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평균 기온은 54도, 체감온도는 73도를 넘었으며 공기는 이미 미세먼지로 가득했다. 김기창의 소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에서 묘사하는 미래의 지구다. 사람들은 타개책으로 거대하고 단단한 돔(Dome)을 만들었고, 이 벽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돔시티’의 안전을 보장하는 에어컨이자 공기정화기, 습도조절장치였다. 돔시티 마다 엄격한 거주 조건이 있었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추방된다. 돔시티 밖은 “모든 것이 붉은 모래로 뒤덮인 채 바짝 메말라 가고, 거친 모래 폭풍에 직립해 있는 모든 존재들이 앙상하게 꺾여 나가는 곳”이었다. 추방자들은 돔시티에서 배출하는 열기로 더 가혹해진 환경을 견뎌야 하지만, 이들 역시 벽을 허물기보다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크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혹한과 혹서를 피해 대형 빌딩, 높은 아파트에 숨어, 내부의 안위를 위해 프레온 가스를 밖으로 배출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곳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혹한과 혹서를 몸으로 견뎌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설의 배경과 같은 구조다. 주인공 소피는 외친다. “정말 멍청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정말?” 물론 그들은 알고 있었을 테고, 지금 우리도 알고 있다. 이대로 뒀다가는 머지않아 돔시티의 안과 밖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로운 지질시대, 인류세
알다시피, 우리는 지구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류가 나타나기 이전에 서너 세대에 걸쳐 이뤄졌던 변화가 아주 빠르게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이미 지구의 시스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과학자들은 이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진단했다. 화학자 폴 크뤼천(Paul Crutzen)이 제시한 이 단어는, 인류의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 새로운 지질 시대를 말한다. 현재 우리는 약 1만 년 전 시작된 ‘홀로세(Holocene)’에 살고 있고, 인류세는 아직 공식용어가 아니라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한 가설적 개념이다. 지질시대를 새로 정의할 만큼 인류가 끼친 영향이 상상 이상으로 막대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자 사이먼 루이스와 마크 매슬린의 공저서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에서는, 산업혁명 이래 인류가 방출한 탄소는 2.2조 톤이며, 모든 바다가 산성화되고 기온이 상승함은 물론,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물에 미세플라스틱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생물의 개체수가 지난 40년 간 약 58% 감소했으며 그 속도는 우리 인류가 나타나기 전보다 1,000배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단일 생물 종이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지구의 역사상 처음이라고 밝힌다.
이렇게 등장한 인류세 개념은 과학계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도 2018년 카이스트에 인류세 연구센터가 문을 열었고, 2019년 EBS의 <다큐프라임: 인류세> 3부작은 국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킴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다큐멘터리 부문 상을 여럿 수상하며 널리 알려졌다. 인류세는 이제 지질학적 가설이 아니라, 생활 속 용어가 됐다.
인류세와 미술계의 변화
인류세는 최근 몇 년 간 미술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가속도 – 인류세의 예술’(타이페이 비엔날레 2014), ‘일곱번째 대륙’(이스탄불 비엔날레 2019), ‘당신과 나는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타이페이 비엔날레 2020) 등 각종 국제 비엔날레와 전시가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을 주제로 삼았다.
특히 베니스 지역의 기후변화와 해수면 상승에 관한 의제가 특히 돋보인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영국관은 건물 주변에 비계를 설치해 관객이 옥상으로 올라오도록 유도했는데, 이는 온난화가 계속되면 베니스가 물에 잠겨 옥상만 남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이어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관의 <태양과 바다(마리나) Sun and Sea(Marina)>는 전시장에 인공 해변을 조성한 뒤, 휴양객처럼 수영복을 입은 오페라 가수들이 누워 각자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기후변화로 바뀐 일상을 전하고 재앙을 우려하는 레퀴엠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해변에 온 관객들은 노래를 듣다가, 재앙을 앞둔 현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관객들은 이 전시를 보기 위해 악천후에도 몇 시간씩 줄을 섰다고 한다.(2)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일민미술관에서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 전과 온라인 전시 <인류세 한국 X 브라질 2019-2021>를 통해 기후변화와 관련된 브라질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2020년에는 ‘따스한 재생’이라는 주제로 환경 위기의 답을 지역 재생에서 찾는 <강원 국제 트리엔날레 2021>,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지구의 기억> 전이 열렸으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에 대처하기 위한 생태학적 세계관을 담은 전시 <대지의 시간>(2021.11.25.~2022.2.27.)이 열리고 있다.
인류세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구체적 작품들도 있다. 첫째로 환경오염이나 온난화와 인간의 이동으로 인해 파괴된 풍경을 고발하며 이를 작품으로 재현하거나 실제 행동이나 학제간 협업을 통해 변화를 촉구하는 프로젝트, 둘째로 새로운 생명 개념의 변화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작품들, 또는 기술을 통해 데이터가 돼버린 생명과 국가적 통제의 상황, 생명을 상업화하는 바이오 경제 등을 고발하는 작품, 그리고 셋째로 유럽, 백인, 남성중심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휴머니즘과 새로운 개념의 인간 신체를 탐구하는 작품들이 있다.(3)
2018년 대전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피나 욜다스(Pinar Yoldas)의 작품 <과잉의 에코 시스템(Ecosystem of Excess)>은 플라스틱 잔해가 가득한 바다에서 태어났기에, 플라스틱을 소화하는 장기를 지닌 생물체들을 소개했다. 또한 전시가 열리는 지역에 밀착한 작품을 종종 선보이는 예술가 마크 디온(Mark Dion)은 2021년 서울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한국 서해에서 수집한 해양 쓰레기들을 귀한 수집품처럼 ‘캐비닛’에 전시하며 해양오염에 관한 인식을 환기시켰다.
해외에서는, 덴마크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인 리얼 라이프(In Real Life)>에서 기술을 활용해 물과 빛, 태양, 무지개 등 자연과 유사한 환경을 경험하게 만드는 대형 설치 작품들로 자연에 대한 감각을 일깨웠다. 2020년에는 아이들이 환경오염에 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앱 “얼스 스피커(Earth Speaker)”를 발표했다. 지난해 가을 스페인의 네르비온 강에는 거대한 소녀의 얼굴이 강물의 흐름에 따라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모습이 발견됐는데, 멕시코 조각가 루벤 오로즈코(Ruben Orozco)의 작품 <비하르(Bihar)>였다. 바스크어로 ‘내일’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섬뜩한 조형물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가라앉을 수도 있다’며 기후위기를 경고했다.(4)
더 빠르고 적극적인 실천
국내외 미술계에서는 인류세와 관련한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도 자주 열린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도 기후변화를 주제로 토론회를 준비했으나, 당시 행사를 방문한 윌리엄 스키핑(William Skeaping) 등 활동가들은 미술계의 이런 활동이 여전히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며 구체적 탄소 배출 저감 계획 등 직접적인 활동을 요구했다. 단 며칠의 행사를 위해 항공편으로 작품을 운송하고 대규모 쓰레기가 발생하며, 사람들은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작품을 사러 날아간다. 스키핑은 이를 ‘전 지구적 서커스’라고 표현했다.(5) 앞서 언급한 베니스 비엔날레 리투아니아관의 작품이 세계적인 화제가 됐지만, 비엔날레의 막바지에 베니스를 덮친 53년만의 기록적인 홍수를 막지는 못했다. 이탈리아는 무려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했다. 미술이 생성하는 의미보다 실제 위협은 더 빠르게 다가온다.
미술계 현장은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2019년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올라퍼 엘리아슨의 전시를 계기로 테이트의 큐레이터들은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수백 명의 관계자가 모여 토론하고, 테이트 산하 4개 미술관은 물론 입점한 매장까지 동참해 2023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0% 이상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6) 또한 2020년에는 런던의 갤러리와 아트페어, 기관이 모여 ‘갤러리 기후 연합(Gallery Climate Coalition, GCC)’을 결성했고, 미술 산업에 적용 가능한 탄소계산기를 개발하고 운송 및 관리 과정에서의 폐기물 감소와 자원 재활용 방안을 연구 및 제안하고 있다.
세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도 별도 연구소를 설립해 운송과 물류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과 비용을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등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NFT 아트도 마찬가지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된 비플(Beeple)의 작품이 거래되며 배출한 탄소는 7만 8,597kg으로, 13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하는 전기 사용량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네트워킹된 컴퓨터들이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업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2022년 초까지 에너지 사용량을 99%까지 줄이겠다고 발표했다.(7)
한편 생태에 적극 개입하는 ‘에코벤션(Ecovention)’ 작품도 등장했다. 생태미술가 멜 친(Mel Chin)은 미국 내 최악의 납 오염 도시 중 하나인 뉴올리언스의 토양을 되살리는 프로젝트 <광맥 찾기 사업(Operation Pay dirt)>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과학자들과 협업해 오염 해독 방법을 연구했다. 또 막대한 비용 마련을 위해 어린이들이 그린 300만 달러의 지폐를 모아 워싱턴의 의회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이 지폐들은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 소장됐고, 이 프로젝트는 예술육성재단의 지원을 받아 MIT와 파트너십을 맺게 됐다.(8)
이런 것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와 관객의 인식 전환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 현대미술 작품을 떠올려본다면, 멜 친의 작품은 미술이 타 학문 및 지역과의 협업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며 변화를 일궈낸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멸종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일련의 노력을 보더라도, 과연 이것만으로 기후변화를 멈추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개개인의 노력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자본주의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회피가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며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를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세계 산업과 경제 주체들이 먼저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한편 ‘툴루세(Chthulucene)’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이자 과학사가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주장했는데, 우리 모두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환기하며 다양한 존재들과 새로운 종류의 관계 맺기, 즉 ‘친족 만들기’를 권한다. 불편하고 느리지만 함께 가야 한다는,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에 관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의 한 단편에서는 지난 사랑과 함께 이제는 마실 수 없는 와인의 추억을 되새긴다. 부르고뉴 지방의 평균 온도가 상승한 탓에 고온에 취약한 피노누아는 뿌리 뽑혔고, 15년 전 대중적이었던 와인은 부르는 게 값이 됐다. 전 세계에 단 수백 병만 남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가을 햇볕에 잘 말린 민무늬 회색 티셔츠를 입은 느낌’의 와인을 이제는 맛볼 수 없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사소한 이야기지만 의미하는 바는 크다. 코로나19가 그랬듯이 우리는 기후변화로 인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을 조금씩 그러나 점점 빠르게, 결국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것이다.
소설 속 돔시티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기후변화라는 재앙뿐이 아니다. 급작스런 변화로부터 안전을 지키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소외되는 것은 경제적 약자와 기준에서 벗어난 타자다. 우리는 자연스레 살아가기 어려워질수록 권력이나 자본에 의존하며 안전과 자유를 바꿔야만 한다. 그리고 팬데믹을 건너고 있는 지금도 어렴풋이 이 부조리를 느끼고 있다.
이대로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너머를 상상하고 움직여야 한다. 해러웨이는 인류세를 가능한 한 ‘짧고/얇게(Short/Thin)’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 시기에 갇히지 않고 더 나은 시대로 건너가려면,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해 ‘레퓨지아(Refugia)’(9)를 다시 채우며 미래를 불러와야 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지피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10)
앞에서 살펴봤듯 인류세의 시대에 예술의 역할 중 하나는, 우리를 깨어있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주제와 이미지, 경험으로 무뎌진 감각을 환기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깨닫게 만든다. 과학 등 타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제시하기도 한다. 처음 맞이하는 환경 속에서, 지난 태도를 성찰하는 자세와 기민하고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이런 시점에서, 예술은 우리가 가진 또 다른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지고 시대를 바꾸는 주체는 결국 인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글·김지연
현대미술과 도시문화를 비평한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했고, 책 『마리나의 눈』, 『보통의 감상』을 썼다.
(1) 2021년 광주와 서울에서 열렸던 공공예술 워크샵 <제로의 예술> 중 비거니즘, 동물권, 생태, 기후위기와 관련된 릴레이 강연 프로그램 <우리는 오늘도 내일을 끌어쓴다>의 제목을 인용했다. https://0makes0.com/program/7/
(2) 헤럴드디자인 "미술가와 미술관은 왜 '인류세'를 이야기하나" 2019. 7. 22.
(3) 전혜숙, 『인류세의 미술』(선인, 2021), pp.53-54
(4) 경향신문 "강물 속에 거대한 소녀얼굴이?…깜짝 놀란 시민들" 2021. 9. 30.
(5) GQ코리아 "미술계의 화두로 떠오른 인류세" 2020. 3. 8.
(6) 도어크리에이티브 "문제는 탄소가 아니라 자본주의 지속가능성의 역설" 2019. 11. 1.
(7) 미팅룸, 『셰어 미: 재난 이후의 미술, 미래를 상상하기』(선드리프레스, 2021), pp.63-64, 91-92
(8) 전혜숙, 『인류세의 미술』(선인, 2021), pp.130-136
(9) 멸종 위기의 생물체가 소규모로 생존하는 마지막 거주지를 뜻하는 집단생물학 용어
(10) 전혜숙, 『인류세의 미술』(선인, 2021),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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