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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저커버그에게 존재론을 가르치는 이유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커버그에게 존재론을 가르치는 이유
  • 안치용 l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 승인 2021.12.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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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한 분야를 지칭하기도 하고 때로 철학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이라는 용어는,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한다는 게 정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문·기상·동식물·심리 등에 관한 연구를 자연학(自然學, physica)이라 하고, 자연학을 먼저 학습한 다음에 연구하는, 모든 존재의 근본원리를 고구하는 학문을 제1철학이라고 불렀는데, 이 제1철학이 후대에 형이상학(메타피지카·Metaphysica)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된다. 

흔히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같은 용어로 받아들여지는 배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형이상학’의 작명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B.C 1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 안드로니쿠스(Andronicus of Rhodes)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편집하며, 제1철학 성격의 일군의 문서를 ‘자연학에 관한 책 다음에(Ta meta ta physica biblia)’ 배치하면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탄생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 문맥에서 ‘메타(Meta)’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넘어서는’ ‘초월하는’ 등의 의미와 결을 달리하며 ‘다음의’라는 평범한 뜻으로 사용된다. 그저 순서를 뜻하는 게 아니라 ‘Ta meta ta physica’가 상승을 통한 다른 차원으로 이동을 의미한다는 해석 또한 강력하게 존재했다.

 

太初有道

동양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는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를 기(器)라고 한다”는 <주역>의 말과 ‘Ta meta ta physica’를 연관지어 성립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다. ‘말씀’은 당시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한 ‘로고스(logos)’를 말한다. 로고스가 당연히 말씀을 뜻하지만, 논리 이법(理法)이라는 다른 뜻으로도 활용되며 궁극의 존재를 지시하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니, 로고스를 무슨 뜻으로 썼는지가 저절로 드러나는 셈이다. 중국 성서에서 같은 구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太初有道、道與 神同在、道就是 神”

로고스가 곧 도(道)다. 도(道)는 하나님이니,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道)라고 한다는 주역의 인용문과 연결하면 ‘도=하나님=형이상자’다. 형이상학은 따라서 신학과 등가를 이룬다고 말해도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제1철학이라는 용어를 쓴 만큼 비록 그가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형이상학이 근본과 최종원리, 혹은 신학과 맞닿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따라서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동의하듯 ‘ta meta ta physica’의 메타가 애초에 단지 ‘다음’이라는 순서의 개념이었겠지만, 내용상 ‘너머’란 초월의 개념을 갖게 된다. 이리저리 돌아오는 과정을 거쳤으나, 형이상학이 너머에 관한 학문이라는 정의에는 변함이 없다.

이때 메타가 단순히 넘어서거나 초월하는 것만을 뜻한다고 받아들이면 미흡하다. 넘어서려면 경계가 획정돼야 한다. 메타는 넘어섬이지만 넘어섬은 반드시 무엇을 넘어서는 것이다. 무엇인가 넘을 것이 없는 넘어섬은 없다.

이런 맥락은 동양과 서양에서 동일하다. physica 이후에 metaphysica가 있다는 생각이나,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를 구분한 것에서 메타에는 자연(自然) 혹은 형(形)이라는 전제가 성립함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피지카와 메타피지카의 선후가 제시된 것과 달리 <주역>에선 도(道)와 기(器)로 동시에 기술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 차이라고 단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선후는 공부와 연구 대상의 선후이고, 주역의 동시성은 존재의 동시성을 뜻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최근 회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바꾼 저커버그

메타버스와 멀티버스

기후위기 및 4차산업혁명과 함께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다음’을 상징하는 키워드로 ‘메타버스(Metaverse)’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주목받는 IT용어의 하나인 메타버스의 단어 조성은 메타피지카와 동일하다.

널리 알려졌듯 메타버스는 ‘메타(Meta)’와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메타피지카가 피지카(자연)의 세상을 넘어서는 것처럼 메타버스는 유니버스(현실세계)를 넘어선 특별한 세상이다. ‘가상세계’라는 표현은 부적절한 것이, 메타버스는 현실세계의 연장이자 확장의 성격을 지닌다. ‘형이상(形而上)’이 ‘형상(形上)’이 아니라 ‘형이상(形而上)’인 것과 마찬가지다. ‘형이상(形而上)’의 ‘이(而)’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은 물론 메타버스를 설명하는 데에서 필수인 글자이자 개념이다.

유니버스를 넘어서는 개념으로는 메타버스 말고 ‘멀티버스’라는 게 있다. 천체물리학에선 이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멀티버스 개념을 이해하려면 유니버스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유니버스는 라틴어 Universum에서 유래했으며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Universum의 조성은 ‘Unus+Verto’인데 Unus는 하나, Verto는 돈다는 뜻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다면 Unus를 신으로 상정해 이 말이 신적인 세계를 시사했다고 상상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키케로는 예수 탄생 이전의 인물이다. Universum에 관한 키케로의 의중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세계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우주에 대응하는 단어로는 유니버스 말고 코스모스가 있다. 코스모스(Cosmos)는 카오스(Chaos)와 대칭구조를 이룬 단어이며 고대 그리스 세계관을 담았기에 유니버스와 뉘앙스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특히 현대 천체물리학이 멀티버스란 말을 쓰게 되면서 지금의 우주를 설명하는 데에는 코스모스보다 유니버스가 더 적합해졌다. 혼돈과 질서가 대립한다기보다 ‘카오스모스(Chaosmos)’라는 극적인 표현에서 드러나듯, 혼재한다면 카오스모스인 유니버스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는 생각.

멀티버스는 우리의 우주 말고 수없이 많은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개념이어서 우리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지구 밖 지적 생명체의 존재에 대해서, 존재는 거의 확실하지만 발견 혹은 소통은 아직 어렵다는 게 천체물리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아직 외계인(E.T)도 못 찾았는데, 우리 우주 말고 다른 우주라니.

메타버스를 멀티버스와 비교하자면, 주로 용어 때문이겠지만 (인간 중심의 사유에서는) 메타버스가 높이를 더 구현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실제로는 두 개념 사이에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메타의 세계‘가 멀티버스다. 우리에게 멀티버스는 개념에 불과한 반면 메타버스는 분명 또 다른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에 체감도 측면에서 메타버스의 높이가 더 가깝게 느껴질 따름이다. 

 

메타버스의 핵심은 메타가 아니다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이 사명을 ‘메타(META)’로 변경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2021년 10월 28일 연례 개발자 행사에서 공식 사명을 ‘메타 플랫폼’으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창업자 저커버그가 2004년 하버드대학 재학 중 페이스북이라는 서비스를 시작한 지 17년 만에 사명을 변경한 것이다.

현재 본업인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메타버스라는 블루오션으로 한 단계 도약하겠다는 의미가 사명변경에 담겨 있다. 사명변경과 함께 회사의 로고가 바뀌었지만, 소셜미디어서비스에서의 페이스북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된다.

저커버그는 이날 “데크스톱에서 웹과 전화로, 텍스트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옮겨 갔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며 “우리는 메타버스가 모바일 인터넷을 잇는 대세가 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우리 회사가 메타버스 회사로 인식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세계 IT업계의 공룡에서 목격되는 ‘메타(META)’와 ‘메타 플랫폼’이라는 말은, 울음 우는 아이가 그러하듯 아무튼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간을 신과 더 가까운 존재로 만들까, 아니면 또 다른 바벨탑 쌓기에 불과할까. 바벨탑 쌓기의 결과는 몰락과 붕괴, 희생과 분열이었다. 

자본주의와 합체도를 높여가며 진행되는 작금의 4차산업혁명의 급류에서 적당한지 모르겠으나 창세기의 바벨탑 우화가 연상된다. 다음 세상이 순리의 다음 세상이 아니라 탐욕과 통제의 형이상학이라는 악몽이 되지 말란 법이 없을까. 형이상학은 한편으로 존재의 해명이라는 숭고한 탐색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통제와 억압의 철창이었다. 

자본주의에 기반한 ‘메타 세상’은, 메타의 불확실성에다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더해지며 인류 최악의 참극을 예비할 수 있다. 하긴 기후위기로 빙하가 녹고, 북극곰이 익사하고, 각처의 해안지대가 방대한 규모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어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는 세상의 가능성 또한 없지 않은데, 그 정도 참극은 이야깃거리도 못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를 떠올리게 되며, 더 중요하게는 ‘자연’이라는 단어를 상기하게 된다. 페이스북이 메타로 넘어가는 것과 관련해서, 메타버스의 세상이 도래하더라도 그래도 근본은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발상일까. 그래도 형이상학은 마침내 인간을 위한 개념이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 인간을 위한 개념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원래 존재론이라는 말을 쓴 것처럼, 이 시점에서 메타버스의 핵심 또한 유니버스임을 기억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 그런데 누가?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같은 주제로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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