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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떠난 탈북인의 7년 만의 서울 방문
프랑스로 떠난 탈북인의 7년 만의 서울 방문
  • 김혜성 | 탈북작가, 재불 한인
  • 승인 2024.08.3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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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 변했지만,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나’였다!”
7년 만에 한국을 찾은 필자가 북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별 중에서 가장 끔찍한 이별은 ‘생이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 보면 숱한 이별과 만남을 겪는다. 만남은 수도 없이 이루어지지만 감정의 변화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별은 다르다. 이별은 늘 쓸쓸하고 서운하고 애잔한 감정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이별은 아마도 ‘생이별’이 아닌가 싶다. 서로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어떤 물리적인 강제로 인해 만남이 가로막혔다면 그건 정말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 탈북민들이 놓인 상황이다. 부모 형제, 가까운 핏줄들이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있는데 만날 수 없다는 것,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지만, 남의 나라 사람들이 보기엔 아주 괴이하고 이해가 안 되는 남북한의 상황… 그게 분단이 주는 현실이다.

 

내 고향을 더듬을 수 있는 그곳 서울, 7년 만의 익숙하지만 낯선 귀환

나를 실은 서울행, 아니 다시 말하면 인천행 비행기가 서서히 착륙 준비를 하면서 지면과 가까워졌다. 반도의 특성인가. 앙증맞은 섬들이 바다의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산, 띄엄띄엄 자리 잡은 도시와 마을의 모습들, 그 속으로 돌돌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산천초목이 익숙했다. 프랑스는 산천초목이 다르다. 낯설고 이국적인 그것들의 모습은 찬란하게 아름다웠지만 나에게 사시사철 서늘한 감정을 안겨줬다. 내가 느꼈던 그 서늘한 감정은 생이별을 당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남겨진 자들에 대한 미안함 등 내가 살아있기에 느끼는 오만가지 감정들의 집합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산천초목의 모습들이 나에게 익숙하다. 그것들은 내 고향 땅의 모든 것들과 닮았다. 그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내 땅에 내가 찾아왔구나!’ 하는 그런 안정감 말이다. 한국은 내가 살아서 다시는 밟을 수 없는 38선 너머의 고향 땅 모든 것들을 내 손으로 직접 더듬어서 만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한국의 편리함, 그리고 노동자

인천공항, 수많은 인파들에 뒤섞여 입국 심사대로 향하는 길, 번쩍번쩍 윤기를 내며 빛나다 못해 잘못 밟으면 미끄러져 버릴 것 같은 공항 바닥이 한국 사람들의 직업에 대한 근면 성실성을 입증해 주는 것만 같았다. 프랑스에서는 엘리제 대통령궁에 가도 이것보다는 덜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한글이 읽혔다. 내 머릿속에 번역기를 돌리지 않아도 모든 뜻이 선명하게 내 피부를 뚫고 와닿았다. 역시 내 땅! 알파벳을 안 읽어도 되니 속이 다 시원했다.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문화’답게, 속도전으로 나의 입국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내가 들어가 앉아도 될 법한 큰 트렁크를 끌고 이리저리 길을 찾아 헤매는 나를 인천공항 직원은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

깨끗한 지하철, 화장실, 스크린도어, 어딜 가든 반짝반짝 빛나는 바닥과 청결함은 나에게 편리함보다는 청소노동자들을 생각나게 했다. 한국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은 진짜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공공장소의 화장실이 내 집 안방의 화장실만큼이나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이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는 공공장소 어딜 가든 프랑스답다. 길거리에는 어딜 가다 개똥이 굴러다니고,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정말 달랐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만큼 편리했다. 오랫동안 한국의 민간은행을 이용하지 않아 카드가 안 됐다. 직원과 사전 약속을 따로 잡지 않아도, 모든 것이 은행 창구에서 즉석으로 처리되는 편리함은 감탄사를 자아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주문하면 내일 바로 배송되는 택배 서비스, 휴대폰으로 온갖 음식들을 주문하는 배달 문화, 몇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주문해도 함께 딸려오는 친절한 미소와 서비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한국에서 제공받을 수 있는 모든 서비스 그리고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늘 그 뒤에서 고객 맞춤형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고 움직이며 이 모든 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력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돈으로 물건값을 지불했다고 해서 이토록 빠르고 편리하고, 그리고 함께 묶여서 오는 미소 서비스들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프랑스에서 노동자는 고객이고, 고객도 노동자다. 그러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은 어떠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기 전에 어딘가의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늘 기억한다. 내가 오늘 제공받는 편리함은 내가 노동자로 일할 때에는 몇 배로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고객의 입장에서 제공받는 서비스는 나에게 한순간의 기쁨을 안겨줄 수 있지만, 나는 반대로 나를 이용하는 고객에게 받은 만큼의 친절함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낸다. 즉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고객으로서 찰나의 불편함과 느림을 감수할 수 있다면, 나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도 그럭저럭 스트레스 덜 받으며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탈북민들의 현실

한국에 갈 때마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나를 맞아 주는 S언니가 있다. S언니는 내가 스무 살 햇병아리 시절, 애정에 목말라서 허둥거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나에게 곁을 내주고 지켜주던 언니였다. S언니는 참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S언니를 처음 만난 건 스무 살 무렵 교회 청년 수련회에서였다. 당시에 강원도로 갔었는데 같은 북한 출신 언니가 있다고 교회 사람들이 소개해 줘서 처음 만났다. 북한 여자들은 키가 좀 작다. S언니도 아담한 키에 예쁜 레이스 장식에 머리가 긴 만화 주인공 사진이 프린트된 화려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웃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 언니의 레이스 잠옷에 프린트된 공주님이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긴 생머리에 고운 얼굴, 웃는 모습마저 수줍고 순수해 보이는 그런 공주님 말이다.

그런데 그 언니가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는데 걸음걸이가 이상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 고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 유심히 살펴보니 언니의 정강이를 가로지를 만큼 큰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큰 흉터가 언니의 걸음걸이를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잖니? 그게 중요한 거지.”

언니는 열여덟 살 때 청년돌격대로 검덕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언니는 북한에서 사는 여느 소녀들처럼 평양을 마음속으로 그리던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가족들이 평양에서 살았었는데 어떤 사정에 의해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청년돌격대로 자발적으로 지원하면 평양에서 일할 수 있다는 북한 당국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 버렸다.

언니는 장군님이 계시는 ‘마음의 고향’인 평양으로 간다는 부푼 꿈을 안고 청년돌격대 군복을 입었건만 그들을 태운 기차의 종점은 함경남도 단천군의 심심산골에 있는 검덕광산이었다. 검덕에는 대흥광산이라고 있는데 마그네사이트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검덕은 대한민국이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 중에서 북한의 대표적인 광물자원 매장 순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광산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북한 젊은이들이 피눈물을 머금고 마그네사이트를 캐고, 북한 당국은 이 광물들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북한은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농경 사회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북한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소로 밭을 매고, 방아로 벼를 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회주의도 산업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북한도 국가 주도로 산업화를 이루어보려고 시도는 했지만 실패하고 맨손에 곡괭이나 삽을 들거나, 일제가 남겨 놓고 간 설비들을 보수하거나 자력갱생한다고 하며 뜯어고쳐서 재사용하는 수준이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북한의 광산 설비들이 노후화는 말할 것 없고 전기 사정이 여의치 않아 광물 원석을 실은 광차를 사람 손으로 밀어서 이동시키곤 한다. 빈 광차가 비탈길에서 산 밑으로 브레이크도 없이 맹렬하게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고, S언니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달려오는 광차에 치였다.

시퍼런 쇠붙이 광차는 열여덟 살 소녀의 예쁘고 말랑한 다리 위를 사정없이 짓이겼다. 의식을 차려 눈을 떴을 때는 함경북도 청진의 도립 병원 침상에서 누워서였다. 그렇게 몇 년을 침상에서 고생을 했다. 북한의 병원 설비들은 재래식이고, 약품은 만성적으로 부족하다. 병원비는 없다고는 하나, 약값은 100퍼센트 환자 개인 부담이다. 그래도 언니는 의사들과 병원 관계자들 그리고 돌격대 상사들의 도움으로 북에서 구하기 힘든 약품들도 써 보고, 음식도 공급받고 책도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장애를 얻게 된 언니를 안타깝게 여겼다. 언니는 고마운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언니는 그때 얻은 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신세다.

내가 언니한테 물었다. “언니! 북한 지도부가 괘씸하지 않아요? 언니는 북한에서 평생 장애를 얻었잖아요? 예쁜 언니가 이렇게 다쳐 너무 안타까워요.” 언니는 대답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잖니?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살아남았잖니. 그게 중요한 거지.”

S언니는 자영업자인데 장사가 잘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한국으로 갈 때마다 맛집들을 데리고 다니며 밥을 사준다. “간장게장 먹으러 가자. 진짜 맛집이야. 먹고 가. 그래야 내가 마음이 덜 아프지.” 그래서 쫄랑쫄랑 언니 뒤를 따라가서 간장게장을 맛있게 먹었다. “언니야. 그 집 진짜 맛집이더라.” 지금 프랑스에서 이 글을 쓰는데 아직도 내 입에선 간장게장 맛이 느껴진다. 벌써 그 언니가 보고 싶다.

 

메마르고 척박한 대지에 선 나에게, 곁을 내주고 남아준 귀인들

S언니는 얼마 전에 남편이 사기를 당해서 형편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언니 남편은 나도 아는 지인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도금기술을 배워 가전제품들에 도색을 입히는 일을 전업으로 했었다. 한국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공장들이 대거 베트남으로 이전하면서 원래 일하던 업종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다가 크게 사기를 당했고 현재는 욕실에 타일을 까는 일을 전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언니는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도 나를 그토록 배려한 거였다.

나는 많이 받고 산 사람인 것 같다. 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다. “혜성아, 너는 부모 복은 없는데 인복은 많다. 길만 나서면 네 주위에 그렇게 귀인들이 많다는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 말이 맞다. 내 인생에는 수많은 귀인들이 있었다. 메마르고 척박한 대지에 맨몸으로 서 있었는데 그래도 다가와 곁에 있어주고 남아주고 베풀어주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종잇장 한 장 없이 대륙의 한복판에서 팔려가다가 도망쳐서 산길을 헤맸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름 모를 첩첩산중에서 어떤 중국 아저씨를 만났다. 그 아저씨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 두 조선 여성을 차에 태워 한국어 간판이 적혀 있는 도시에 내려줬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겠다고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대한민국 대사관에 자주 접속하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을 때도 공안 경찰관은 나를 북한 아이인 걸 알면서도 풀어줬다. 그 아저씨는 끝까지 중국 조선족 아이라고 우겨대는 내 얼굴을 보며 “내가 너 조선 아이인 거 다 안다. 네가 똑똑해서 살려주는 거다. 살아남아라”라고 하면서 중국 돈 50원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나를 경찰서 정문에서 내보냈다. 그들은 나에게 이름 세 글자도 남기지 않았지만, 난 내 인생의 귀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다들 잘살고 있을까? 나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손에 넣었지만, 또 그것 못지않게 중요했던 소중한 많은 것들을 잃었다. 내 부모, 동생, 그리고 나의 고향.

 

보이는 평범 속에 감추어진 지나온 삶

또 불쑥 내 삶에 찾아든 인연 J언니. 대학 때였다. 여느 젊은 남녀들처럼 나도 연애라는 걸 했다. 혼자 벌어서 먹고살며, 치열한 경쟁 속에 단련된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공부하느라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그래도 젊음은 좋은 거라 그 와중에 연애라는 것도 했다.

20대 시절 나는 영악한 애였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손해 보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빨리 적응한 편이었다. 중국에서 그 모진 고생들을 겪어내고 지쳐버린 심신을 보듬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한국식 경쟁 시스템은 ‘적응’이라는 낯선 단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스파르타식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랬더니 나는 한국 사회를 굉장히 빨리 받아들였다. 나의 감정보다는 사회적인 잣대가 우선시 되었다. 나를 돌보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해냈다. 나는 그게 적응이라고 생각했다. 나처럼 청소년 시기에 홀로 넘어온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하나둘 탈북 남자들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남한 남자들과 급하게 선을 봐서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의지할 데가 필요했다.

나는 그 친구들을 남한 사회에 적응을 못 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는 나의 연애관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20대의 느끼는 풋풋하고 애정이 감도는 사랑보다는 이성의 진로나 사회적 배경들을 우선시하는 지경까지 갔다. 한 남한 친구가 말했다. 그런 사고는 천박하다고… 나는 그 친구에게 말했다. 그런 너는 솔직하지 못하다. 너는 체면이나 사회적 배경 따위를 고려하지 않는데 서울대 남자랑 연애하고, 이 사회에는 계급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냐고 술자리에서 면박을 줘서 관계를 서먹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사고로 남한 사회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나의 곁에서 묵묵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십수 년 넘게 내 곁에 남아 있는 J언니 또한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한국에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하다 보니 마땅한 연락수단이 없었다. 전화도 쓸 수가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그날 바로 J언니의 집을 무작정 찾아갔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던지라 언니는 집에 있었다. 나는 J언니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언니네 집 출입문을 부숴버릴 듯이 두드렸다. 언니는 내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더니 맨발로 뛰어나와 어린아이처럼 퐁퐁 뛰며 반겨 줬다. J언니는 나의 대학 시절 파란만장했던 연애 스토리를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성격과 가치관, 야망들을 내 남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언니다.

J언니와 고향 음식으로 저녁을 푸지게 먹고 언니와 대학 때 같이 찍은 사진들을 봤다. 정작 나는 대학 때 나를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나는 나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시간조차도 없었다. 친구들이 찍어서 보관해뒀던 사진들을 가끔 보내와서 받아서 보면 나의 눈빛이 다르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눈빛 속에 어딘가를 갈망하는 야망만 가득 찬 그 눈빛…

J언니는 북한의 고운 처녀들이 겪는 설움을 그대로 인생에 녹여 냈다. 그리고 그 대가를 현재도 감당하고 있는 언니다. J언니는 한국의 여배우 송혜교를 닮았다. 언니는 눈이 둥글고 큰데 특히 눈동자가 크고 검다. 입술 선은 선명하고 도톰하고 입술색도 빨갛고 찐하다. J 언니는 누가 봐도 미녀라고 할 정도로 조선의 미녀 상의 얼굴이다.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은 예쁘게 태어나면 좋은 줄 알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힘없는 집안의 미녀로 태어난 것만큼 저주받은 인생도 또 없을 것이다. 언니는 23살 때 북한을 떠나 인신매매에 노출이 되어 팔려서 중국으로 갔다. 그때는 언니 같은 선택을 하는 북한 여자들이 많았다.
예쁘고 나이 어린 수많은 북한의 여성들이 인신매매로 중국 농촌 남성들에게 헐값에 팔려갔다. 한 남자를 위해 팔려간다면 운이 좋았던 편에 속하고, 운 나쁘면 젊음이 다 하도록 남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J 언니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해 조선족 남성에게 팔려가 아이를 하나 낳고 살았다. 죽은 사람의 호적을 사서 중국 국적을 만든 후 사업을 시작해 한때 성공을 한 적도 있었지만 불안한 신분 때문에 늘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그러다가 남한으로 왔다.

언니는 남한에 와서 늦깎이 대학생으로 한국의 명문대에 진학했고 그 어린아이들 틈에 꿋꿋하게 버텨내 대학 졸업장을 땄다. 언니는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근면하게 성실히 노동을 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 중국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보냈다. 비록 원치 않았던 남자와 결합해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였지만, 언니는 자식을 본인보다 더 사랑했고 엄마의 책임을 현재까지 지고 있다.

J언니. 내가 처음 언니를 만났던 때가 스물세 살 때였으니 J언니는 지금 내 나이 즈음이었을 거야. 나는 내가 아직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내가 북한의 울 집 대문을 열고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어설프게 떼던 그때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그런데 언니는 긴 시간 동안 ‘친한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곁을 내줬다. 늦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나에게 주섬주섬 냉동실 안에 소중하게 보관해뒀던 북한 명태와 북한 순대를 꺼내 놓으며 활짝 웃던 언니 모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언니는 현재 마음씨 좋고 인품 좋은 한국 출신 남자와 연애도 하고 있고 또 안정된 회사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우리의 한이 서린 고향, 그러나 그리운 고향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맞는 주말, 전화벨이 울렸다. J언니는 집에 누워만 있기는 아까운 시간이라고 하며 당장 내려오라고 했다. 언니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함께 나를 차에 태우고 임진각을 향해 달렸다. 언니는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고향 바람이나 쐬다 가라고 했다. 언니와 함께 임진각으로 가던 길에 파주에서 먹은 생선구이는 내 인생에서 먹어본 생선구이 중에 최고로 맛있었다.

한 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저 식당 안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에서는 ‘천상의 맛’이 날 거라 비아냥거리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임진각에서 고향을 그리며 “고향 바람 느낌이 나냐?”라고 묻던 언니… 나는 대답했다. “언니 나는 고향 바람을 알아. 우리 고향에서 맞던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을 품은 그 바람맞아. 시원하다…”

J언니와 함께 방문한 임진각에서 언니가 끊어준 입장권 세 장을 비행기를 태워 프랑스로 가져왔다. 만 리 타향에서 그 티켓을 통해서라도 내 고향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해외에서 살면서 고단한 마음 고향 음식으로 달래보겠다고 바리바리 챙긴 한국 음식 보따리를 화물칸에 실어 보내면서 언니와 함께 방문한 임진각에서 받은 입장권 세 장을 대한민국 여권과 함께 내 손에 꼭 움켜진 채 프랑스로 왔다.

 

“너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

J언니와 함께 차 안에서 “우리는 살아서는 고향으로 다시 못 돌아갈 거야. 이 길로 올라가다가 인민군이 내려오면 우릴 제일 먼저 죽이겠구나.” 언니는 말했다. “너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 “우린 뭐 때문에 도대체 뭐 때문에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이겠다고 싸우고 있는 걸까?” 나의 공허한 질문만 차 안을 맴돌았다. 아무도 적당한 대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전경이 우리 앞에 펼쳐지자 나는 말했다.

“J언니, 나 모기지가 20년 남았어요. 아까 북쪽으로 갈 때는 인민군이 생각나더니, 내 눈앞에 서울이 보이니 갑자기 부동산 모기지가 생각나네… 젠장! 다 갚으면 우리는 이렇게 자본주의에 적응했다. 환갑되겠네.”

그래도 고향은 여전히 고향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만날 수 없고 소식도 들을 수 없는 혈육에 대한 애정은 뭉뚱그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할 것 같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라면 ‘고향’이라는 이름 두 글자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라리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든다.

 

“하나는 내 거, 하나는 언니 거”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 남한 출신 y동생.

나는 내 인생에 큰 의미를 남길 사람들은 북소리 장구 소리 요란하게 내며 등장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소리 없이 나의 인생에 뛰어들었다. y동생을 처음 만난 건 아마 학부 시절 ‘글쓰기 수업’에서였다. 학부 필수과목이라 어쩔 수 없이 수강해야 했었는데 인기 있는 교수들의 수업들은 이미 동이 난 상태라 자리가 많은 수업 중에 아무거나 클릭해서 수강신청을 했었다. 그 수업에 y동생이 있었다. 

글쓰기 수업의 특성상 나의 인생 이야기들을 글로 쓸 때가 많았었다. 글을 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북한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친구들은 내 글을 읽고 비난도 하고,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의견을 피력했었지만, y동생만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몇 년이 흘러 y동생을 전공 수업에서 다시 만났다. 고대사 수업이었는데 전공필수였지만, 교수님이 깐깐하기로 유명해 늘 수강생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교수님께 열광하는 ‘팬’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중에 나와 J동생도 속해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 공부보다는 일을 더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 준비는 늘 부족했었다. 그날도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내 노트에는 글자도 몇 글자가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염치를 불고하고 y동생에게 노트를 좀 보여달라고 했다. y동생은 “언니, 며칠만 기다려요. 지금은 내 노트를 언니가 알아볼 수가 없을 거예요. 다음 수업 시간까지 싹 다 정리해서 가져올 테니… 며칠만 기다려요.”라고 했다. 나는 사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몇 번 동급생들에게 노트를 보여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과 나는 경쟁자인데 어떻게 노트를 빌려달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남한 출신인 그 친구가 본인의 노트를 보여주지 않을 핑계를 댄 것으로 생각하고 깔끔하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수업 시간에 제일 먼저 도착한 y동생이 핵심 요점들만 잘 정리해 깨끗한 A4 출력지 2부를 출력해서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을 내 앞에 쑥 내밀며 “하나는 내 거, 하나는 언니 거”하면서 나눠줬다. 덕분에 나는 그 수업에서 대학에 입학해서 최초로 A를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가까워졌다. 대학 시절 자주 만나 시청에서 만나 신촌까지 걸어서 이동해 학교 앞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켜며 이야기를 나눴다. y 동생과는 싱가포르 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y동생과는 대학 시절 내내 걸어 다닌 기억밖에 없다. 이야기를 참 많이도 나눴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y동생이 고시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졸업하던 당시 2014년은 문과 졸업생들은 거의 취업이 안 됐다. y동생도 문과의 취업 한파를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내가 가장 아끼는 y동생을 응원할 수도, 그렇다고 만류할 수도 없는 방관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y동생은 근 5년 정도를 고시 준비를 했지만 끝내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핸드폰이 개통되자마자 가장 먼저 y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신호가 두세 번이나 갔을까? 화들짝 놀라며 내 이름 뒤에 언니를 붙여 부르는 y동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한국 왔어요? 언니……”

수화기를 통해 괴성이 반쯤 섞인 반가움에 사무치는 y동생의 목소리를 통해 얘가 나를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곧바로 그날 저녁에 만났다. y동생과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본인이 했던 노력과 현실, 그리고 본인과 같은 루트를 따라 성공 궤도에 오른 동기들과 사회적인 시각 안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y동생이 누구보다 따듯한 사람이라는 거 잘 안다. y동생은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고 했다. 요즘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조차 이성의 배경을 그 어느 때보다 자세히 따지는 시대라고 했다. 나는 y동생이 본인만의 행복을 찾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다.

y동생은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렇게 연세대학교에 입학했고 가족과 지인들의 기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 기대들이 어쩌면 현재 y동생을 늪으로 빠뜨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행복들이 존재하는데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 누구나 선망하는 직장, 물질, 그리고 사회적인 명예가 우선시 되는 것 같다. 프랑스 사람들도 사회적인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엄연히 있다. 하지만 적어도 프랑스 사람들은 사회적인 잣대가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행복을 침범하게 그냥 두지는 않는 것 같다.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닌 탈북민들

우리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한 지가 이제 20년이 되어간다. 언론이나 사회에서는 탈북민들이 약자라고 하지만, 내가 만난 탈북민들은 이제 더 이상 사회적인 보호가 필요한 약자들이 아니었다.

S언니의 소개로 만난 M언니는 투자로 큰 성공을 거둬 브랜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언니는 하루에 12시간씩 주 6일 노동을 했고, 남편은 타일 붙이는 기술을 배워 팀을 꾸려 개인사업을 하고 있었다. 막노동 일이라는 게 사회적인 편견은 있어도 수입은 정말 많다고 했다. 그만큼 일은 힘들다고 했다. 그들은 정직하게 노동하고 아끼고 모아 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젠 집주인, 가게 주인이 탈북민 출신인 사람들이 보일 정도로 한국 사회에 잘 녹아들고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냥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자칭 탈북민 사회의 마당발인 S언니를 통해 고향 사람들의 얘기를 전해 듣는다. 자가를 소유했다는 사람들은 이제 흔하고, 부동산이나 혹은 주식, 비트코인과 같은 곳에 투자해 적지 않은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탈북민들이 이룬 경제적 풍요,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없는 현실

경제적인 풍요를 이뤘지만 아이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돌봄이 필요했던 아이들은 스크린에 몰입했다. 긴 노동시간에 지친 부모들은 아이들과 대화를 할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프랑스 아이들에게 “하루 중에 어떤 시간이 제일 행복하냐”라고 물으면 저녁에 부모와 대화하는 시간이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프랑스 가정들에서는 아이들과 부모가 저녁 시간 한 식탁에서 모여앉아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장시간의 육체노동에 시달린 부모들은 쉬고만 싶을 뿐 자녀들과 돈독한 유대를 만들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나의 북한 이모는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때 이모 나이가 서른 무렵이었다. 이모는 배움이 짧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욕심을 애초에 내려놓은 채 최저시급 3000원이었던 때부터 늘 공장에서 일했다. 그렇게 이모는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 최저시급이 만 원을 웃도는 현재까지도 공장에서 일한다. 이모는 하루에 열두 시간, 일주일에 딱 하루 쉬면서 개미처럼 일했다.

이모의 인생에서 딱 일 년 쉬는 시간을 가진 적 있었는데 내 사촌 동생이 혈액성 소아암 판정을 받아 항암치료를 받던 시기였다. 그 시간을 빼고는 이모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이모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다. 큰 컵에 냉수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식구들이 먹을 아침을 준비한다. 씻고 준비하고 여섯 시 반이면 집을 나선다.

이모는 공장으로 향하는 통근버스에 몸을 싣고 1시간을 이동해 출근한다. 이모는 잔업을 포함해 근 12시간을 일하고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퇴근한다. 그렇게 일 년 열두 달, 이십여 년 동안 노동한 결과 얼마 전 청주 시내 브랜드 아파트를 빚 한 푼 안 내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모는 아파트를 매입한 후에도, 그동안 몸에 밴 일상의 패턴대로 개미처럼 일을 계속한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적응,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바로 ‘나’였다

7년의 해외 생활을 하고 다시 찾은 서울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빈틈없이 들어찬 건물, 빼곡히 씌어 있는 간판들, 번잡한 길거리, 넘쳐나는 인파… 서울의 겉모습은 더 번지르르하게 변했다. 하지만 S언니, J언니, 그리고 y동생, H언니, 나의 이모 등 서울 속에서 살고 있는 내 친척과 선후배들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했다.

변변치 않은 나를 버선발로 반겨 주었고, 진심으로 환대해 주었다. 정작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나였다. 십 대 후반에 고향 땅 북한을 떠나, 남한에서 근 10년을 살았고 또 새로운 터전인 프랑스에 정착을 했다. 내 인생은 변화로 가득 차 있었다.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적응하며 산다는 게 쉽지 않았다. 새로운 땅, 새로운 문화권에 적응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 스스로도 내가 북한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아니면 프랑스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때도 있다. 이렇게 몇 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보니, 나는 북한에 고향을 둔 한국인이었으며 한국 땅에 발붙일 때가 내 마음이 가장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 S언니, J언니, 그리고 y동생… 나의 삶에 불현듯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이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다. 우리네 삶이 쉬운 인생은 없다고 다들 말한다. 인생이 즐거움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었겠나 싶기도 하고, 인생이라는 게 끔찍하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어젯밤 한바탕 꿔댄 꿈처럼 모든 게 흐릿하다.

 

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열정을 꿈꾸고, 균형된 삶을 추구하며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을 삶이라는 이름으로 겪어냈기에,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내가 만들어가는 오늘 하루하루가 소중한 순간들이라는 걸 잘 안다.

유럽은 정신적인 풍요, 그리고 물질적 풍요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 프랑스는 곧 휴가 시즌 바캉스 계절에 접어든다. 사십여 일의 유급휴가, 우리 가정은 남편의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구글 지도에서도 잘 안 나오는 함경북도 새별군의 심심산골 오지에서 태어난 내가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살고 이탈리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럽 축구 챔피언스리그를 보느라 식당마다, 바마다 매일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북한 출신 아줌마는 이탈리아에서 현지 축구광 아저씨들과 오늘이 다시 안 올 것처럼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열광하고 오겠다고 벼르고 있다.

 

 

글·김혜성
2004년 16세에 탈북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연세대 인문학부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2017년 프랑스인을 만나 결혼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프랑스인 남편,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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