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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4) - ‘4차원’ 그 소녀는 처용의 아내였다
안치용의 Numbers (4) - ‘4차원’ 그 소녀는 처용의 아내였다
  • 안치용 l ESG 연구소장
  • 승인 2023.03.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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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ᄉᆡᄫᆞᆯ ᄇᆞᆯ긔 ᄃᆞ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ᄅᆞ리 네히어라

둘흔 내 해엇고

둘흔 뉘 해언고

本ᄃᆡ 내 해다마ᄅ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삼국유사 제2권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 편에 수록된 8구체 향가 ‘처용가’다. 양주동 해석에 근거해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서라벌 밝은 달에

밤 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마는

앗아간 것을 어찌 하리오

 

‘처용가’는 처용이 부른 노래다. 처용은 용의 아들로 신라 헌강왕을 따라 수도 서라벌에 와서 벼슬을 했다. 어느 달 밝은 밤,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가니 침상에 사람 다리 네 개가 보였다. 두 개가 자기 아내의 것이고,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개는 누구의 것인가. 알다시피 나머지 두 개가 역신(疫神)에 속한 것으로 나온다. 아내가 낯선 이와 동침하는 모습을 다리 개수로 표현했다.

가끔 뉴스에 나오듯 이런 사태면 칼부림이 날 수 있다. 처용은 “앗아간 것을 어찌하리오”라고 말하고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춤을 췄다고 한다. 대인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역신이 처용의 관대함에 감복해 용서를 빌고는 앞으로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붙여둔다면 그 집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로 백성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쳤다는 게 이 향가에 부속해 전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처용은 오쟁이 진 남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가 된 것인가. 그가 속칭 ‘관종’이라면 이 사실로 한 번 더 춤을 췄을 법하다. 

처용가에는 여러 해석이 따라붙는다. 아내의 외도를 그렸다기보다는 역병에 관한 우의적(寓意的) 표현이라는 해석이 주종이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 이야기는, 없지는 않겠지만 처용처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반신과 상반신을 구분한 데에 주술적 의미가 작용한다는 해석을 제쳐놓으면 다리 개수로만 상황을 설명한 표현력이 에로틱하다고 해야 할지 그로테스크하다고 해야 할지 분간이 안 간다. 이 향가에 각각 다리의 모양이나 다리들이 엉킨 형태가 제시되지 않아서 아마 독자가 제각각 그 그림을 상상하게 되지 싶다. 

처용의 아내인 베일 속 여성이 철저하게 대상화한 인물로 그려진 것은 당시로는 어쩔 수 없었겠다. 이 이야기에서 처용의 아내는 상반신을 떼어낸 하반신 마네킹인 양 거의 물화한다. 얼굴이나 인격이 배제된 두 다리가 전부다. 역신의 성(性)은 명시적이지 않다. 문맥상 대충 남자로 보아 무방하지만, 처용이 노래하며 춤춘 것을 상실감의 승화 운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종의 긍정적 반응으로 간주한다면 역신이 여성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부장제하에서 남자는 아내(또는 사귀는 여성)에 성적 독점을 주장하고 독점이 침해됐을 때 큰 상처를 입는 게 일반적이다. 흔히 꼴사납게 폭력적 피드백이 이어진다. 이론상 경쟁자를 향해야 하지만 자신의 여자(처용가 문구로는 “내 것”)을 향할 때가 아마 더 많지 않을까. 

기억하는 인류학 자료에 따르면 그 독점을 파괴한 성이 여성일 때는 남성일 때보다 더 관대해진다고 한다. 부계 혈통 전달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다. 또 다른 이유로는 독점 파괴자인 다른 여성 또한 자신의 성적 관할 하에 들어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나 어떻다나. 그런 연유로 처용이 춤췄다고 가정하면 이 향가를 너무 저급한 에로물로 전락시키는 것인가. 문학적 상상력이라곤 전혀 없고 남성 호르몬만 충만한 어떤 ‘한남’은 이런 관점에서 처용과 역신이 맺은 우의적(友誼的) 관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맑게 상상할 것이다. 

 

 

‘2×2=4’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1828~1889)를 젊을 때 추앙했다. 체르니솁스키는 1860년대에 러시아 젊은 지식인 사이에서 지성의 아이콘이자 선각으로 존경받은 인물이지만 러시아인이 아니고는 대체로 그 이름이 낯설다. 러시아 혁명사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체르니솁스키가 세계인과 대면할 때는 대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통해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자 강력한 반론이다.

체르니솁스키 사상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오는 산식 ‘2×2=4’로 요약된다. 그는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인간이 이해하게 된다면 인간은 악에서 탈출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체르니솁스키는 자신의 이 이성적 이기주의 이론에 따라 인간을 교육하고 개화한다면, 인간에게 악해짐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2×2=4’라는 그가 내세운 산식은, 인간 행동은 이성적 이기주의가 제시하는 이익 공식에 따라 해명될 것이기에 모든 (인간의)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는 선언이다. ‘2×2=4’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인 이른바 ‘수정궁’으로 귀결한다. 수정궁이라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의 도래를, 그와 동시대 젊은 지식인들은 믿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체르니솁스키 ‘유토피아론’에 대한 반박이니,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도스토옙스키가 수정궁의 허황함을 지적하고 ‘2×2=4’는 죽은 공식이라고 일갈한 것은 당연한 문맥이다.

조지 오웰(1903~1950)의 『1984』에 비슷한 산식이 나온다. 『1984』에서는 ‘2×2’ 대신 ‘2+2’를 묻는다. 곱하기와 더하기라는 차이가 있지만 응당 해가 같아야 한다. 그럴까. 『1984』에서는 ‘2+2=5’로 제시된다. 소설에 그려진 전체주의는 ‘2+2’의 해가 5임을 믿게 강제한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결국 나중에 수용하지만 한동안 ‘2+2=5’를 거부한다. 전체주의를 거부하다가, 무엇에 의해서이든 마침내 적극적 자발성에 입각해 받아들이는 모습을 오웰은 그려낸다. ‘2+2=5’에 이견이 없는 세상이다.

『1984』에서 윈스턴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자 전체주의의 대리인인 오브라이언은 “오르가슴마저 없애 버리겠다”라고 말한다. 윈스턴의 연인 줄리아는 윈스턴에게 “당신은 허리 밑으로만 반역자”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을 유사 삼단논법으로 묶으면 다리 두 개씩을 합한 ‘2+2=4’에서 오르가슴이 발현한다는 뜻일 텐데, ‘2+2=4’가 앞서 언급한 ‘2×2=4’와는 차이를 보일까. 산식에 사용된 정수를 다리 개수라고 치자. 동일한 네 개 다리는, 개수를 잣대로 삼으면 두 산식 모두에서 오르가슴이 발견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 더하기로 ‘4’에 이르렀을 때와 곱하기로 ‘4’에 이르렀을 때를, 도달한 방법론으로 구별하면 두 산식에서 모두 오르가슴이 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브라이언이 오르가슴에 이르는 방법론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으니, 편의상 곱하기가 더하기보다 더 유효하지 않겠냐고 가정한다고 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브라이언이 소설에서 튀어나와 항의할 것도 아니고. 사실 그에겐 틀린 해를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맞는 해에 이르는 상이한 방법론은 중요하지 않다. 

체르니솁스키가 ‘2×2=4’를 수정궁이라고까지 했으니 같은 오르가슴이라도 ‘2×2’가 ‘2+2’보다 더 세 보인다. 문득 드는 시덥잖은 궁금증은, 처용이 본 ‘4’가 ‘2+2’였을까, ‘2×2’였을까. 상대가 역신이었으니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다고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코로나19에서 생생하게 체험했듯 곱하기를 삶의 방식으로 하는 역신에게 오르가슴 또한 같은 방식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2+2=5’에선 왜 오르가슴이 소멸할까. ‘2+2=5’가 섹스가 아닌 순수한 번식을 뜻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오브라이언이 추가한 ‘1’은 왜 우아한 오르가슴을 천박한 수정 행위로 타락시키는 것일까. 포유류의 번식과 문명화한 인간의 섹스 사이의 차이를 그 ‘1’이 만든다. 엄밀하게는 만든다기보다 상징한다고 해야겠다. ‘(2+2)+1’로 굳이 ‘1’을 확고하게 표기하는 상황은 인간을 그저 포유류로 보거나 인간(여성)에서 총체적 씨받이를 상정하거나 아무튼 사랑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유대와 감정이 부재한 사태일 터. 전체주의는 원래 마초이며 그것은 음경을 휘두르는 데 최적화한 수컷 침팬지 같은 존재다. 또한 번식에 혈안이 돼 있으면서 죽음으로 질주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시리스

 

<이집트 벽화에 등장한 오시리스>

고대 이집트인은 사후세계를 믿었다. 죽음을 끝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세계로 가는 관문이라 여겼다. 육신이 죽고 난 뒤 사람의 영혼은 지하세계로 내려가 온갖 시험으로 가득 찬 험로를 통과해야 한다. 여러 문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사자의 서’에 적힌 주문을 올바르게 암송해야 한다고 이집트인은 믿었다.

‘사자의 서’는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의 법정에 도달하기까지 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요긴하다. 오시리스가 생전 고인의 죄를 판결하고 그에 따라 천국행을 결정하는 법정에서도 사자의 서를 읊어야 한다. 법정에서는 특별한 저울을 사용해서 영혼의 죄를 판단하게 된다. 저울 한쪽에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을, 다른 한쪽에는 망자 영혼의 심장을 얹는데, 생전에 죄를 많이 지을수록 심장이 무거워진다. 저울이 대칭을 이루거나 깃털 쪽으로 기울면 천국행이고, 반대로 심장 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암무트라고 하는 짐승 같은 무시무시한 여신이 심장을 먹어 치운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구천을 영원히 떠돈다고 한다.

오시리스는 이 법정에서뿐 아니라 이집트 신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신이다. 오시리스는 신의 족보에서 창세로부터 4대에 해당하고 4남매의 맏이였다. 태초 세계에서 스스로 나타난 태양신 라는 침을 튀겨 공기의 신 슈와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 남매를 만들었다. 남매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는데 오빠 게브는 대지의 신, 여동생 누트는 하늘의 신이었다. 이 남매 또한 결혼해 4남매를 봤다. 넷은 첫째인 장남 오시리스, 둘째인 장녀 이시스, 셋째인 차남 세트, 막내딸인 네프티스다.

여기서도 남매간 근친결혼이 일어난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각각 부부가 된다. 그러나 두 부부, 사 남매는 막장드라마를 연출하게 된다. 형 오시리스를 시기한데다 누나 이시스를 사모한 세트가 결국 오시리스를 모살해 사체를 14토막으로 쪼개 이집트 전역에 뿌린다.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시체 조각을 회수해선 마법으로 남편을 되살려낸다. 부활한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나라인 두아트의 왕이 돼 앞서 살펴본 대로 망자의 법정을 관할한다. 

오시리스 시체 14토막 중 한 토막은 물고기가 먹어버려서 찾지 못했다. 오시리스의 생식기였다. 살 대신 진흙을 빚어 만든 생식기를 붙여서 부활한 오시리스는 역경을 딛고 이시스 사이에 호루스라는 자식을 낳는다. 유명한 이 가문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복잡다단하지만 여기서 끝내도록 하자. 두아트의 왕이자 죽음과 부활을 담당하는 신의 피살과 생식기 망실, 그리고 진흙 대체품으로 생식에 성공한 이야기는 앞서 논의한 ‘2+2=5’를 떠올리게 한다. 히브리성서에 신이 진흙으로 형태를 빚어 거기에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어서 가마에서 불을 때서 만드는 방식과 닮았다. 실제로 히브리어 ‘아담’에는 ‘흙’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4원소설

이시스가 시체 13토막을 모으고 진흙으로 만든 생식기를 붙여서 오시리스를 부활시킨 장면은 전체적으로나 국부적으로나 모종의 연금술을 떠오르게 한다. 신화이긴 하지만 살짝 시비를 걸자면 사라진 생식기를 대신해 굳이 흙으로 대체물을 만들어냈어야 했을까. 종족번식 때문에? 진흙을 뭉쳐 진짜 성기로 만들 수 있다면 신화에 종종 나오듯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얻는 방법 또한 가능했을 텐데, 아무튼 그곳 이집트에서 지중해 맞은편으로 건너가면 그리스다. 고대 그리스에도 신이 많다. 서구 신화의 원류인 그리스는 동시에 서구 철학의 원류다. 

세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 4원소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 제시됐다. 엠페도클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세상을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는 불, 물, 흙(땅), 공기다. 근대 이전까지는 4원소설이 힘을 발휘했다. 서구에 가장 오래 또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유의 틀은 그가 제시한 것이 통용된다.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이 네 원소를 적절한 비율로 혼합하면 최고 물질인 금이 된다고 믿었다. ‘4+1’을 꾀한 오래 살아남은 무지였다. 근대를 연 한 사람인 아이작 뉴턴(1643~1727)이 연금술을 연구했다고 하니 4원소설과 ‘4+1’은 꽤 오래 지속된 셈이다.

 

4차원과 4부대중

원소와 관련해서는 4원소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 났지만, 차원은 4차원이 맞다.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더한 4차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직관적으로, 시간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기에 4차원 시공간을 보통 3차원으로 이해한다. ‘4차원 소녀’ 같은 말이 그런 생각을 반영한다.

다수가 아는 공간과는 다른 공간에 걸쳐진 것 같은 그런 특이한 캐릭터를 표현할 때 4차원이란 수식어를 쓴다. 기실 모두가 4차원에 살고 있으니 누구나 ‘4차원’이 될 수 있다. 

불가에서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란 말을 쓴다. 사부대중은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말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4부류 중 하나다. 비구는 ‘걸식하는 자’라는 뜻으로, 출가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 승려이고 비구니는 여자로서 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사람이다. 우바새는 재가의 남자 신도, 우바이는 재가의 여자신도다.

불교 신자라면 4부대중 가운데 어딘가에 속할 것이고 인간은 언제나 4차원에 살았다. 4차원을 구성하는 시간이란 차원은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일깨우며 우리를 인간답게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죽음이다. 죽음에 관한 성찰은 4번째 차원에 관한 성찰로 지혜의 그루터기 같은 것이다. 

노화의 종말이 운위된다. 현재 과학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어쩌면 죽지 않는 세상이 열릴 수가 있겠다 싶다. 그때 인간 삶은 3차원으로 축소될 것인가. 4차원 그 소녀를 그리워하며 영생을 저주할지도 모르겠다. 진흙을 단 오시리스에게 죽음이 부활하기를 기원하며. 번지수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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