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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을 넘는 즐거운 상상, <챌린저스>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을 넘는 즐거운 상상, <챌린저스>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4.06.10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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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만큼 육체가 내뿜는 환희에 집착하는 감독이 또 있을까. 사회적 금기를 우회하지 않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펼쳐내는 그의 작품은 언제나 인물들의 몸을 탐닉한다. 감독의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듯 얼마 전 개봉한 <챌린저스>는 포효하는 육체들로 가득하다. 밀도 높은 스포츠 영화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테니스 코트에서 막을 올린다. 손에 땀을 쥐는 랠리가 한창이지만 카메라는 유유히 네트를 타고 한 여성을 향한다. 줄타기를 마친 카메라가 도착한 곳에 불안한 표정으로 경기를 관람하는 타시(젠데이아)가 있다. 이 흥미로운 클로즈업은 영화에서 그녀가 수행하는 역할을 암시한다. 타시는 두 테니스 선수의 관계를 매개/촉진하는 네트이자 동시에 스포츠 경기를 즐기는 한 명의 관객이다. 네트 위를 걷는 것이 테니스 코트 안에 유일하게 ‘불가능한’ 동선임을 상기한다면, 그녀에게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반복되던 금기의 매혹을 덧씌울 수 있다.

타시가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패트릭(조쉬 오코너)의 집을 방문하며 네트, 관객, 금기의 메타포가 본격적으로 교차한다. 패트릭은 아트에게 첫 자위를 가르쳐준 육체 선배다. 두 남자를 둘러싼 섹슈얼한 에피소드는 이후 그들의 애틋한 관계와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대개 수컷들의 본능적인 경쟁의식을 자극한다. 서로를 죽일 듯 잡아먹으려는 남성들 사이에는 늘 네트처럼 두 사람을 가로지르는 타시가 있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너가 먼저 쌌을걸.” 남근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린다. 침대로 무대를 옮겨도 테니스 코트의 구도는 여전하다. 관능적인 팜므파탈은 자신의 육체를 탐하는 가여운 남성들과 차례로 입을 맞추며 서브를 받는다. 본능이 몸을 지배할 때쯤 네트의 여신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무아지경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타시의 위치를 관객석에 고정하는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 역시 한때 저돌적인 육체미를 과시하며 코트를 누비던 선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이후 그녀가 두 남성 모두에게 코치직을 제안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챌린저스>에서 ‘선수(player)’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선수를 관리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감독’ 또한 중의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두 남자를 적절히 조련하는 타시의 행동은 그녀의 연출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한다. 13년 전의 승부와 아트가 ‘챌린저스’ 리그에 도전하게 된 것 모두 욕망을 추동하는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네트형 스포츠는 골대가 필요한 여타 종목과 달리 네트가 코트의 중심을 차지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물망이 있다면 어디든 경기장이 될 수 있다. 그녀가 있는 곳이 곧 경기장이고, 모든 경기가 그녀로부터 시작된다면 ‘매력적인 관객’에 머물던 타시는 테니스 코트라는 무대 전체를 관장하는 감독의 지위를 얻게 된다.

<챌린저스>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맞물리며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수많은 타임라인 중 하나에서 아트와 패트릭은 라켓의 목에 공을 가져다 대는 은밀한 사인을 주고받았다. 이는 곧 13년 뒤 두 사람의 경기 장면과 결합하며 수컷의 패배감을 극대화한다. 내 아내와 잤던 놈이 세트를 이기고 나에게 바나나를 들이밀 때, 한입 베어 물린 바나나는 잘려 나간 아트의 남성성을 은유한다. 망할 바나나는 곧 기름진 츄러스로 전치되며 두 남자의 성향 차이를 드러낸다. 이 모든 역사를 꿰뚫고 있는 감독 타시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강한 남성과 약한 남성, 두 배우 사이의 틈을 메꾸어 기막힌 무대를 연출하는 것.

 

끈질긴 삼각관계가 종국에 이르며 타시는 패트릭에게 결말이 정해진 연극 한 편을 제안한다. 유약한 남자를 위한 시나리오에 봐주는 것이 들통나면 안 된다는 구체적인 연기 디렉팅이 덧붙는다.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마지막 무대는 영화가 내내 간질이던 금기의 환희로 가득하다. 테니스공과 코트 바닥을 횡단하는 ‘불가능한’ 시점 샷이 전자 테크노로 고조된 분위기를 이어받는다. 영화는 인간의 눈이 결코 보지 못할 광경을 스크린 위에 재현하며 타시를 포함한 모든 이가 그토록 열망했던 끝내주는 광경을 선보인다.

경기 내용은 시나리오와 다르게 흘러가지만, 감독은 희열에 가득 차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영화는 때로 의도치 않은 우연의 절묘한 개입을 환영한다. 그렇다면 타시를 사로잡은 쾌감은 지극히 영화적이다. 배우들은 자신들만 아는 사인을 은밀히 주고받으며 감독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욕설조차 비신사적 반칙(violation)으로 치부되는 엄숙한 코트에서 두 남자는 기어이 금지된 선을 넘어 몸을 맞댄다. 두 선수의 몸이 동시에 네트에 닿았으니, 심판은 곧 한 선수에게 점수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전광판의 숫자 따위는 이미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눈 앞에 펼쳐진 끝내주는 무대에 스크린 안팎 모두가 ‘금기’를 ‘즐거운 상상’이라 읽으며 네트를 뛰어넘는다.

 

사진 : 네이버 영화,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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