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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7) - 견우와 직녀가 7월 7일에 랑데부하는 이유는?
안치용의 Numbers (7) - 견우와 직녀가 7월 7일에 랑데부하는 이유는?
  • 안치용 | ESG 연구소장
  • 승인 2023.06.3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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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인간에게 7은 행운의 숫자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3도 좋은 수다. 7이 3개 모이면 큰 행운이다. 슬롯머신에서 777이 나오는 것을 잭팟이라고 한다. 네잎클로버처럼 믿거나 말거나 한 통념 수준의 행운이, 슬롯머신에서는 실체적 행운으로 바뀌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

7을 길한 수로 보는 태도는 예로부터 동서양에 공통적이다. 우러르는 하늘이 공통적이어서 그랬을까. 고대인에게 하늘의 천체는 지상의 삶을 지배하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신의 현현이었다. 천체야말로 기독교 용어로 공현(公現, Theophania)이었다. Theophania는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와 나타남을 뜻하는 ‘Phainesthai’의 합성어로 Epiphania라고도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정도의 의미로 에피퍼니를 차용해 자신의 문학용어로 만들었다.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대표적인 천체가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총 7개여서 7이 중요한 숫자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레고리력에서 7개로 확정된 요일은 지금까지 이어져 우리 일상의 기준이 된다. 우리가 별의 잔해이듯, 우리의 요일은 별의 흔적이다. 인간의 삶은 별의 삶이며 신성의 수용이다.

 

7일의 창세

성서에서 창세가 7일에 걸쳐 이뤄졌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을 포함해 사람들이 아는 듯 모르는 듯 특별한 사건이다. 창세기 2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로 돼 있다.

일곱째 날에 마치지만, 내용상 그날에 한 일은 없다. 그날엔 쉬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흔히 창조가 6일에 끝났다고 본다. 제7일은 덤으로 본다. 그렇지 않다. 창조에 쉼을 더해 진짜 창조가 완성된다. 워드프로세서로 문서를 만들 때 여백 없이 치는 이가 있는가. 세상에 돌아다니는 책 중에 여백이 없는 책이 있는가. 여백을 테두리로 넣음으로써 책이 완성된다. 쉬는 날까지 창세에 포함한 창세기 기자의 관점이 참으로 지혜롭다. 혹은 신의 섭리가 오묘하다. 

안식함으로써 창세가 완성된다는 성서의 기록은 그 자체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풍요롭게 만드는 순기능을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역기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안식일 규정을 너무 엄격하게 지킨 고대 유대인 역사의 어떤 현장에서는 안식일에 침략한 외세에 맞서 싸우지 않고 죽는 쪽을 택한 웃지 못할 기록이 있다.

신약에서 예수는 바리새인의 교조적인 안식일 준수 규정을 비판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두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자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질책한다.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했으리라”는 예수의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자비 없이 제사만 드리는, 혹은 제사 드리는 시늉만 하는 세속화한 기독교 혹은 종교는 예수가 바리새인에게 하듯 파문을 당해야 한다. 대체로 신이 교회를 떠났다고 할 수 있으니 자칭 성도는 신이 없는 공간에서 없는 신을 섬긴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교회를 지키는 무신론자다. 무신론자가 교회에 남고 유신론자가 교회를 떠나는 역설이 예수 시절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관철된다. 

6일 동안 창조를 마치고 7일째 안식함으로 야웨가 창세를 완성했다는 이야기는 세상과 개인 모두에게 유효하고 가치 있는 시사를 준다. 그것을 휴식, 안식, 숙성 등 무엇으로 부르든, 우리에게 제7일이 필요하다. 세상이 6일로 구성됐다는 믿는 대다수에게 제7일을 믿게 만드는 게 기독교 나아가 종교의 사명이자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이다.

 

7일째 전날에 야웨가 한 일

구약성서 창세기 1장에 창세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는 가운데 (그게 사실이네 아니네 하고 논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6일째 이야기는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 많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여기서 서구문명과 자본주의의 해악과 관련해 가장 많이 비판을 받은 대목이 “정복하라”일 것이다. 약탈적이고 차별적인 세계관으로 지구와 인류문명을 황폐화하는 데에 이 문장이 끼친 해악이 절대 적지 않다. 그러나 여기엔 약간의 오해가 있다. 그렇다고 면책이 되지는 않겠지만, 최초 성서 편찬 시기의 맥락과 근대와 함께 자본주의가 발흥할 무렵 활용된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광범위한 내용이 될 것이기에 상술을 피하되, 다만 최초 맥락이 약탈적이고 차별적이지 않았다는 점만은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원래의 기독교가 오해를 받았다는 항변이 가능하지만, 당대 현실의 기독교가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에 야합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를 통으로 매도할 까닭이 없지만, 그렇다고 원래 그렇지 않다는 적절하지 않은 변명으로 역사의 당대 기독교를 변명할 명분 또한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언제나 테오파니가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두고두고 가슴에 두어야 하는 구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생각은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위안이자 가장 확고한 삶의 주춧돌이다. 필멸의 존재로 보잘것없고, 뿌리 뽑힌 채 언제나 동요하며, 마치 한여름에 두툼한 외투로 자신을 꽁꽁 둘러싸듯 불안을 입고 지내는, 그래서 외투를 적실 만큼 땀을 흥건하게 흘리고 땀띠로 범벅이 되면서도 그 옷을 벗지 못하는 미욱한 존재가 감히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진술. 내 모습에 신이 형상이 어리었고 내 안에 신의 호흡이 들었으며 내 삶을 신의 손길이 어루만진다는 생각은, 가장 최악에 몰린 순간에도 삶을 가장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만으로 우리가 종종 감동하는데, 우리가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천명은 100만 배 이상으로 감격스럽다.

그 신이 창조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다음날 쉬었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아직 존엄한 존재가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근거의 최종심급이다.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문장 또한 중요하다. 창세기에는 창조에 관한 두 가지 설화를 동시에 수록했는데, 아담이 자는 동안에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만들었다는 남녀 순차 창조설과 우리가 살펴본 대로 여자와 남자를 함께 만들었다는 동시 창조설이 병행한다. 성서의 오류라기보다는 성서의 풍성함이라고 봐야 한다. 성서를, 애초에 신의 영감에 따라 한 사람이 쭉 써 내려간 기술이라고 믿는 신학자는 드물다. 우리가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그 우리, 즉 영어식 표현으로 흔히 쓰는 Man이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다는 게 중요하다.

참고로 창세기 이 구절에 따르면 인간은 채식주의자가 돼야 한다. 나중에, 노아 이후 육식이 허용되지만, 순서로 봤을 때 채식에 우선성이 있다. 신이 지구온난화를 미리 걱정해 이렇게 채식을 권장한 것일까. 설렁탕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대표 음식이다. 달랑 설렁탕 한 그릇만으로 10kgCO2e에 달하는 온실가스가 나온다. 승용차 한 대가 41.7km 이동하며 배출한 온실가스 양과 동일하다.

 

무지개

무지개는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육식도 공식화한다. 애초에 인간이 초식동물로 진화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누나 임팔라 같은 초식동물이 생태계 최상위 종으로 진화했으면 지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지구는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잡식동물 인간으로 인해 불행하다.

무지개가 일곱 색(빨주노초파남보)이라고 말하면 사실상 틀린 말이다. 무지개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이기에 일곱 가지 색으로 구성돼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아이작 뉴턴이 프리즘 굴절 실험을 하며 무지개 스펙트럼을 Red, Orange, Yellow, Green, Blue, Indigo, Purple의 일곱 가지 색으로 구분한 영향으로 본다. 당시로는 장수라고 할 84세까지 산 뉴턴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소문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뉴턴이 무지개를 연구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끼워 맞추기 주장이 되긴 하겠다. 인간이라는 포유류는 임신해 태아를 10개월이나 배 안에서 키우는데, 가끔 성질이 급해 7개월 만에 어머니 배 밖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우리말로 칠삭둥이라고 한다. 칠삭둥이 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한명회다. 뉴턴도 칠삭둥이였다. 

포유류의 목뼈는 7개이니 인간의 임신기간이 원래 7개월인 것이 나쁘지 않았겠다. 왜? 세상에 근거 있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가. 그럴듯하면 그게 할 만한 이야기다.

 

압구정과 칠삭둥이

당대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칠삭둥이 한명회가 말년에 유유자적하며 지내려고 지은 정자가 압구정이다. 풍광이 좋았다고 한다. 아무튼 제번하면, 압구정으로 인해 한명회는 성종 말기에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사후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끝이 좋은 인생은 아니었다. 한국의 대표적 부촌의 기원이 한명회인 것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세기에 빗대면 그가 실제로는 칠삭둥이로 살지 않고 육삭둥이처럼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일곱 걸음과 조조의 아들들

삼국지연의는 조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는 조비가 경쟁자였던 조식에게 소 두 마리가 싸우다가 한 마리가 밀려 구덩이로 떨어지는 그림을 보여주며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그림을 묘사한 시를 짓되 “두 소가 싸워서 한 마리는 우물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말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단서를 걸었다. 시를 짓지 못하거나 조건을 어기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兩肉齊道行(양육제도행, 두 덩이의 고기가 길을 가지런히 가는데)

頭上帶凹角(두상대요각, 머리엔 볼록한 뿔이 달렸구나)

相遇凸山下(상우철산하, 서로 철산 밑에서 만나)

欻起相唐突(훌기상당돌, 홀연 서로 싸움이 벌어지네)

二敵不俱剛(이적불구강, 두 대적이 다 함께 강할 수는 없어)

一肉臥土窟(일육와토굴, 한 고깃덩이는 토굴 속으로 쓰러진다)

非是力不如(비시력불여,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盛氣不泄畢(성기불설필, 기운을 다 쏟지 못한 탓이로구나)

 

정확히 일곱 걸음째에 시를 끝내 조식은 목숨을 부지했다. 내용은 형제간의 권력투쟁을 풍자했다고 본다. 조비가 다시 시를 쓰라고 하는데, 그 시가 세간이 칠보시로 알려진 자두시(煮豆詩)다.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솥 속의 콩이 울고 있구나)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리 급하게 삶아대는가)

 

동기간인 조비가 조식을 핍박함을 우회적으로 비난한 글이다. 두 편의 시로 조식은 목숨을 보전한다. 이 일화나 시는 모두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으나, 누가 지었든 세상살이의 이치를 잘 담아내긴 했다. 원래 문학이 삶보다 더 현실적인 법이다.

 

최고의 사랑 이야기

마침 장마가 오는 7월이니 칠월칠석과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빼먹을 순 없다. 하늘 거주민인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는 각각 소를 치는 것과 베를 짜는 데에 최고 장인으로 일 말고는 관심사가 없었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중매서 둘을 맺어줬는데 결혼 후 두 사람은 서로를 탐닉하느라 일을 내팽개쳤다. 

속 좁은 옥황상제는 일하지 않는다고 분노해 둘을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각자 하늘의 동쪽 끝, 서쪽 끝으로 귀양을 보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옥황상제는 7월 7일 칠석(七夕)날 하루만 둘을 만나게 했고, 은하수에 다리가 없어 두 사람은 강가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너무 많이 울어 지상에 홍수가 날 지경이 되자 까마귀와 까치가 하늘에 올라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는데 이것이 오작교(烏鵲橋)다. 

널리 알려진 견우와 직녀 이야기다. 동북아에 두루 전하는 이야기로 우리나라에서도 광개토대왕 시절 만들어진 고분 벽화에서 견우와 직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1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다면, 그 하루를 무슨 일을 하며 보내야 할까. 일단 견우가 소 키우는 사람이니 자기가 키운 소 중에서 가장 좋은 소를 잡아 고기로 구워 먹었겠다. 직녀는 자기가 짠 직물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옷을 지어 견우에게 줬겠다. 둘의 섹스야 말 그대로 운우지정일 것이나, 아무리 열심히 한들 1년치 욕정을 충족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런 마음 상태에서 하는 사랑은 더 각별할까 아니면 더 비통할까. 아니면 아예 성욕을 느끼지 못할까. 둘이 꽤 오랫동안 그렇게 만났을 텐데 노년의 견우와 직녀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애틋했을까. 견우가 떠나는 직녀에게 사골과 잡뼈 아롱사태 등을 고루 넣어 잘 끓인 설렁탕을 줬을 것 같기는 하다. 그때는 지구온난화가 심하지 않았으니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과거의 사랑이라 다행이다. 최고의 사랑은 언제나 과거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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