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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보다도 더 사실 같은 ‘지하 조선총독부’ 『총독의 소리』
사실보다도 더 사실 같은 ‘지하 조선총독부’ 『총독의 소리』
  • 오태규 | 언론인
  • 승인 2024.08.30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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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세계는 현실 세계가 아니다. 소설 속의 세계는 작가가 창조한 세계, 즉 허구의 세계다. 하지만 허구가 현실보다 훨씬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소설가는 자신이 직간접으로 겪은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그린다. 훌륭한 작가일수록 사실보다 더욱 사실적인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 문학에서 이런 능력을 ‘핍진성(verisimilitude)’이라고 한다.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를 말한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쓴 연작 소설 『총독의 소리』는 책이 나올 당시엔 핍진성의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뒤에도 조선 총독이 일본 밀정 등과 함께 계속 한국 땅에 남아 한국을 재식민지화하기 위한 지하 투쟁을 벌인다는 기발하고 황당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현실에서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다. 핍진성을 포기하고 메시지 전달에 힘을 쏟으려는 작가의 뜻이 이런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이 소설은 4부작으로 돼 있다. 1부와 2부는 1967년, 3부는 1968년, 4부는 1976년에 각각 발표됐다. 작가가 이 연작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1965년 한일 간에 맺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이라고 한다. 이 조약의 체결로 한국인 개인이 일본 정부에 식민지 피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됐고 빼앗긴 문화재도 돌려받기 어렵게 된 것에 실망하고 분노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내용은 한국 땅에 남아 지하 총독부를 이끄는 총독이 유령 방송을 통해 외세 의존적이고 비주체적인 반도인(한국인)을 비하·조롱하며, 지하 항쟁을 하고 있는 일제의 군인과 경찰, 밀정과 낭인 등을 격려·고무하는 것이다. 때때로 국제정세를 분석하며 한국을 재식민지화하기 위한 정책을 설명하고 행동방침을 제시한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서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 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이 소설의 서두다.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빠지지 않을 독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그나마 소설이니까 바로 안도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친일 본색’ 윤석열 정권 아래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최인훈의 기발한 상상이 수십 년 뒤에 너무도 핍진성 있게 육박해 오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총독은 한국인이 독립성과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한국인의 의식을 세뇌하고, 남북이 평화롭게 지내지 않고 분쟁하고 대립·갈등시키는 것을 주 업무로 삼는다. 그래야 일본 제국의 꿈인 한국의 재식민, 재영유를 쉽게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일제 지하총독부의 재식민지화, 오늘날 현실로 나타나

바로 소설 속의 총독이 하려는 짓을, 지금 윤석열 정권이 너무도 당당하게 자행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자를 독립기념관장에 앉힌 것은, 소설 속에서 한국인의 자율적인 생각을 지우고 외세 의존적이고 피동적으로 만들려는 총독의 기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일제의 쌀 수탈을 수출이라고 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자를 한국의 얼을 연구하고 계발하는 업무를 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에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뿐 아니다. 한국인의 정신, 역사, 존재에 영향을 주는 각종 국책 연구기관에 친일적이고 매국적이며, 심지어 반역적인 인사들을 줄줄이 앉혀 왔다.

남북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방해하고 서로 으르렁거리게 함으로써 양쪽의 힘을 소진하려는 총독의 전략에도, 윤 정권은 부화뇌동하고 있다. 일본이 아직도 식민 지배에 사과와 반성은커녕 합법적인 지배였다고 우기고 있는데, 항의는커녕 그들의 주장을 100% 수용하며 자위대마저 한국 땅에 불러들일 기세다. 

소설에서 총독은 한국을 재식민지화 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서로 전쟁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안 될 때는 차선책으로 비전비화(싸움도 아니고 화해도 아닌 상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쪽이 서로 으르렁대면서 자원을 모두 쇠진해야 일본이 다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쉽다는 이유다. 윤 정권이 과거사를 덮고 일본과 군사협력으로 돌진하는 것은 마치 총독의 이런 전략에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윤 정권의 친일 행각이 작가 최인훈을 예언자, 천공보다도 백배 천배 용한 점쟁이 반열에 올려놨다. 최인훈이 부족한 점이 있다면, 한국의 대통령이 총독 노릇을 하리라고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이쯤 되면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마저 훌쩍 뛰어넘는 윤 대통령의 친일 본색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4부작이지만 140쪽 정도로 짧다. 1부는 패전 이후 한국 땅에 남아 지하 활동을 하게 된 사정과 재식민화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담고 있다. 2부와 3부는 각각 1968년에 일어난 1.21 북한 무장간첩 침투 사건 및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4부는 베트남 전쟁 종결 즈음에 나타난 국제적 데탕트 흐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소설의 묘미는 한일관계, 국제관계를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보다 더욱 실감 나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엄밀한 사실 관계나 증명이 필요 없는 허구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통찰력 있는 분석과 전망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소설은 일반 시민이 소설적인 재미 외에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속내와 윤 정권의 친일 행각의 의미,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역학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윤 정권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필수 독서 목록의 하나로 올려놓을 만하다.

 

 

글·오태규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관훈클럽 총무, 한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 위원장, 오사카총영사를 역임함. 2021년 9월부터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 국제, 외교, 국내정치, 사회, 스포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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