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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2) - 체위보다 중요한 기적의 인칭
안치용의 Numbers (2) - 체위보다 중요한 기적의 인칭
  • 안치용 l ESG 연구소장
  • 승인 2023.01.3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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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2는 원래 불청객이었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다면 세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양이 자신만 만들고 행성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태양 플레어를 견디는 아폴론 같은 신들의 세계가 펼쳐졌을 뿐 허약한 인간에게 생존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신들도 재미가 없지 않았을까.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전에 하나의 점이 하나의 점으로만 머물렀으면 빅뱅 또한 없었다. 하나는 절대고독을 넘어서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 개 점의 무한한 전율과 제 무게 속으로 지옥의 깊이로 붕괴하기. 빅뱅과 개화 사이에는 규모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이 같다. 둘 다 자신이 넘어선 것이 절대고독인 줄을 넘어서기 전에는 몰랐을 것이다. 1은 다른 1을 호명한다. 다른 1을 만나면 그 1과 함께 2로 불리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1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는 원래 불청객이었다.

 

<어부와 사이렌>, 1830~1896 - 프레데릭 라이튼

‘나-너(Ich-Du)’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Grundworte]의 이중성에 따라서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라 짝말[Wortpaare]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Ich-Du)’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Ich-Es)’이라는 짝말이다. ‘그것’이라는 말을 ‘그(Er)’ 또는 ‘그녀(Sie)’라는 근원어로 바꿔 놓더라도 근원어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따라서 사람의 ‘나’도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나-너’의 ‘나’는 근원어 ‘나-그것’의 ‘나’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중에서, 마르틴 부버 지음, 표재명 옮김, 문예출판사

 

혹시 부버가 나의 그림자에 집중하느라 나와 나의 그림자를 덮어버린 메트로폴리탄의 더 큰 그림자를 놓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너-나(Du-Ich)’/‘그것-나(Es-Ich)’로 명기돼야 한다. 이때 인수분해 비슷한 것이 가능해 ‘너/그것-나’와 같은 것으로 나를 뽑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서 누군가에게 발견될 확률이라곤 사실상 전혀 없는 흔한 부표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랬으면 좋겠다. 은총이 필요할까, 진공이 필요할까. 모르긴 몰라도 둘 다 필요하지 싶다. ‘은총-진공’은 드물게 잠시 짝말이 된다. 

 

2인칭은 ‘현실적’이란 말을 싫어한다

나는 (항상) 나지만 가끔 다른 나에게 너가 된다(고 믿는다). 어떤 다른 나가 나를 그의 너라고 부르기로 기도(企圖)하려면, 그 무모함을 결행하려면 신내림에 버금가는 기도(祈禱)를 각오해야 한다. 그 결행이 무모하게 보이는 이유는, 어떤 다른 ‘나’가 나를 의 너라고 부르는 최종 목적이 어떤 다른 ‘나’가 나가 의 너가 되기를 바람일진대, 이런 2인칭의 중복은 웬만한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서 구조헬기가 부표 하나 찾아낸 것과 흡사하다. 

시몬 베유가 말한 진공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 텐데 알다시피 지구상에 진공은 없다. 대기권 밖에서라면? 유사 진공이 있겠지만 대신 거기엔 중력이 없다. 유성처럼 2---인칭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곧 사라진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어떤 2인칭도 중력의 현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복된 2인칭, 혹은 2인칭의 중첩을 바라려면 진공보다는 은총에 기대는 게 현실적이다. 

2인칭은 ‘현실적’이란 말을 싫어하지만 드물게 진공 같은 기적이 강남역 11번 출구 앞길의 휘황한 조명 너머에서 촛불처럼 희미하게 반짝인다. 하필?

 

이중나선 DNA의 참을 수 없는 섹시함 

DNA를 이중나선으로 꼬아놓는 데는 중력이 필요하다. 무성생식은 1인칭이다. 유성생식에 가서야 2인칭이 도입된다. 잠깐 열린 얄궂은 진공이 두 개의 헐벗은 1인칭 나선을 서로 2인칭으로 초대한다. 헐떡거리며 서로를 미친 듯이 끌어안는다. 유성생식에서 2인칭의 중첩이란 기적은 일상이다. 카마수트라에서 제시한 어떤 체위보다 현란하고 복잡하게 DNA는 30억 개의 2인칭을 서로 휘어 감는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사정하는 수컷 연어. 하반신을 밀착한 채 정자를 끌어내느라 용쓰는 인간 수컷. 둘의 표정이 닮았다는 생각. 연어는 목숨을 걸고 사정하지만 인간은 사정을 위해 사정한다. 연어처럼 사정하는 인간을 보고 싶다. 우아함이란 것이 있다면 인간이 아닌 연어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연어는 1을 넘어서 2로 향한다. 

인간 수컷은 싸는 것에만 목숨을 건다. 1에다 1을, 또 1을 더한다. 미시세계로 내려가면, 비록 분당 3mm밖에 이동하지 못해 ‘아버지’가 보기에 답답해 보이는 수억 개 단세포의 모천회귀에는 비장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인간 수컷 생식세포의 운명은 그러나 거의 개그로 끝난다. 2인칭 없는 1인칭과 불모의 1인칭 사이의 충돌은 그것(Es)이라는 3인칭으로 귀결한다. 하나에서 둘 없이 셋으로 비약하기. 일종의 마법이지만 상투적으로 소외라는 말을 쓴다. 

 

헤르만 헤세의 아브락삭스

 

내가 아브락삭스를 불러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환희와 공포, 남자와 여자가 혼합됐고, 신성과 추악이 뒤엉켰으며, 처절한 죄가 연약한 순결을 만나 전율했다. (...) 이제 사랑은, 내가 처음에 겁에 질려 상상하던 것처럼 어둠침침한 동물적 충동이 아니었다. 또한 베아트리체의 그림에서 구현한 것처럼 경건한 정신적 숭배행위도 아니었다. 사랑은 둘 다였다. 둘 다이면서 그보다 훨씬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이자 사탄이고, 한 몸에 깃든 남자이자 여자였으며, 인간이면서 짐승, 최고의 선이면서 동시에 가장 사악한 마음이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그책

 

헤르만 헤세의 자아는 ‘너/그것-나’보다는 ‘너-나(Du-Ich)’/‘그것-나(Es-Ich)’로 보인다. 서구 기독교 정신의 병적인 현상인 분열을 헤세가 숙명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원래 사탄은 천사였고, 발생학에서 남자와 여자는 애초에 하나였으며, 인간은 인간이면서 여전히 짐승이란 사실이 고통스러웠을까.

말마따나 인간은 알을 깨고 나온다. 그전에 간절한 노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미미하다고 없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섹스는 대체로 1인칭에서 3인칭으로 휘발한다. 생식은 전적인 2인칭을 향한 1인칭의 돌진이다. 1과 1이 있다고 2가 되지 않는다. 부유하는 1과 1을 ‘1+1’로 묶어야 2가 나온다. 등호[=] 치기를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꾀하든 꾀하지 않든 생식과 동일한 구조를 취한다. 사랑에선 늘 결사적인 측면이 발견된다.

3인칭으로 휘발하는 것을 근거로 모든 섹스에서 사랑이 소멸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 또한 단정이긴 하다. 내가 나를 속속들이 안다고 믿는 바보가 아니라면 어리석은 단정이 휘발 대신 비약을 가져다줄 수 있다. 내가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어쩌면 전적으로 무지하다는 단정한 ‘사실’은 도나캐나 축복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직립보행

 

<2를 향하는 얼룩말 두마리>

1+1로 2를 만든 가장 자랑하고 싶은 사례는 사랑이겠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표 징표로 믿고 싶기에 소중하게 보전해야 하겠지만, 기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1+1’의 성공사례는 이족보행에 이은 직립보행이다. 

상상해 보자. 인간의 조상인 어떤 ‘호모’가 최초로 직립한 광경을. 아이가 네 발로 기다가 어느 날 두 발로 서듯이, 그렇게 갑자기 직립하지는 않았겠지만,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인 양 그렇게 직립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은총이었다. 

조상 ‘호모’가 살던 아프리카에서 정확하지 않지만 약 500만 년 전 숲이 후퇴하고 더 개방된 사바나 서식지가 만들어지면서 숲에서 초지로 내려온 ‘호모’가 두 발 직립보행으로 진화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 일종의 가설로, 당연히 다른 설명이 많다.

아무튼 펭귄 외에 인간이 유일하게 직립으로 이족보행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당장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앞발이 손이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단적으로, “손”을 외쳐도 나의 개가 끝내 발을 주는 모습과 비교하면 이 사건의 문명사적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손의 탄생 못지않게 경이로운 다른 사건은 후두의 하강이었다. 후두가 내려가며 인간 목에 공명할 공간이 생긴다. 진공! 지구상에서 가장 정교한 언어를 발전시킨 유일한 생명종이 된 토대가 후두의 하강이었고, 그것은 직립의 결과였다. 황제펭귄는 언어를 창안하지는 못했다. 후두를 영어 표현으로 ‘Adam’s Apple’이라고 하는데, 에덴동산에서 유래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다움을 가능케 한 이 핵심기능을 염두에 뒀다고 볼 수 있다. 언어. 직립으로 생긴 목의 공간으로 말하게 되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된 손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직립한 ‘호모’는 말하고 쓰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언명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어느 조상 ’호모‘가 직립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후 인간 존재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터다. 어쩌면 존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릴리트와 하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1장 26-29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했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세기 2장 중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구약성서 창세기엔 두 번의 인간 창조가 나온다. 성서 편집자가 출처가 다른 두 개의 설화 중에서 하나를 취하지 않고 두 개를 모두 실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여성이 서구에서 인류의 어머니 취급을 받는 하와다. 그렇다면 1장에서 하나님 형상대로 남성과 동시에 만들어진 여성은 누구인가. 유대와 메소포타미아 설화에 두루 등장하는 인물인 릴리트다. 

보통 하와를 창세기 대표 여성으로 삼기에 만든 순서나 재료 측면에서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기독교에 강했다. 이런 가부장적 해석에 반대해 아담을 흙으로 만든 반면 하와는 뼈로 만들었으니 더 ’고급‘ 재료를 쓴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웃지 못할 해석도 있다. 설화를 근거로 남성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훨씬 더 우스꽝스럽긴 하다.

성서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창세기 1장의 여성 릴리트는 매우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아담이 상위체위를 고집하는 것이 싫어서 아담을 떠나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서구 전통에서 릴리트는 악녀와 많이 연결된다. 가부장제가 수용할 만한 여성이 아닌 셈이다.

구약성서의 편집을 존중하면 아담에게는 두 여자가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좀 밑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릴리트에겐 훨씬 더 많은 남자가 있었다. 

재미 삼아 한 이야기고, 창세기 1~2장에서 핵심은 하와나 릴리트, 선악과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문구다. 하나님의 형상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다음 문구를 연결지어 성서를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한 흐름은 올바른 성서해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진술은 무엇보다 신의 사랑과 인간 존엄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존엄한 것은 DNA에 30억 쌍이나 되는 염기를 지녀서가 아니라 신의 2인칭이기 때문이 아닐까. 3인칭과 달리 2인칭은 하나밖에 없다. 어느 누구의 2인칭도 둘이 아니다. 너. “너”라는 호명 앞에서 나는 너의 나가 되겠다고 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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