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유령을 부르는 악랄한 권력자의 ‘사랑’ 이야기
유령을 부르는 악랄한 권력자의 ‘사랑’ 이야기
  • 김경 | 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31 1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드로 파라모>(2024) - 페드로의 죽음은 한국의 12월과 닮은 꼴
<페드로 파라모> 포스터

<페드로 파라모>(2024)는 악랄한 지주이자 아버지인 페드로를 찾아가는 후안의 여정이다.

<8마일>, <색, 계>, 그리고 <아이리시 맨> 등을 촬영했던 로드리고 프리에토(Rodrigo Prieto) 감독이 멕시코 문학계의 거장 후안 룰포(Juan Rulfo)의 동명 소설(1955)을 영화화했다.

저명한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의하면 “스페인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이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은 <오픈 유어 아이스>와 <바닐라 스카이>의 마태오 길(Mateo Gil) 각색이다. 라틴 아메리카 후기 혁명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당대 최고의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이 70년 만에 영화로 소환되었다.

소설과 영화 모두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선이 없다. 죽은 자의 기억과 의식의 흐름이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플래시백 된다. 원한에 사무친 유령들은 유령 내레이션을 통해 아픈 과거사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 유령이어야 겨우 허용되는 목소리는 부당하고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반증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죽은 자 ‘동호’가 화자로 등장하는 이유와 같다. 우리는 이러한 유령 서사를 통해 비로소 억압적 역사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성찰을 담은 괴이하지만 매혹적인 영상시라는 점이다.

 

유령 마을, 원혼들의 무덤

후안 프레시아도(테노치 우에르타)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페드로 파라모(마누엘 가르시아 룰포)를 찾아 도착한 곳은 황량한 정적과 유령의 속삭임,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할 수 없는 스산한 마을 코말라다. 후안이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예컨대, 영화 첫 장면, 마을 초입에서 만난 아분디오는 자신도 페드로의 아들이라며 머물 곳을 묻는 후안에게 디아나의 집을 소개한다. 어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디아나는 기이하게도 후안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후안을 그녀에게 안내한 아분디오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며 이상하다고 고개를 젓는다.

디아나의 기억 속 후안의 아버지 페드로 파라모와 어머니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 페드로 파라모의 악행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인 원혼들로 인해 공포에 떨며 어둡고 낯선 거리로 뛰쳐나온 후안. 하지만 부모님의 오랜 집사 다미아나가 나타나 후안을 위해 불을 밝혀 주며, 디아나 역시 죽은 지 오래됐다고 얘기해 준다.

다미아나도 유령이다. 후안은 이제 이 마을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실과 환각, 기억과 착각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이 유령마을은 악랄했던 지주, 페드로의 위악이 남긴 커다란 무덤이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와 유령들의 기억이 이 마을을 무덤으로 만든 아버지, 페드로 파라모의 모습을 드러낸다.

로드리고 프리에토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이 캐릭터의 관점과 일치되어서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라고 한다. 그는 유령들의 시선, 유령들의 기억을 따라가며 억압되고 왜곡된 기이한 유령들의 존재감을 와이드 앵글과 트래킹 백, 줌인 결합으로 보여준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모호한 경계선을 섬뜩하게 처리하는데 탁월하다.

 

구천을 맴도는 유령들

예컨대, 로드리고 감독은 평범한 대화를 하는 등장인물을 통해 유령일지도 모르겠다는 암시(Suspense)를 하는가 하면 유령이라는 것을 불현듯(Surprise) 드러내기도 한다. 관객이 인물들의 일상적인 대화(그러나 원작의 명성에 걸맞은 매우 시적인 대화)에 몰입하는 동안 영상은 비현실적인 환각 혹은 환상을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소년 페드로는 첫사랑 수사나와 생이별 후 그녀를 가슴에 묻은 채 냉혈 인간, 악덕 지주로 자란다. 그는 돈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후안의 생모와는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결혼했고, 폭행과 갈취,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악랄한 지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후안이 억울한 유령들을 통해 부친 페드로의 죄악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와이드 앵글과 줌인 트래킹 백을 결합하여 비현실적 속도감을 주는 미장센으로 후안의 공포를 시각화한다. 이때 나타난 (유령) 남매의 말은 이 상황에 대한 의미심장한 요약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저주받은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있어. 갚아야 할 목숨 빚이 많은가보다.”

쓰러져있는 후안을 타고 넘어가는 그녀의 두 발 클로즈업에 이르면 그녀 역시 유령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라며 유혹하던 알몸의 그녀가 진흙이 되어 흘러내리게 되고, 진흙에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마침내 후안 역시 아버지가 만든 지옥에 묻힌다.

그리고 후안의 죽음과 동시에 페드로가 죽인 수많은 유령이 구천(九泉)에 흐르기 시작한다. 본래 구천은 죽어서 넋이 돌아가는 곳, 구 척이나 낮게 내려가는 저승이다. ‘구천에 가득한 혼령’을 묘사한 미장센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시적이고 상징적인 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영화 미장센으로 영화답게 표현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한 줌 흙으로 사라지는 도로테아의 죽음과 내레이션은 숱한 유령들을 대변한다. “후안. 너를 찾은 후에야 안식할 수 있다.”

후안은 죄 많은 아버지에 대한 속죄양이다.

 

마을을 무덤으로 만든 페드로 파라모의 아내

페드로 파라모는 첫사랑 수사나를 찾아내 결혼한다. 그녀를 다시는 잃지 않겠다고 다짐한 페드로는 수사나에 대한 성폭력 정황을 보인 수사나의 부친을 살해하고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신적, 신체적으로 황폐해져 있다. 수사나는 페드로와 나눴던 사랑인지, 아버지에게 추행당한 죄의식인지 모를 애매하고 몽환적인 상태의 환영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수사나의 장례식은 곧이어 마을의 축제로 이어지고, 장례식과 축제, 죽음과 삶의 경계선은 다시 허물어진다. 페드로 파라모의 애처, 수사나의 죽음은 페드로에게 짓밟힌 민중들에게는 축제였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페드로는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럼 코말라 마을은 굶어 죽겠지”라며 끝까지 세상을 저주한다. 이는 악랄한 권력자, 페드로식 폭력이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마을에는 결국 유령만 남게 된다. 망부석이 된 채 의자에 앉아 늙어 갔던 페드로의 죽음은 한국의 2024년 12월과 닮아있다. 끝이고 시작이다. 장례식이고 축제다.

 

 

글·김 경
동국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수료 후 South Baylo University에서 한의학으로 석사, American Liberty University에서 한방정신분석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와 방송 프로듀서(PD)로 기획과 연출, 시나리오 작업을 했으며, 영화제 프로그래머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