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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조한, 내 삶을 구조한 개들
내가 구조한, 내 삶을 구조한 개들
  • 황동열 l 동물권운동가, 사단법인 팅커벨프로젝트 대표
  • 승인 2023.08.31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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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집에 가서 편히 쉬시고 내일 뵈어요.”

2012년 2월의 추운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머니와 인사를 했다. 폐암 말기로 건대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를, 나와 어머니가 교대로 간병 중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서 있었다. 

“그래, 동열아. 아버지 잘 보살펴드려라. 내일 아침에 보자.”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인사였던 것이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약 3시간 후, 휴대폰이 울렸다. “형, 큰일 났어. 집에 불이 났대!”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에 내 심장은 쾅, 내려앉았다. ‘지금 집에는 어머니가 계신데!’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달려간 나는, 까맣게 그을린 집 앞에서 하얀 천을 두른 들것을 싣고 나오는 소방대원들과 마주쳤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들것에 실린 사람은 어머니였다. 나와 간병 교대를 한 후 집으로 가셨던 어머니가 화재로 영영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낡은 주택의 전기배선에 문제가 생겨, 누전과 합선으로 화재가 일어났던 것이다. 

나는 황망한 마음을 부여잡은 채 경찰서의 조사를 받고 돌아왔다. 당장 어머니의 장례식을 해야 하는데, 병원에는 폐암 말기의 아버지가 있었고 돌아갈 집은 불에 타버려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 후, 우선 집 부근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끼칠 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재로 전소된 집의 복구 공사를 서둘렀다.

한 달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한 달 만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것이다. 공사가 끝나, 집은 이전의 형태를 되찾았다. 하지만,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안방 문을 열면 부모님이 나오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부모님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큰 슬픔을 겪게 된 나는, 매일 괴로워하며 밤마다 폭음을 했다.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를 잘 다스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 넘게 폭음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아침, 문득 너무나 망가진 내 모습이 보였다.

‘그래, 돌아가신 부모님도 내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실 거야.’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했다. 평소에 꼭 하고 싶었던 한라산 백록담 등정을 한 후, 해안 올레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너무나 큰 슬픔 속에서도, 제주도의 올레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개를 산다는 것, 개와 함께 산다는 것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밤마다 몰려오는 큰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집에서 꽤 떨어진 대형마트에 매일 걸어서 다녀오면서, 한 가지씩 사오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은 간장 한 병, 다음 날은 세제 한 통. 또 어느 날은 참기름 한 병, 그 다음 날은 소금 한 봉지. 이렇게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마트 한쪽에 새로 생긴 펫숍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태어난 지 두 달쯤 돼 보이는 작고 예쁜 강아지들이 여럿 있었다. 

그 모습에, 어린 시절부터 강아지를 좋아했던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강아지를 한 번 길러보면 어떨까? 이 예쁜 강아지가 내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펫숍을 살펴보던 중 하얀 말티즈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매장의 카운터로 가서 계산하려던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강아지를 데리고 가면 10년 이상 돌봐줘야 할 텐데, 내가 그때까지 잘할 수 있을까. 중간에 싫증이 나거나 귀찮아지지 않을까?’ 

결국 나는 꺼낸 카드를 다시 넣었다. ‘그래. 강아지를 사는 것은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딱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 나는 집으로 가면서 내내 강아지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바둑이 이후 처음으로 강아지를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직후 컴퓨터를 켜고 ‘강아지 분양’이라고 검색하니, 관련 정보가 쏟아졌다. 참 귀여운 강아지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유기견 입양’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유기견, 이게 뭐지?’ 연관 검색어를 클릭하니, 최상단에 ‘유기견 입양캠페인’이라는 포스팅이 있었다. 들어가서 보니, 사진 속 팻말에 이런 말이 있었다. 

“오늘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됩니다.” 

팻말을 든 사람 밑에 개들이 보였다. 크고 작은 개들이 펜스 안에 가득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개들도 있고, 어려 보이는 개들도 있었다. 그날 나는, 유기견들이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유기견 입양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 기왕이면 유기견을 입양해서 한 생명을 구해야겠다!’ 그리고 입양캠페인을 주관하는 단체의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라는 메뉴를 클릭하니, 수십 마리의 작은 강아지들이 나왔다.

 

필자의 첫 입양견인 흰순이(왼쪽)와 흰돌이(오른쪽). 필자는 “흰순이가 장애견임을 알고서도 흰돌이와 함께 입양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라고 말했다.(사진 제공-황동열)

그중 흰 강아지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둘 다 진돗개 혼혈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진돗개를 특히 좋아했던 나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결국 입양 공고 사진 밑에 “제가 이 개들을 입양하고 싶습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잠시 후 답글이 달렸다. “왼쪽 개는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장애견인데 괜찮겠어요?” 사진을 자세히 보니, 왼쪽 개의 왼쪽 앞다리가 짧고 굽은 상태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글을 남겼다. “네. 괜찮습니다. 제가 잘 돌볼게요.” 

나는 절차에 따라 입양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토요일에 이태원에 있는 입양센터에 가서 직접 두 마리 개를 데리고 왔다. 장애견은 생후 5개월, 옆에 있는 개는 4개월 정도 됐다고 했다. 함께 있는 모습이 형제자매 같았지만, 같은 어미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흰순이, 흰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흰순이와 흰돌이를 안고 집에 오는 내내, 흰순이는 침을 심하게 흘렸다. 멀미였다. 아마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서 가는 상황에 긴장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30분 넘게 택시를 타고 온 흰순이와 흰돌이는, 집의 거실에 발을 딛자 깡충깡충 뛰며 무척 좋아했다. 

‘그래, 이 녀석들아. 이제 여기가 너희 집이야!’ 

흰순이, 흰돌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무척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외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작은 강아지들이 내게 큰 위로가 돼준 것이다. 흰순이와 흰돌이가 집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모처럼 친구들과 만나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신 나는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향했다. 대문에 다다르니, 문 앞에서 양손을 나란히 모으고 뒷발로 서서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기는 두 생명이 있었다. 흰순이와 흰돌이였다. 

‘아… 너희들이 있었구나! 내 가족, 내 새끼들이구나.’ 

그 늦은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나를 반기는 흰순이와 흰돌이. 그 둘을 보니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몰려왔다. 나는 두 녀석들을 품에 안고 계단 옆 베란다에 앉아서 한참을 쓰다듬어줬다.

 

지난 6월 서서울 호수공원에서 반려견 천둥이, 하니, 알콩이, 하몽이(왼쪽부터 순서대로)와 함께한 필자의 모습.(사진 제공-황동열)

개를 구한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지만

그날 이후, 나는 흰순이와 흰돌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포털사이트 다음의 반려동물방에 올리기 시작했다. 반려동물방에는 말티즈, 시츄, 포메라니안, 푸들, 치와와 등 소형견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처럼 진돗개 혼혈견, 중대형견을 키우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그리고 흰순이와 흰돌이는 펫숍에서 사지 않고 입양한 아이들이었기에, 특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마치 육아일기를 쓰듯, 매일 흰순이와 흰돌이의 일상을 사진과 동영상을 곁들여 쓰기 시작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흰순이와 흰돌이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언제부터인지, “흰순이와 흰돌이의 팬”이라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흰순이와 흰돌이는 1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내 곁에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생후 5개월이었던 흰순이가 좀 더 컸는데, 언제부터인가 흰돌이가 더 커졌다. 두 아이들과 매일 함께 놀고, 산책도 하면서 나는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11년 동안 식구가 늘었다. 나는 개들에게 마음껏 뛰어놀 넓은 마당을 주고 싶어서 서울 자양동에서 경기도 양주로 이사했다. 개들이 짖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늘어난 개 식구들 중 동작대교 밑에서 3년간 떠돌다가 구조된 검둥개 럭키는 내 책의 주인공이 됐다. 

그리고 자양동 거리를 떠돌다가 뻥튀기 장수 트럭에 붙잡혀서 개소주가 될 뻔했던 순심이, 경기도 용인 함바집 뒷마당에 방치됐던 코돌이와 코순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여러 번 파양됐던 초롱이, 부천 아파트 베란다 밑에서 숨어지내던 레오, 살던 집이 재개발된 후 자신을 버린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고 안락사될 뻔했던 순돌이, 경기도 시흥의 옥구공원에서 돌멩이와 몽둥이를 맞던 벤지, ‘사납다’라는 공고 문구 때문에 안락사될 뻔했던 도담이, 구로동 재개발 지역 주변을 떠돌던 양쪽 눈을 실명한 금동이, 경북 의성의 위험한 도로를 배회하던 미나리, 파주시 도로 옆에 버려져 차에 치여 죽을 뻔했던 알콩이, 심장병을 앓아 버려진 후 보호소에서 안락사될 뻔했던 왕자, 일산의 한 보호소에서 구조된 순둥이 먹보 테리. 

팅커벨프로젝트에서 구조돼 새로운 가족을 만난 2,500마리의 개들, 그리고 이 개들을 구조하는 계기를 선사하고 떠난 우리의 팅커벨. 

흰순이와 흰돌이, 이 두 아이들의 입양을 통해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다. ‘팅커벨프로젝트’라는 유기동물 구호단체의 대표가 된 나는 10년 넘게 안락사 위기에 있는 개들의 생명을, 그리고 삶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내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개 한 마리 구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물론, 개를 구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개의 세상만큼은 온전하게 바꿔줄 수 있다. 더불어, 나의 세상 또한 바뀌고 있다.

 

 

글·황동열
동물권단체 사단법인 팅커벨프로젝트 대표. 직장생활 20년 차인 2012년, 사고와 질병으로 부모를 잃고 유기견이었던 흰순이와 흰돌이를 입양했다. 이후 유기견의 구조와 입양을 위한 후원을 하다가, 2013년 5월 19일 유기동물 구호단체 팅커벨프로젝트를 설립했다. 이후 10년 동안 약 2,500명 유기동물의 생명을 구했고, 그들에게 가족을 찾아줬다. 저서로 『뚱아저씨의 BMW 다이어트』(잉크, 2010년), 공저서로 『동작대교에 버려진 검둥개 럭키』(박현숙, 황동열 글, 신민재 그림 국민서관, 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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