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시작이 반항이라면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촉발한 파시스트 체제는 1970년대 후반까지 약 40년간 지속되었다. 체제의 종말 또한 프랑코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국가의 민주화는 억압되었던 시대의 청춘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이 시기 스페인 영화계에도 거장 루이스 부뉴엘 감독을 잇는 젊은 피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등장한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를 부모로 둔 탓에 유년기를 수도원에서 보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16살에 수도원을 뛰쳐나온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그간 파시스트 체제에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관념과 애정관을 강렬한 색채와 미장센을 활용해 영화 속에서 폭발적으로 표현해낸다. 그리고 순식간의 자신만의 영화 세계, ‘알모도바리아나’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자유의 통로’가 될 수 있냐고 혹자가 묻는다면, 70년대 스페인의 젊음들에게, 적어도 알모도바르 감독에게 있어 ‘죽음’이 ‘자유의 통로’였다는 명제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죽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또 보편적인 삶에 대한 반항이 그에게는 ‘자유’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지구를 향해 내던져진 존재’ 즉 ‘피투적 존재’라고 말한 하이데거처럼 페드 알모도바르는 영화를 통해 피투하는 삶을 살았다. 이 ‘피투’라는 단어는, 자의와 상관없이 지구에 던짐을 당한 존재라는 의미처럼 10대 시절 수도원을 빠져나와 스크린을 목도한 후 영화판이라는 길 위에서 내달리기 시작한 그에게 퍽 잘 어울린다.
하지만 <페인 앤 글로리>(2020)를 기점으로 그는 변화한다. 대표적 전작들(<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나 없는 내 인생>(2003), <나쁜 교육>(2004)등)과 <페인 앤 글로리>는 다른 선상에 있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이 자유라는 방아쇠를 기준으로 내달렸다면, <페인 앤 글로리>를 기점으로 그는 반항으로 내달렸던 자신의 젊은 시절과 욕망의 기록들을 순례해보고 스스로를 갈무리해 정진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어린 살바도르는 계단에 앉아 책을 읽던 중, 글과 셈을 배우고 싶어하는 젊고 잘생긴 석공 에두아르도를 만난다. 동굴집을 꾸미고 싶은 어머니(페넬로페 크루즈)에 의해 살바도르는 청년 석공의 꼬마 선생님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살바도르는 알고 배우며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그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도원에 가는 것 뿐이다. 영리한 살바도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등장한 성당 할머니는 살바도르에게 “신이 내려준 아이”라고 말하며 성직자가 되길 종용한다. 이때 살바도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 즉 “신부가 되기 싫다”는 의사를 내보인다. 집을 뛰쳐나가 마을에서 제일 높은 탑위로 올라간다. 팔짱을 낀 채 불량하게 선 채로 신의 사람이 되길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절망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머니를 그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그러나 살바도르는 결국 수도원에 간다.
수도원의 신부가 어린 살바도르와 나누는 대화는 그래서 특히 의미심장하다. 살바도르는 ‘비틀즈’와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신부는 그런 살바도르의 취향을 억압한다. 살바도르는 자신이 음악과 영화, 공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아이다. 그런데 자신이 인지한 욕망조차 거세당하고, 자신이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는 행위를 배우며 금욕을 강요당한다. 결국 어린 살바도르는 동굴집을 뛰쳐나왔던 것처럼 수도원을 뛰쳐나와 제가 원했던 것을 좇는다. 덕분에 그는 현재 시점으로 노년기의 영화감독 살바도르가 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인터뷰나 작품을 통해 공공연히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밝혔다. 또한 금욕적이고 억압적이었던 종교의 세계관이 자신과 맞지 않았다고 여러 번 고백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종종 무종교와 무신론을 혼동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무신론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은 아니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그의 세계에서 무신론이란 신의 존재는 인정하나, 신의 개입을 거부하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스스로 감독이라는 존재자가 되길 원하며, 자신의 세계를 축록하기 위해 자꾸만 침투하려는 외부의 압박들로부터 ‘반항’한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를 대표하는 단어는 ‘자유’가 아니라 ‘반항’이다.
아래의 어둠 위의 빛 그리고 사이의 신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관념은 물이다. 문명의 발생이 물에서 시작한 것처럼, 그의 자전적 고백 또한 물 속에서 이루어진다.
<페인 앤 글로리>이전 영화는 그의 ‘욕망’을 수면 위에 배치했다. 반면 <페인 앤 글로리>속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욕망을 물속에 두고 감정을 물면의 자리에 두었다. 그의 자전적 캐릭터인 노년의 살바도르는 생의 흔적에 따라 따라 발현하는 신체적 고통들을 말하기 위해 그리스 신들의 사례를 은유한다.
“어둠은 그늘 아래 존재하고, 빛은 위에서 내리쬔다.”
영화 초반, 살바도르는 물 속에 잠긴 채 두 팔을 벌리고 기마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다.그의 나신이 푸른 물 속에서 클로즈업 된다. 이후 카메라는 몸의 중추인 등뼈를 훑는다. 화면 속에 드러난 기다란 수술흉터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앉아있던 성모의 피에타상을 떠오르게 한다. 전지전능한 신들 또한 고통과 희생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처럼. 물 속에 잠긴 살바도르를 정각으로 피사체를 훑어내려가는 카메라 앵글은 그리스 철학인 에이도스를 떠오르게 한다. 플라톤 철학에서 에이도스는 이데아와 같은 뜻이지만, 아리스트텔레스 철학에서는 존재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을 말한다. 물 속에서 살기 위해선 숨을 멈춰야 한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본질이다. 참을 수 있을 만큼 숨을 멈춘다는 것은, 의지가 없다면 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숨을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것과 같다.
살바도르 또한 숨을 멈춘다. 죽기 위한 숨이 아니라 살기 위한 숨이다. 숨을 멈춘 덕분에 자신을 존재하게 한 본질을 마주한다. 이 순간 살바도르의 현재는 정지한다. 정지해 잠긴 몸 위로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살바도르의 의지를 시험하고, 그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수영장의 물이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서 물은 시냇가에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있던 유년기, 즉 팩션으로 회귀하게 하는 첫 번째 매개체다. 그의 유년시절에는 꼭 물이 등장한다. <중독>의 나레이션 속 한 구절처럼 물은 “바다의 밑바닥, 강의 옹달샘,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어했”던 아동기를, 뜨거운 햇빛 아래에 앉은 자신을 그려주고 회반죽을 지우기 위해 나신에 물을 끼얹던 석공에 대한 기억을, 인생이라는 지도에 지형학적 융기를 일으키는 한때의 열병같던 감정을 떠오르게 한다
살바도르가 미술관 초대장에서 석공의 그림을 발견한 순간, 이 그림은 유년기의 추억과 긴밀하게 조응한다. 살바도르는 석공이 그림 뒤에 쓴 편지를 읽는다. 이때 살바도르는 육체적 회복에서 나아가 정신적 회복에 대한 의지를, 또한 격렬한 마음의 격동을 겪는다. 어린 살바도르는 석공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읽고 쓰고 싶으면 글자를 마음으로 배워야 하고, 있는 글자를 불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읽고 쓰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게 하는 건 진실된 감정이라는 것을 토로하는 것이다. 물론 어린 살바도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은, 그래서 기억에 의지한 진술은 조작의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살바도르를 통해 현재의 살바도르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만큼은, 그만큼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실로 자전(自傳)과 전기(傳記)는 다르다. 대부분 자전은 스스로 쓰고, 전기는 남이 쓰는 것이다. 자전은 살아 있을 때 탄생하고, 전기는 죽은 이후에 등장한다.
실존하는 이야기의 발견
영화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현재의 살바도르는 오랜 시간 묻어뒀던 시나리오 <중독>을 연극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한다. 무대에 올리는 조건은 시나리오 원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저작권을 알베르토에 넘긴 살바도르는 <중독>은 고해하는 글이므로 자신의 작품으로 상연할 수 없고 작은 공연장에서 상영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사전적 의미의 고해란 ‘세례를 받은 신자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신부를 통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고해는 역설적인 고해다. 죄를 뉘우치고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정을 벼리고 세계를 존립하기 위해 스스로를 용서하는 대장장이의 도정이다. 이처럼 살바도르는 알베르토라는 페르소나를 빌려 스크린 밖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돌아왔음을 고해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다시 감독으로서 알베르토를 가르친다. 감정을 죽이고 조절하며 울 기회가 있어도 울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배우란 울 수 있을 때 우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다.
<중독>의 성공적인 상연은, 살바도르와 페데리코를 다시 만나게 한다. 표면적으로 <중독>은 살바도르의 연인이었던 페데리코와의 관계를 소재로 한 모놀로그 형식의 극이다. 이야기 속 그들은 1980년부터 꼬박 3년을 함께 살았고 페데리코의 헤로인 중독으로 인해 이별한다. 그러나 이 이별의 이면에는 페데리코에 대해 도처에 펼쳐진 살바도르의 죄책감이 산재한다. 자신이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하는 사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페데리코가 마약으로 인해 망가졌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살바도르는 페데리코를 위해 기도했고, 페데리코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으로도 구해낼 수 없는 결여가 있다는 것을 마침내 인정하게 된다. 페데리코는 살바도르가 결단한 이별로 인해 마드리드를 떠나 삶을 되찾는다. 대신 살바도르가 마약에 중독된다. 마드리드에 홀로 남은 살바도르는 신이 아닌 영화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의 고해가 상연되는 사이 상속문제로 32년만에 마드리드에 들른 페데리코가 우연히 <중독>을 본다. 그리고 살바도르와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챈다. 그는 무대 뒤에서 분장을 지우던 알베르토를 찾아가 살바도르가 아직 살아있는지 묻는다.
마침내 살바도르와 페데리코는 만난다. 선혈이 끓어 오르던 선명한 젊음의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청년은 수북한 수염과 흰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이 되었다. 전화통화를 하며 자신의 집 문앞을 서성이는 페데리코를 본 살바도르는 용기를 내 그에게 만나자고 말한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애써 씻고 단장한다. 마약에 절어 살던 살바도르는 페데리코를 만나기 직전 마약을 꺼낸다. 그러나 마약을 하지 않는다. 연기를 할 때 만큼은 맨 정신으로 진심을 다하고 싶다는 알베르토의 말처럼, 맨 정신으로 페데리코를 마주하기로 한다. 살바도르는 오랜만에 건장해보인다. 지나간 이야기부터 할 지, 건배부터 할 지 묻는 페데리코의 질문에 호기롭게 데킬라 잔을 집어든다. 이별 후 지금까지 여자를 만나고 있으며 아들 둘을 두었고, 살바도르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남자였다고 말하는 페데리코의 이야기를 듣는다. 살바도르는 눈물을 참는다. 살바도르와 페데리코의 얼굴에 인각된 주름은 내내 웃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서로를 부지런히 속힌다. 그러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은 수영장의 물처럼 흐르지 않고 마르지도 않은채 고여있을 뿐이다. 페데리코는 떠나기 직전 살바도르에게 묻는다.
“여기서 자고 갔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하지만 신이 정해 준 대로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우리가 언제 신을 신경썼다고.”
이성에 의해 파악되어야 할 원리의 체계를 도덕이라 칭하고, 원리에 따라 행동하려는 선택을 역전하는 동기 부여가 감정이라고 지칭된다면 이별 후 살바도르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페데리코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각각 거울대칭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살바도르는 페데리코 앞에선 신을 찾는다. 페데리코는 살바도르 앞에선 신을 신경쓰지 않는다. 삶이 어떻든 둘은 함께 살던 과거를 떠올린다. 이처럼 도덕도 감정도 어느 한 쪽에만 국한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다른 사물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또한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해 혹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다양한 양태적 삶을 산다는 점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실존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살바도르는 페데리코를 떠나보낸 이후 남은 마약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만약 신이 정해준 이야기가 여기까지라고 해도, 살바도르의 이야기는 실존할 것이고, 계속 될 것이다.
온 순간 출발하는 이야기
살바도르는 마약을 끊기로 한다. 그리고 즉시 의사에게 자신의 몸상태를 고백하며 재활의 의지를 다진다. 몸이 고장나서 우울했고 우울했기 때문에 몸을 고칠 수 없었다면, 그의 우울은 이제 해소되었다. 그는 다시 영화를 하기 위해 몸을 고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오래된 문제처럼, 고통과 영광도 정해진 순서는 없다. 영광 뒤에 고통이 오고, 고통 뒤에 영광이 온다. 의사는 살바도르에게 다잡은 마음과 자제력이 그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살바도르는 강철같은 의지로 재기에 성공하겠다고 말한다. 자제력은 참는 것이고, 의지는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감정은 본질적으로 시작점이 다르다. 살바도르는, 말하자면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제 자신의 욕망을 담가두었던 수중이 아닌 물 위에서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또 다시 억압이 아닌 시작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살아가고 있다.
글·이지혜
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3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A)으로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영화평론가 및 문화평론가로 활동중이다. 대중문화와 기술인문(AI,NFT,메타버스,챗GPT)을 연구하고 있다.
인스타: leehey_cine 이메일: leehe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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