경필과 남한군인 이수혁, 남성식이 부상을 입는다. 스위스의 육군 소령 소피 장이 조사에 착수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점점 밝혀진다. 남한군인 이수혁, 남성식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북한군인 오경필, 정우진과 가까워져서 금기를 깨고 북측초소에서 어울리게 됐는데, 최만수 상위에게 들키게 되자 무마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소피 장이 진실을 말하면 남북한 병사들에게 불리하지 않게 수사보고서를 작성하겠다고 약속하자, 침묵하던 이수혁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진술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수혁은 “남성식의 총에 정우진이 죽었다”고 진술하는데, 오경필은 “이수혁의 총에 정우진이 죽었다”고 진술한다. 소피 장이 이 사실을 알려주자, 이수혁은 자신이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이수혁은 속죄하듯 무릎을 꿇고 자살한다.

만일 소피 장이 오경필의 진술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수혁은 진실을 무의식에 묻어버리고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수혁은 소피 장을 원망하듯 그녀가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진실과 거짓의 창구인 ‘입’을 총으로 쏜다.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의 죽음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한 편인 <올드 보이>는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오대수의 입이 문제가 된다. 고등학생 이우진은 누나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는데, 오대수가 그 장면을 목격한다. 오대수는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소문이 퍼지고, 이우진 남매는 곤경에 처하고, 이우진의 누나는 상상임신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한다. 이우진은 오대수가 누나를 죽게 만든 원흉이라고 보고 치밀하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이우진의 설계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결국 오대수는 자신의 잘못을 빌면서 문제의 원인인 자신의 혀를 자른다. 그렇게 복수가 완결됐는데, 이우진은 자살을 선택한다.

이전까지 이우진은 누나가 죽은 책임을 모두 오대수에게 돌렸다. 그런데 오대수가 완전히 끝장이 나고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자, 갑자기 누나가 죽었던 순간의 기억, 무의식에 깊이 묻어두고 싶었던 그 기억이 그를 강타한다. 누나가 강으로 뛰어내리려고 할 때, 이우진은 떨어지려는 누나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손에 매달린 누나는 “그동안 무서웠지?”라고 묻는다. 아마도 그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누나가 임신까지 한 것 같은 상황이 사실 매우 두려웠을 것이다. 

마침내, 누나는 강으로 떨어진다. 어쩔 수 없이 누나의 손을 놓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려움에 휩싸인 그가 누나의 손을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의식에서는 전자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의 손의 감각은 후자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누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한다. 누나의 손을 잡았던 오른손으로 그 기억이 각인된 머리에 총을 쏠 수밖에 없다.

누나는 “나 기억해 줘야 돼”라고 하며, 이우진이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찍는다. 그 순간에 멈춘 누나의 인생처럼, 이우진의 인생도 그 순간에 동결된다. 누나가 바란 대로 그는 한순간도 누나를 잊은 적이 없으며, 결코 자랄 수 없는 소년을 내면에 감금한 채 나이를 먹어간다. 우진이 죽어가는 좁은 엘리베이터의 공간은 과거의 기억 속에 갇힌 그의 상태를 상징한다. 따라서 영화 제목인 ‘올드 보이’는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올드 보이는 이우진이라고 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의 죽음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에서, 경찰서의 강력팀 소속 경감 해준은 산에서 추락사한 기도수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해준은 기도수의 젊은 아내, 중국인 서래를 용의자로 조사하다 그녀에게 매혹돼 수사의 혼선을 빚는다. 마침내, 서래가 기도수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해준은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치고, 자부심 있는 경찰의 품위를 잃고, 완전히 붕괴됐다”라고 한탄하면서, 그녀를 체포하는 대신 범죄의 증거가 담긴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말하고 떠나간다.

그로부터 13개월이 흐르고, 해준은 서래 곁에 있을 때 사라졌던 불면증과 안구건조증이 도져서 고생하고 있다. 해준을 잊지 못한 서래는 두 번째 남편 임호신과 함께 해준이 사는 이포로 온다. 임호신이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고 해준이 수사를 하게 되면서, 해준과 서래는 다시 만나게 된다. 해준은 이번에도 서래가 범인일 거라고 굳게 단정하는 반면, 서래는 다정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복원하고 싶어한다.

서래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와 엄마의 유골 가루를 뿌리러 호미산을 오르는데, 해준이 동행하게 된다. 해준의 사랑을 일깨우려고 서래는 “날 떠난 다음, 당신은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나를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은 다시 사는 것 같았죠?”라고 묻는데, 해준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해준은 서래의 엄마가 원했던 멋진 남자로서 유골 가루를 산에 뿌리고, 지난 402일 동안이라며 두 사람이 헤어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서래가 몸이 똑바른 사람이라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서래와 같이 경찰차를 탔을 때, 그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깊이 잠든다. 서래는 끊임없이 그의 사랑을 읽어내지만, 해준은 “나는 경찰이고 당신은 피의자”라며 선을 긋는다. 서래가 유골을 뿌리는 그에게 다가와 뒤에서 포옹할 때, 그는 그녀가 남편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산 아래로 미는 줄 알고 순간적으로 혼비백산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두 사람은 입을 맞춘다. 

서래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해준의 말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해준은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냐?”고 강하게 반문한다.『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서 레나타 살레클의 설명에 따르면, 히스테리증자는 타자의 욕망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반면에, 강박증자는 이 욕망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준이 서래에 대한 사랑을 부인하자, 그녀는 ‘헤어지지 않을 결심’을 한다. 그녀는 해준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할 유일한 방법으로 그의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선택을 한다. 히스테리증자는 언제나 “그가 나를 잃게 된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물음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서래는 바닷가의 모래 구덩이(일종의 무덤)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린다. 만조가 되기 시작하자, 서래는 손을 뻗어 들이치는 바닷물을 만진다. 그녀 손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는 그녀를 찾아 바닷가를 헤매는 해준의 롱 쇼트와 오버랩된다. 따라서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처럼 보이는 이 쇼트를 통해, 서래가 해준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우진이 ‘기억해달라’는 누나의 말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서래가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된다면, 그는 아파트 벽에 그녀의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그녀만 생각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해준은 서래가 사라진/죽은 장소에 도착한다. 서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될 때, 해준은 그녀 핸드폰에 저장된 음성 파일(파일명은 ‘붕괴’의 뜻을 풀이한 ‘무너지고 깨어짐’)을 찾아낸다. 거기서 그는 서래가 사랑한다는 의미로 해석한 자신의 말을 듣게 된다. 이때 카메라는 모래 속에 묻힌 서래가 쳐다보는 시점인 듯 앙각 쇼트로 해준을 담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해준은 자신이 서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다음이다. 이우진이 누나가 죽던 그 순간에 동결됐던 것처럼, 해준도 서래가 사라진 바닷가에 결박된 채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붕괴 상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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