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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재난의 형상으로의 몸과 다양체로서의 몸의 얽힘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재난의 형상으로의 몸과 다양체로서의 몸의 얽힘
  • 김장연호 l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3.10.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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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호의 <1984> 중 한 장면

‘21세기 한국대안영상예술의 궤적들’ 기획전이 10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화요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되고 있다. ‘1회. 포스트휴머니즘과 합성리얼리즘으로서의 몸’을 시작으로 ‘2회. 디아스포라 유물론’, ‘3회. 데이터로 전환된 기억, 추모 극장’, ‘4회. 젠더트러블과 수행성’, ‘5회. 아파트 공화국, 도시주름의 소멸과 망각’, ‘6회. 자기초상으로의 디지털, 무빙이미지의 확산’ 등 총 6회로 진행된다. 이 기획전은 1997년 IMF와 함께 신자유주의 체제에 돌입한 한국의 상황들을 대안적인 시각으로 제작한 디지털 영상예술을 소개하는 기획전이다. 2000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슬로건은 ‘새로운 예술의 해’로 당시 제3차 산업혁명과 함께 디지털 예술에 대한 기대로 사회적으로 고무된 시기이기도 하다. 

20세기 한국은 시네마토그래피(1895년 발명)나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인 소니의 포타팩(Portapak)(1965년 출시) 기술과 함께 종주국 문화도 그대로 수입했다. 그렇기에 당시 한국이 전 세계적인 영상문화의 흐름에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1982년 금성사에서 최초의 비디오카메라 GVC-6000이 개발되고 출시되면서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 게임과 함께 한국의 대중 참여 영상문화도 동영상으로 확대됐다. 1990년 중반, 한국은 기존 영상문화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디지털 캠코더의 대중화를 이루며 한국 정체성이 스며든 디지털 영상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즉, 다양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2000년대는 경제적으로는 1997년 IMF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래, 기술적으로는 디지털 환경,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목소리(신사회 운동-인권, 여성, 성소수자/젠더, 노동, 빈부, 지역)가 맞물려 작동한 시기다. 이때 디지털로 다양한 형상과 소리를 표현하는 ‘능동적 타자’의 출현을 알리는 영상예술이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한국의 대안영상예술은 새로운 매체에 등장하는 대안적 영상언어로 표준체계를 다중의식의 궤적으로 변주해 놓는 작품으로 말할 수 있다. 

특히 남성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던 필름, 즉 영화산업에서는 담아내지 못했던 여성 및 성소수자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서의 몸에 관해 사유하고 탐문하는 작품이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사회적인 문제를 몸에 비유한 정치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언어를 탐문하는 작품들도 많이 제작됐다. 유비호, 김세진, 한계륜, 양아치, 장지아, 김두진, 오용석, 최준범 등 디지털아트, 디지털 비디오 예술 1세대의 등장은 기존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중심으로 오브제 설치를 선보였던 비디오 예술 1.5세대 김구림, 육근병, 김해민, 오경화 등과 차별화를 두며 한국의 컴퓨터 예술의 서막을 열었다. 

디지털 비디오 예술 1세대의 작품 중 특히 2000년 전후에 제작된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한 한국의 전체화된 군대 문화, 표준체제에 대한 동일성과 획일화라는 근대성의 몸을 비판적으로 다룬 유비호의 <1984>(2000), <매스게임>(2000), 김두진의 <우리는 그들과 태어났다>(1997), <아놀드씨에게 안녕을>(2006), 한계륜의 <아, 아니뒤통수>(2006), <번개이동>(2020), 김세진의 <너무 먼, 너무 가까운>(1997), <상실>(1997) 등은 약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놀랄 만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1회. 포스트휴머니즘과 합성리얼리즘으로서의 몸>이란 부제로 소개됐다. 이들은 상영보다는 전시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관객의 자유로운 이동성에 염두를 두고 약 2분을 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번뜩이는 무빙 이미지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관객은 2분도 채 안 되는 찰나의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사유와 응축된 힘이 뭉쳐있는 결정체와 충돌한다. 

유비호는 군대식으로 전체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고 수행한다. 그렇기에 유비호의 작품에서 관객에게 다가가 충돌하는 이미지는 몸으로 현시된 전체화된 자본주의 체제 이미지다. 푸코의 논의처럼 권력체계는 실체가 없기에 권력체계를 이행해줄 주체를 생산해야만 한다. 오늘날 스펙터클 이미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근대화된 신체의 외형은 깔끔하고 날씬하며 호감을 줄 수 있는 동일화된 이미지다. 그러나 유비호는 검은 형체를 띤 괴물로 변한 이미지로 현대인을 표상하며 한국의 군대식 자본주의 체제의 형상을 가시화한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위생’과 ‘청결’을 내재한 신사와 숙녀의 이미지는 서구의 우월한 문명을 가시화하는 몸으로 표상되지만, 근대화는 근대화되지 못한 열등한 ‘원시의 몸’을 전시하는 인간 동물원(HUMAN ZOO)의 잔인함과 야만의 얼굴이 감춰진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유비호의 <1984>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멋지고 아름다운 형상 뒤에 숨겨진 괴물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김두진은 가부장체제에서의 섹슈얼리티에 순응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합성 이미지 효과를 활용해 출현시킨다. 젠더수행성을 갖지 않는 몸, 금지된 몸, 낙인화된 몸은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혐오 및 차별로 이루어지는 한국에서, 작가의 이런 수행성은 이분화된 몸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다. 여전히 한국은 여성과 남성으로만 이분화돼 1, 2, 3, 4라는 주민등록번호로 법적 성별을 지정하고 있으며, 간성(inter sex)의 존재를 묵인하고 다양한 성 정체성의 몸을 외면하고 있다. 김두진은 성별 이분법에 대한 대항이자,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경계화된 젠더 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김세진이 건드리고 있는 주제는 기억과 트라우마다. 세상과 맞부딪히는 개인의 경험은 실체가 없다. 개인의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기억을 논의한다는 건 장소에 놓인 물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너무 먼, 너무 가까운>은 실존하는 기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누구에게나 어제 있었던 일임에도 잘 기억나지 않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십 년 이십 년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어제 일어났던 사건처럼 장면, 사람, 색깔, 동작, 대화 등이 모두 기억나는 경우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특히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한 상처들은 무의식에 내재한 트라우마가 된다. 그렇기에 비슷한 상황들에 몸이 놓이게 되면 약간의 충격에도 무의식에 침잠해 있던 트라우마 장면이 깃털처럼 올라오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런 실체 없는 기억의 특징을 이미지로 표상화한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의 시기 서구의 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식민지 경험, 독재와 전체주의, 전쟁, 냉전체제,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획일화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지닌 몸을 지니게 된다. 특히 안토니오 그람시와 스피박이 논의했던 서발턴(subaltern)과 같은 이중 억압을 지닌 몸은 무의식에 수많은 정신적 외상이 침잠돼 있는 경우가 많다. 컨테이너 갤러리라는 임시 장소에서 개최된 개인전 ‘바래진 기억들_망각’에서 <너무 먼, 너무 가까운>과 <상실>이 동시에 전시됐었다. <너무 먼, 너무 가까운>이 실체 없는 기억을 표상화한 것이라면, <상실>은 기억의 사건을 제시한 것이다. 김세진은 한 한국 초등학교의 단상을 보여주는 짧은 단편 <상실>로, 근대식 학교에서 배우는 획일화된 학습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지는 몸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데이터로 전환된 기억, 추모 극장’에서 소개하는 상영하는 작품들은 환영 이미지가 아닌 실체화된 이미지로서 한국 사건을 몸으로 감각화한다. 오늘날 실체 없는 기억은 무빙 이미지가 돼 데이터로 소환된다. 기억이 데이터로 소환된다는 건 기억이 새로운 물질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용석(<classic no.1978>(2009), <classic no.1915>(2009), <소연, 소희>(2010)), 흑표범(<베가>(2016)),  안정윤(<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을 합니다. 제가>(2017)), 임혜영(<37m/s>(2016)) 등은 개인의 편린들로서의 기억뿐만 아니라 세월호를 기억하는 몸, 테러에 의해 사망한 지인과 미디어의 구경꾼이 된 성찰적 자아, 자본주의 체제에서 잉여 노동을 하는 예술가 동료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억의 몸을 다룬다. 

오늘날 현대인의 몸은 천성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약 300년 동안 지구의 생물들,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형체까지 길들이며 ‘인류세’라는 지질 시대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아무런 고민 없이 비닐 틀에 단단히 포장된 호박을 구매한다. 호박이 비닐 틀 안에서 가지런히 자라는 과정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과 무척 흡사하다. 

신유물론에서 행위자(Agent)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바이러스까지도 포함되는데, 자본주의 체제를 꿰뚫는 장치는 어쩌면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행위성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닐 틀도 호박도 행위자인 것이다. 신유물론에서 행위자는 인간은 물론 비인간, 바이러스까지도 다양하게 포함된다. 더 나아가보면, 비닐 틀이 없는 호박은 다양한 형체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시네마의 물질적 존재론 역시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행위성을 지닌 물질인 무빙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약 20여 년간의 한국 대안영상예술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간주의를 빗겨나간 디지털 영상예술 작품들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더 정교해지는 디지털 장에서 그 획일성을 교란시키는 방법은 비닐 틀이 없는 다양체를 지닌 호박일 수밖에 없다. 비닐 틀이 없는 호박과 마찬가지로 한국 대안영상예술 역시 다양체를 지닌 형상들이다. 그렇기에 들뢰즈의 논의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균열은 인간이 아닌 이런 행위성의 다양체적 역동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바라드는 서로가 얽혀있는 상태인 행위적 실재론을 통해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모두 서로 얽혀있고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무빙이미지라는 작은 단위의 다양체가 전 세계와 얽혀있어 견고한 스펙터클 이미지 장치와 연결돼 있다. 작품을 보는 관람객, 영화관, 전시관, 스크린과 매체, 대안영상예술이 끊임없이 서로 얽히며 다양체의 흐름들을 연결해나간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앞으로 호박은 과연 어떤 형상을 가질 수 있을까. 

 

 

글·김장연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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