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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로테스크한 괴물은 누구인가?
지금, 그로테스크한 괴물은 누구인가?
  • 백우인 | 종교철학자 겸 시인
  • 승인 2023.07.31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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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한 괴물에 대해 철학적 개념의 실마리를 준 들뢰즈, 바흐친, 부르디외(왼쪽부터)

신문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연애, 스포츠, 날씨 등 여러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최고실재인 생활세계는 섹션으로 구분돼 있지 않으며, 구분할 수도 없다. 시장 물가의 변동은 시장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가계와 정치와 생산 라인과 유통에 관여하는 모든 것이 시장 물가의 변동과 연결돼 있으며, 그중 어느 하나라도 출렁이면 도미노 현상처럼 모든 관계가 출렁임의 여파에 놓인다. 생활세계의 장은 이렇듯 그물망 구조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 언어와 사진으로 보도하는 신문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만, 하나의 목적(목표)을 지향하고 있어서 그에 맞게 사실을 구성한다. 이런 신문과 같은 매체는 문화정치학의 좋은 도구로 쓰인다. 언론에 기사화된 내용과 사건은 특정 장소와 시간이라는 구체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보도내용이 당시의 시간과 장소 안에서 구체적이고 고유한 맥락을 가진다는 것과, 그 맥락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임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상위 0.1%의 상류층을 겨냥한 공간이라는 아파트 광고, 젊은 여성들이 실업급여 받아 해외여행을 가거나 명품을 산다는 이유로 ‘시럽 급여’라 칭하면서 수령액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고위 공무원들의 발언, 폭우로 인해 국민들이 죽어갈 때, 그 나라의 영부인은 방문 중인 외국의 명품매장을 섭렵하고 다녔다는 보도, 수산시장 수조 속 물을 떠서 마시는 국회의원의 모습,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고 교과서에서만 문제를 출제하라는 지침과 이에 따라 사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학원가를 압수수색하는 공직자들의 움직임(1) 등의 기사를 보자. 

나열한 기사 내용은 강남의 압구정동에 ‘고급화를 통한 차별화’를 내세워 아파트 재건축이 추구하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고, 실업급여를 받아 고급문화를 누린다는 지적과 수해로 인한 죽음에 슬퍼하는 민중과 동시간대에 외국의 명품매장을 회진하듯 돌고 있는 대통령 부인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는 정책을 결정할 권력자와 그의 발언을 실행에 옮기는 정치가들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런 보도기사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며, 그런 생각은 어떤 경로를 거쳐 나온 인식의 틀일까?

 

아비투스와 감정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틀을 피에르 부르디외(2)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개인들은 일상영역과 공공영역에 대해 일정한 성향과 인지 틀을 가지고 있는데,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라고 부른다. 개인이 사회적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아비투스가 달라지며 이것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집합적) 수준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다시 말해 개별적 성향 차이가 사회적 아비투스의 차별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통해 계급별로 구별 짓기가 형성된다. 

보도된 내용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해석의 차원에서는 개인의 사소한 습관이나 취향, 사회적 공간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계급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가 등장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 필자는 소위 갑질의 횡포를 염두에 두면서 ‘거리에의 파토스’(3)에 의해 구별 짓기가 더욱 공고해지고 차별의 간극이 커진다는 의견을 얹는다. 기사 내용의 사실과는 별개로 보도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긍정적과 부정적 견해로 나눠보자. 

긍정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상류층을 공략하는 보도와 대통령 부인의 명품 쇼핑과 국가정책과 그에 따른 실행에 대해 문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디외의 분석 틀로 보건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사회적 공간 안에서 문화적 자본(학력, 직업, 매너, 취향)과 경제적 자본(물질적 자산)이 상위의 계층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누리며 다른 계층과 구별된 권력을 갖고자 하는 아비투스가 형성돼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부정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위의 보도를 문제시할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기보다 겉치레에 치중한 눈가림식의 정책이라고 지적할 것이며 돈과 권력의 카르텔이 집약된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느낄 것이다. 이런 비판적인 성향의 아비투스가 형성된 사람은 정서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사회가 그로테스크하다고 평가하면서 저런 기사 내용의 근간에는 대체 인간 평등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여기서 ‘그로테스크(Grotesque)’는 이상하고 기괴하고 불쾌한, 혹은 문학이나 예술에서 묘사된 어떤 캐릭터나 상황이 어리석거나 약간 무섭고 불편하게 다가오는 느낌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것으로, 이 그로테스크야말로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적확하게 진단하는 개념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아비투스는 부르디외가 분석한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정, 혹은 감수성이다. 

한국 사회는 재화적 가치가 오직 돈에 몰려있다. 돈만 있으면 학벌도 얻고, 사랑도 얻고, 권력도 거머쥐고, 명예도 만들며, 구원까지도 획득하게 되는 등 한 사회의 지배적 지위와 권력을 당연한 듯 차지한다. 때문에 돈의 소유와 축재과정은 무한 경쟁을 통해 인간을 만인의 투쟁인 자연상태로 만든다. 돈을 쟁취하지 못했거나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질투와 적개심은 사회현상을 불평등하다고 인식하는 개인의 아비투스에 버무려질 것이다. 그러니 그로테스크는 필연적인 감각의 각성이라 할 것이다.

 

그로테스크의 양방향

푸코는 그로테스크를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파악한다. 그에게 그로테스크한 몸은 타자화되고 비정상화된 신체로, 이성과 질서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괴물이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는 공개적으로 참수돼, 그의 몸은 머리와 나머지 부분이 분리된 채 국민에게 공개됐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을 박탈당한 그는 인간의 형상을 잃고 괴물이 됐다. 그로테스크한 권력을 쥔 루이 16세의 종말은 그로테스크한 몸, 즉 죽어서 괴물에 이른다. 

한편, 푸코는 르네상스 이전의 그로테스크한 몸은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성을 지닌 신체라고 말한다. 이때의 그로테스크한 몸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카니발적 신체(4)와 겹쳐진다. 그로테스크한 몸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은, 원래 자신의 크기보다 더 커지고 개별적인 경계들을 넘어서며 새로운 몸을 수태할 수 있는, 신체적 부위들이 한다. 예컨대 배와 남근, 입, 엉덩이 등이 있는데 이것들의 융기된 부분과 구멍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곳은 상호교환이 일어나 두 신체 사이의 경계가 없어지고 신체와 세상 사이의 경계들이 극복된다.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융기된 부분과 구멍들의 행위들 속에서 죽음이 출생으로 연결되고 소멸이 생성으로 전이되며 창조와 전복의 형태로 삶의 끝과 시작이 서로 밀접하게 얽힌다. 민중적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몸과 몸의 경계가 없이 연결된 신체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몸을 넘어 집단적인 몸이 되고 확장된 세계-신체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몸으로 변환된다. 

 

괴물, 범죄자와 전제군주의 유사성

그로테스크한 권력을 가진 전제군주가 어떻게 그로테스크한 몸이 되는지 좀 더 들어가 보자.
전제군주는 신의 섭리에 의해 왕이 됐으므로, 그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모든 권력의 효과를 황제에게만 귀속시켰다. 한 개인이 행사하는 권력은 그 개인 혼자서 권력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가 가진 지위에 의해 한마디 말에도 부들부들 떠는 시늉과 하나의 눈짓에도 짐짓 주눅이 든 변명과 하나의 표정에도 얼어붙은 몸짓을 하는 이들이 군주의 발밑에 납작 엎드려야 한다. 더불어 사리 분별보다는 간교하고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이 주변에 있으면서 그를 부추겨야 한다. 

결과적으로 전제군주는 자신의 자질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거머쥐지 못할 권력효과를 나타낸다. 푸코는 이를 ‘그로테스크’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권력에 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전제군주는 이중적 과정을 거쳐 그로테스크와 결부된다. 한번은 그가 행사하는 권력에 의해서 스스로 그로테스크한 권력의 주체가 되고, 또 한번은 아부와 영합의 대가로 받은 시혜와 권력 부스러기들을 행사하는 주변인들의 범법과 패악과 어쭙잖은 갑질로 인해 그로테스크하며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만들어진다. 이것은 최고의 권력자인 전제군주의 아비투스가 괴물화 되는 과정이다.

그로테스크한 권력은 범죄자와 사촌이 된다. 푸코는 저서 『비정상인들(Les Anormau, Abnormal)』에서 계약을 파기하는 사람, 즉 계약을 파기할 필요성이나 파기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그의 욕구가 자의적인 결정을 내리게 해 계약의 파기를 명령해서, 또는 폭력과 맹목의 순간에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이유를 부각하면서 계약을 파기하는 사람을 범법자라고 규정한다. 안하무인의 전제군주라든가, 맹목이나 미신과 주술 혹은 분노에 사로잡힌 전제군주는 자기 개인의 기분과 감정, 의지와 욕구,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며 그것을 지속해서 표출하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자의적 주권이 그로테스크한 권력의 원천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로테스크한 권력이 범죄자가 되는가. 전제군주는 법적 자격에 의해서 범법자가 된다. 전제군주란 사회에서 지위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사회계약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계약이라는 법적인 틀 안에서 보면 그는 사회적 관계가 전혀 없는, 법 밖에 있는 개인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행위다. 자신의 비이성과 변덕과 폭력을 일반화하고 국가이념으로 만들어버리는 전제군주는 그의 존재 자체가 곧 범죄라 하겠고, 그가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그의 주변인들은 그의 권력에 맹종함으로써 전제군주의 괴물성을 더 강화할 뿐 아니라 흡혈귀에게 물려 자신도 괴물이 돼버리듯 범죄자가 된다. 

 

전쟁 기계와 민중

전제군주가 폭력과 맹목으로 자기 이익과 욕구를 부각할 때, 비이성의 환각이나 분노에 차서 과도한 행동을 저지를 때 그로테스크한 권력의 효과는 민중에게 돌아온다. 민중은 그 권력 앞에서 하찮은 존재가 된다. 민중의 생명과 죽음도 하찮고 우스운 것이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를 빼앗기며 전제군주의 권력 앞에서 정의와 합리성은 사라진 채, 인간은 함부로 사용하고 버려도 되는 수단과 도구가 된다. 『천 개의 고원』 12장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론과 전쟁 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해 삶의 변혁을 추동한다.(5) 

국가를 마주 세워 두고 국가의 외곽으로 나오는 것, 그것은 그동안 당연시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관점과 삶의 태도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일탈이란 새롭게 보기, 다르게 보기, 의심해 보기, 질문해 보기, 순응하지 않고 저항해 보기이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일탈을 통해 국가의 권력체제와 구조로부터 원심력을 발휘해 보기를 제안한다. 그들은 중앙집권적인 조직보다는 힘이 분산된 체제,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산발해 있는 리좀(Rhizome)식의 중심을 강조한다. 이런 중심에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동등한 의미를 가지며, 존재의 관계망 속에서 삶을 변환시키고 낡은 사유와 체제를 전복시켜 삶의 방식에 혁명을 시도하는 것이 전쟁 기계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주체성과 자유의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전쟁 기계와 그로테스크한 권력에 맞서는 라블레적 그로테스크가 중첩된다.

들뢰즈의 전쟁 기계와 민중적 그로테스크한 몸은 모두 하부 문화와 연결돼있고 권력과 상부 문화에 대한 전복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전쟁 기계는 권력을 파괴하거나 재배치한다. 민중의 그로테스크한 몸은 권력을 비웃거나 무시한다. 이는 그로테스크의 괴물적 특징으로 상부 문화를 결코 두려워하거나 그것에 영합하거나 굴종하지 않으면서, 되려 그로테스크한 권력 앞에 기괴한 웃음을 보임으로써 두려움을 상부 문화에 역전시킨다. 전쟁 기계와 민중은 모두 변화와 운동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행위자성을 드러낸다. 

라블레의 그로테스크한 몸의 민중과 들뢰즈의 전쟁 기계는 그로테스크적인 권력을 탈영토화하고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조화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탈주하는 정치 주체이자 실천을 위해 행동하는 정치 주체다. 검증되지 않고, 편향되고 은폐된 뉴스 자료가 난무하는 ‘지금 여기’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판단력을 왜곡시키는 사회적 구조를 살펴보고, 의식의 내면과 사회적 구조를 동시에 파악함으로써 현실을 직시하는 정치 주체를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계약을 깨고 범법자가 되는 그로테스크적 권력에 맞서는 전쟁 기계로 연대할 시공간이다. 민중은 불온한 범죄자의 그로테스크한 괴물성을 전복시키고 속지 않는 명징한 이성과 진정한 인간 해방의 주체인 그로테스크한 전쟁 기계다. 

 

 

글·백우인
종교철학을 전공한 시인이며, 사회현상을 예민한 감각으로 읽고 분석하는 지식 노동자다. 저서는 시집 『쉼 없이 네가 희망이면 좋겠습니다』, 에세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여우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 등이 있다. 


(1) <한겨레>와 <경향신문>, 네이버 인터넷 뉴스의 기사를 참조했고 7월 1일부터 7월 17일까지 관심 있게 읽은 기사를 예시로 사용했다.
(2) Pierre Bourdieu, 1930~2002, 프랑스의 사회학자. 그의 저서들 중 국내에 번역 출간된 『구별 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2006)을 참고했다.
(3)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Pathos of distance)’는 고귀한 우월성의 감정을 가진 자가 상대방과 거리를 둠으로써 상대방을 멸시하는 심리적 기제다.
(4) 미하일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2001년, 아카넷).
(5) 펠릭스 가타리,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자본주의와 분열증』 (2001년,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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