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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 마녀보다 더 악독한 악귀들의 세상
<악귀>, 마녀보다 더 악독한 악귀들의 세상
  • 김경욱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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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끝내 수많은 목숨을 잃게 만든 사람들, 버스에 탔던 이들과 자동차를 몰던 이들이 폭우로 물이 불어난 오송 지하차도에 갇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 사람들,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고 젊은 병사를 물속으로 처넣은 사람들, 젊은 여교사를 극단적 선택에 이르도록 괴롭힌 사람들, 비탄에 빠진 유족들을 모욕하고 조롱한 사람들, 그들은 모두 악귀이거나 악귀에 씐 괴물들이다.

그들에게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책무가 있었지만, 돈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인지 비극을 수수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진정한 사과도 하지 않았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또 돈과 권력을 무기로 삼아 갑질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가리지 않았던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튼튼한 방패 뒤에 숨어 파문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악귀들과 괴물들에게 “이제 만족하냐?”고 질문한다면, 모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니, 아직 멀었는데”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드라마 <악귀>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나병희는 타인들의 죽음은 물론이고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가 차례로 죽어 나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악귀와의 동맹을 유지하는데,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목숨과 돈이기 때문이다.

 

악귀의 탄생

드라마 <악귀>에서 인용된 신문 기사에는 ‘태자귀’를 만드는 ‘염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무당이 지역의 여아(女兒)를 유괴 또는 납치해서 가둬놓고 곡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17일 후, 굶주린 여아에게 대죽에 주먹밥을 끼워 내민다. 여아의 모든 정신력이 대죽을 잡으려 할 때, 칼로 쳐 죽이고 그 여아의 손가락을 신체(神體)로 삼는다.” 1958년 장진리, 나병희와 남편 염승옥은 거부가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당 최만월에게 태자귀/악귀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최만월은 십 대 소녀 이향이를 낙점하고, 그 징표로 그녀에게 붉은 댕기를 준다. 향이가 희생자로 낙점된 이유는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둘째로 태어난 딸(유교의 관습에서 장자는 보호해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나병희 부부는 향이 부모에게는 거액을 지불하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돈을 뿌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을 어음으로 매수한다. 돈에 홀린 그들은 모두 끔찍한 범죄를 수수방관한다. 향이는 믿었던 가족과 이웃들 전체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향이가 다른 어떤 악귀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한 악귀가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가난한 마을에서는 매우 귀한 댕기를 받고 기뻐하던 향이는 부모의 대화를 엿듣고 자신이 당할 일을 알게 된다. 향이는 댕기를 탐내는 여동생 목단에게 주고, 최 무당은 댕기를 한 목단을 유괴한다. 

가족이 다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는 명분으로 향이의 희생을 받아들였던 엄마는 목단이 사라지자 목숨을 끊는다. 아버지와 오빠는 바다에서 익사하고 만다. 향이는 엄마가 동생을 더 사랑했다고 여기며 원망이 더 깊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도 커진다. 향이는 나병희 부부에게 받은 돈을 최 무당에게 건네며, 동생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결국 최 무당의 손에 동생도 죽고 그 누구보다 살려는 의지가 강했던 향이도 죽는다. 따라서 향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더해 원망과 분노와 죄책감이 가득한 무시무시한 악귀가 된다. 가난한 부모도 귀찮은 동생도 다 없어지고, 부잣집에서 태어나 훨훨 날아가기를 원했던 십 대 소녀 향이의 소망이 기이한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악귀의 먹이

최 무당은 나병희 부부에게, 악귀는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답한다. 악귀의 도움으로 충분한 부를 축적하게 된 염승옥이 악귀의 위험성을 알아채고 제거하려 할 때, 나병희는 악귀와 결탁해 남편을 죽게 만든다. 자녀와 손자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른다 해도, 나병희는 돈만 얻을 수 있다면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나병희가 자본주의 사회의 화신이라면, 그녀가 운영하는 중현 캐피탈(대부업/사채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흡혈귀다. 집안의 서재에서 검은 옷을 입고 드라큘라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악귀와 다를 바 없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인간들과 나병희 부부와 무당 같은 인물들만 악귀와 가깝다면, 악귀가 판치는 세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악귀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번성하는 데는 돈에 현혹된 장진리 마을 사람들 같은 이들이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악귀는 “탐욕에 빠진 사람들은 나를 이용해 돈과 권력을 얻으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명품이 탐나 살인을 저지르고, 보험금을 타내려고 부모를 죽인다. 악귀는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면서 점점 더 커간다.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소비를 통해 채워질 것처럼 유혹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귀에 씐 사람들은 파멸에 이를 때까지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

 

악귀의 욕망

악귀는 사람의 가장 약한 면을 이용하는데, 우울감에 빠지거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파고든다고 한다. <악귀>의 주인공 구산영은 엄마가 어렵게 모은 돈을 보이스피싱으로 모두 잃고는, 절망에 빠진다. 산영에게 씐 악귀가 처음 한 일은 보이스피싱의 범인을 자살하게 만든 것이다. 산영이 범인에게 분노해 처벌을 원할 때, 악귀가 그 소망을 들어준 결과다. 

산영은 자신이 악귀에게 씌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나병희의 손자이자, 귀신을 볼 수 있는 민속학자인 염해상은 산발한 산영의 그림자를 통해 악귀의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이 드라마에서 나병희 같은 류의 인간들과 악귀의 관계가 자본주의 사회를 은유한다면, 악귀가 그림자로 드러나는 설정에서 산영과 악귀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설명하는 인간의 정신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심리학자 칼 융은 자아가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적 요소를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자아는 그림자 안에서 극도로 이기적이고, 냉혹하고, 강압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다. 자아에 내재한 어두운 마음은 자기중심적으로 어떤 대가를 감수하고라도 쾌락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림자는 인간의 악의 원천이며, 그 안에 인간의 주요한 죄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의식적 자아는 그림자를 부정하거나 갈등하게 된다. 이것이 신화와 이야기에서 캐릭터를 통해 상징화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카인과 아벨, 이브와 릴리트, 아프로디테와 헤라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산영과 악귀는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산발을 한 그림자가 활성화될 때, 산영은 억압된 분노를 표출한다.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하다 부유한 집 아이가 아끼는 인형을 훔쳐 망가뜨리거나, 부잣집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깽판을 친다. 이것은 가난해서 희생자로 전락한 향이의 분노이자, 한편으로는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면서 쌓여간 산영의 분노이기도 하다. 또 산영이 고등학교 선배이자 강력계 형사로 일하는 이홍새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행동도 악귀의 영향 같지만, 산영이 억압한 성적 욕망이기도 하다.

악귀가 표적이 된 사람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면, 악귀는 먼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지 않으면, 악귀의 손길은 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 문을 열게 된다. 이때 악귀는 “(내가) 문을 열었어”가 아니라 “(네가) 문을 열었네”라고 조롱하듯 말한다. 산영의 아버지 구강모가 죽는 장면에서, 방문을 두드리며 절박하게 부르는 어머니 소리에 구강모가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서 있다. 

그는 또 다른 자기 자신, 자기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악귀를 부른 것은 그 자신이며 악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무의식에 억압된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구강모의 경우처럼, 악귀와 연관된 죽음의 방식이 타살이 아니라 자살인 이유는 악귀의 희생자들이 결국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악귀의 이름

<악귀>에서, 악귀를 제거하려는 이들이 실패하는 원인에는 악귀의 이름에 얽힌 문제가 있다. 염해상과 산영은 조사 결과 악귀의 정체를 이목단으로 판단했다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악귀의 이름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름을 알아야 악귀의 정체를 알 수 있고, 악귀를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병희는 악귀의 이름을 감추려고 발악하게 된다. 언어가 지배하는 인간의 세상에서 존재를 증명하려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한다. 이름이 없으면 실재한다 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악귀의 이름이 밝혀졌을 때, 악귀의 정체성이 생전의 향이처럼 돼가는 것이다. 끝까지 살려고 저항했던 악귀/향이는 이제 살아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산영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다. 악귀/향이는 산영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계속 같이 살자”라고 제안한다. 산영이 거부하자 산영의 자아를 거울(그림자)에 가두고 산영이 되려고 한다. 악귀/향이는 자신의 신체가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우리는 친자식을 팔아먹으면서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악했는데, 너희들은 죽고 싶어 한다. 내가 열심히 치열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볼 테니 살려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므로 죽을지, 살지, 악귀와 함께 살아갈지, 물리칠지는 산영의 선택에 달리게 된다.

이때 산영의 자아는 자신이 지금까지 쓰고 있던 가면, 페르소나를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욕구와 쾌락을 통제하고, 사려 깊고 신중하고 공감적이며 상냥하게 보이는 페르소나를 장착하며 살아왔다. 결국 그녀는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것, 가혹하게 어둠 속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을 죽이고 있었던 게 악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다음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로,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할 때, 악귀/향이는 소멸하게 된다.

이것은 자아가 드러내고 싶은 페르소나와 감추고 싶은 그림자를 통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산영에게는 마지막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산영이 현재의 시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악귀가 필요한 상태이므로, 악귀를 물리치는 건 곧 시력을 잃는 것이 된다. 산영은 “나답게 살겠다”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시력을 포기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다. 

<악귀>에서, 악귀를 둘러싼 문제는 용감한 인물들에 의해 해결됐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악귀들과 악귀에 씐 괴물들이 더욱더 활개를 치며 더 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어떻게 해야 득실거리는 악귀들과 괴물들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어려운 과제다.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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