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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영화는 ‘그날’을 어떻게 기억했는가
10년간 영화는 ‘그날’을 어떻게 기억했는가
  • 송아름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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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벨>(2014)에서 <너와 나>(2023)까지

잊는다는 것은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내 곁의 누군가의 일이 아니어서, 혹은 내 눈앞의 일이 먼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벌어진 일을 어쩌겠느냐고 포기할 때 잊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다. 나와 멀기에 알 수 없는 일로 치부할수록 어떤 일의 순위는 점점 밀려나고, 흔적은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권력이다. 망각은 지워도 되는 것이나 기간을 함부로 설정하며, 누군가의 잊지 말라는 호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감히 선택할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겪지 않았기에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그래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해결되지 않은 일을 잊는다는 것은. 

수학여행과 교복, 제주행과 바다 그리고 배. 이 이미지들은 굳이 몇 주기를 따져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한국사회의 트라우마가 됐다. 이는 그날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뿐 아니라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무능을 확인한 것과 맞닿은 것이기도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과정과 결과가 10여 년간 이어진 것은 이만큼이나 지났으니 해결됐을 것이라고, 이젠 굳이 찾아야 보일 만큼 노란 리본이 적어졌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게 했고 무엇도 해명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탈각시켰다. 

이 혼란 속에서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잊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굳이, 지금, 왜라는 의문을 던지며 누군가의 호소를 내려다보지 않고 함께하겠다는 것, 그것으로 미뤄뒀던 일은 현재로 돌아올 수 있다. 10여 년간 2014년 4월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다수 제작된 것은 아마도 이런 결심을 바탕에 뒀을 것이다. 아니,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목격자가 돼버린 우리의 기억을 지속시킬 방법으로 영화가 선택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에서 무수한 참사를 겪었지만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견뎌야 했던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세월호 참사는 전에 없이 사고 직후부터 스크린에서의 발화를 시작했다.(1) 함께 목도했던 그 일에 대해 다시금 함께 해야 하는 극장으로의 소환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2) 같이 기억하자는 영화의 말들은 모두에게 조금씩의 책임감을 할당하며 극장을 채워갔다. 

이제 그날을 하루 앞둔 학생들 이야기까지가 우리 앞에 도착해 있다. 편치 않은 곳에서 9번째 추위를 견디기로 각오한 분들을 떠올리며, 분노로 채워졌던 이야기가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낸 이야기로 전해지기까지의 스크린 속 목소리를 천천히 복기해보려 한다.

 

다이빙벨(2014)

누구의 잘못인가: 혼란과 상처의 명시

2014년 10월 다큐 <다이빙벨>이 개봉했다. 참사 6개월 만에 개봉한 이 작품은 처음 공개하려던 영화제가 곤혹을 치렀을 뿐 아니라 다큐가 주장하는 내용 역시 많은 검증이 필요할 만큼 다큐 자체를 수용하는 데 여러 난점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난점은 참사를 둘러싼 논쟁을 억압으로 변화시키는 상황들로 인해 누구도 이 엄청난 일에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현실을 보여준 것이다. 논쟁이 아닌 억압으로의 전환은 모두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 작품은 그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참사 직후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무수한 정보들은 많은 이들을 혼란케 하면서도 누구도 구해내지 못한 국가를 질타하는 것으로 수렴됐고 <다이빙벨>은 그 시작이었다.

얼마 후 이다지도 무능한 국가가 얼마나 피해자를 양산하는지를 다큐 <나쁜 나라>(2015)는 이야기했다. 1년 동안 던진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도 받지 못했던 유가족들의 투쟁은 국가의 민낯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도대체 왜 내 가족을 잃어야 했는가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한 유가족들의 투쟁기는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바라봐야만 했던 이들과 함께했다. 울분이 고스란히 터져 나오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눈물과 울화를 불렀다.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이해시키지 못한 국가에 대한 당연한 비난이 소리를 높일 때, <위켄즈>(2016) 속 코러스 그룹 ‘G-Voice’의 행보가 거쳐 간 유가족과의 연대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어느 순간 소수자가 돼버린 그들에게 위로와 노래를 건넸던 G-Voice의 목소리는 이제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것을 넘어, 그들에 대한 이해로의 전환을 상상하게 했다.

 

눈꺼풀(2018)

그날은 어떤 상처를 남겼는가: 고통과 눈물, 그리고 재현

극영화로의 이행은 남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는 함께하겠다는 다짐이 전제돼 있었다. 우리가 결코 눈감고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눈꺼풀>(2018)이 꾹꾹 눌러 담아 이야기한 것은 그 시작점에 놓인다. 곧 먼 길을 떠날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신성하게 빚은 떡을 쥐어 보내고 싶은 그 마음은 눈꺼풀을 도려내면서까지 눈을 뜨고 있으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눈꺼풀>의 단호한 의지는 남은 자들과 고통을 나눌 힘을 주기도 했다.

영화 <봄이 가도>(2018)와 <생일>(2019) 속 남은 자들을 바라보며 위로할 수 있는 힘은 절대 모르는 척하지 않겠다는 그 마음으로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봄이 가도>와 <생일>. 두 작품 모두 돌아올 수 없는 자식과 가족, 친구를 그리워하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착하기만 했던 아들, 미처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네지 못했던 딸, 손잡아주지 못했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 등은 이 작품들에 가슴 아프게 담겼다.

남은 자들의 눈물에 담긴 것은 거대한 죄책감이었다. 다른 이들이 가져야 할 죄책감을 짊어진 가족들은 좌절하고 또 좌절했지만, 먼저 간 이들을 위해서라도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화는 남은 이들의 고통을 그리면서도 그들이 삶으로 돌아오는 다짐의 순간들을 남겨뒀다. 이는 마치 다큐 <당신의 사월>(2021) 속 세월호를 목격했던 인물들이 스스로의 삶의 방향을 다시 정했듯, 새로운 삶으로 꿋꿋이 나아가 달라는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너와 나(2023)

지금을 살아간다: 당사자들의 현재

연극연습을 하며 웃고, 춤추고, 서로 좋은 배역을 맡으려 갈등도 하는 다큐 <장기자랑>(2023) 속 엄마들은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보낸 이들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 아무리 외쳐도 답이 들려오지 않을 때 그들은 연극을 시작했다. 남들이 어떤 가시 박힌 말을 할지 짐작하면서도 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대에 올랐다. 

이제 그날을 보여주는 영화는 더 이상 눈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일상을 버텨내는지, 어떻게 진실을 밝히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유가족다움’이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줬다. 엄마들이 단원고에서 공연했던 날, 이 모든 것을 알고 공연을 보았던 학생들의 공감은 유가족이기에 어찌해야 한다는 그 무수한 거절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가 전부라고 생각될 즈음, 영화 <너와 나>(2023)는 그날을 기억하는 관객들의 상상을 등에 업고 수학여행을 앞둔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부려놓았다. 수학여행 전날, 두 여고생이 보내는 재미있고 긴장되는 하루는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안산이라는 지명, 제주로의 수학여행 등의 표지는 사정상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한 친구의 이후를 상상케 하면서 그들이 함께 다녔던 공간이나 나눴던 대화들을 돌아보게 한다.

<너와 나>는 꿈속에서 죽어 있던 네 모습이 너이기도 나이기도, 또 우리이기도 했다는 말을 통해 이 지난한 고통을 우리가 함께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따스하면서도 애절하게 설명한다. 관객들은 영화가 짚어가는 힌트로 그들의 자취를 훑으면서 꿈과 상상 혹은 현실이 혼재된 두 사람의 일상에 동행한다. 이 과정으로 우리는 그들의 미소가 아름답다는 것에 절망감을, 우리가 아직 그때를 기억하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 그날을 기억하는 영화들은 더 이상 아픔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분노에서 아플지라도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는 쪽으로 이행한 것은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지난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10여 년에 걸쳐 확인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고, 기억할 방법은 일상처럼 마주하는, 너와 나의 일이라는 바로 그 감각으로의 전환이지 않을까. 

그날이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듯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도 계속 흐를 것이다. 천천히 스며들어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는 것처럼.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1) 이는 <가을로>(2006) 속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나, <로봇, 소리>(2016), <힘을 내요, 미스터리>(2019) 등에서 묘사됐던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이 긴 시간 후에야 사건이 인물들의 전사(前史)로 제시된 것, 적은 편수의 영화들로 소환됐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사고 이후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사고들과 긴 시간 목격된 사고와의 차이가 이런 간극을 불렀을 것이다.
(2) ‘지금, 여기’라는 명제가 중요한 연극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연극계에서는 세월호와 그 이후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작품을 통해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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