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스트 라이브즈>의 연극성과 나영의 “첫 마지막 시선”
셀린 송(송하영)의 첫 장편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2023)는 수많은 수상 기록과 함께, 2024년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로 선정되는 놀라운 성과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화제작이다. 이렇게 화려한 데뷔는 자신의 ‘더블’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나영(노라, 그레타 리)처럼 극작을 본업으로 한 ‘글쟁이’ 송 감독이 쓴 탁월한 각본 덕분이다.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은 바로 연극성, 그리고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을 활용한 서사 구성과 편집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타연극적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해럴드 핀터의 메타영화적 구조를 가진 연극 <배신>(Betrayal, 1978)을 연상시킨다. 두 작품은 연대기적 시간의 질서를 벗어난 극적 시간의 구성과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삼각관계의 설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엔딩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의 첫 시퀀스와 거기서 마주친 나영의 시선은, 혼란스러운 시간의 배신과 주인공 엠마의 모호한 시선과 겹쳐진다. 연극 무대의 배우들처럼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사람, 그들을 보고 있는 관객의 존재를 시사하는 보이스-오버로 구성된 연극적 스펙터클로 시작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서서히 관객을 향하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여자의 혼란스럽지만 당찬 시선으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엠마처럼 삼인극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주연 배우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영화의 시작과 엔딩에서 발견한 나영의 슬프고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시선은 사무엘 베켓이 핀터에게 보낸 『배신』에 대한 한줄 평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베켓이 말한 “빛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어둠 속에서 그 첫 마지막 시선”(1), 바로 그 시선을 여기서 마주칠 수 있다. 엠마의 첫 마지막 시선이 삼각관계의 불륜과 배신보다는 이를 미끼로 그 이면에 전개되고 있는 시간의 배신과 되찾기로 유도하듯이, 나영의 시선 또한 세 사람 사이의 관계, ‘인연’을 화두로 잃어버린 시간과 전생 찾기로 유도한다.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이 영화는 관전 포인트까지 제시하며 시작부터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영화 속 관객을 시사하는 보이스-오버는 새벽 4시에 뉴욕 이스트빌리지 한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특이한 조합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는 세 사람이 도대체 어떤 관계이고 누구일까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나영의 모호한 ‘첫 마지막’ 시선을 클로즈업한 화면은 플래시백을 통해 24년의 시간과 태평양을 가로질러 서울로, 나영과 해성(유태오) 뿐 아니라 이들의 대화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서(존 마가로)까지 세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는 과거의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시간은 그 근거에 두 가지 흐름,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되는 과거로의 흐름으로 구별되는 동시에 공존하는 두 가지 흐름을 감추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두 흐름을 스크린에 담을 수 있는 매체이다. 공존성과 동시성의 질서 속에 출현하는 각각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는 주요 시간 기법이 플래시백이다. 그러나 플래시백은 기본적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그리고 다시 우리를 현재로 되돌리는 폐쇄 회로에 갇힌 시간의 흐름을 담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단지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액션에 미치는 결정론적인 액션의 서사로, 즉 나영과 해성의 이루지 못한 사랑 또는 억압된 강렬한 욕망의 이야기로 서사를 완결하여 재구성하기 위한 기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적인 플래시백 기법을 넘어서서 이 영화는 폐쇄 회로를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즉 보존된 과거와 미래로 향하여 나가는 시간의 흐름, 시간의 이중적 흐름을, 이 영화의 화두를 빌면 전생과 현생을, 나아가 미래로 나가는 시간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기법으로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잃어버린 시간 찾기와 진실 찾기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의 엔딩에서 그의 긴 소설 쓰기가 엔딩에서 시작한 시간과 진실 찾기 여정임을 밝힌다. 이 영화 또한 엔딩에서 시작한 잃어버린 시간 찾기이다. 잃어버린 시간 찾기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과거를 기억-이미지가 아니라 보존된 과거 그 자체를 소환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플래시백의 1차적 관객은 바로 나영과 해성, 그리고 아서이고, 관객은 그들의 보기를 보고 있음을 연극적 스펙터클의 도입을 통해 시사한다.
세 사람의 보기는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보기의 시간으로서 현재는 지나가는 현재가 아니라 탈현실화된 현재, “탈구된”(out of joint) 시간이다. 보기는 연속의 시간 질서, 즉 액션-이미지의 시간 질서를 벗어난 하나의 ‘사건’이다. 그 사건의 체험은 연극의 막 혹은 막들 사이의 ‘사이’(pause)에 비유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플래시백 기법과 편집에 의한 시간의 재구성으로 이러한 사이를 표시한다.
보기의 시간 사이로, 세 사람을 인도한 사건의 시작은 나영의 떠남에서 시작된다. 24년 전 나영의 갑작스러운 떠남은 해성에게 예측할 수 없는 간극과 폭력을 초래한다. “네가 확 가버려서 열 받았기 때문”에 그녀를 찾았던 것이라는 해성의 대답은 질 들뢰즈가 푸르스트 읽기에서 지적한 진실 찾기를, 잃어버린 시간 찾기를 시작하도록 강요한 “폭력”이 행사됐음을 의미한다(2).
“떠나는 사람”으로서 나영은 2번 해성을 떠났다. 24년 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을 때, 그리고 12년 전 SNS상에서 그녀를 찾은 해성과 헤어졌을 때, 그녀의 떠남은 모두 노벨상, 퓰리처상 수상의 꿈으로 대변되는 커리어를 위한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꿈을 잊은 채 비교적 성공적인 작가로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유대계 백인 작가와 살고 있는 그녀가 남성다운 매력을 가진 “너무도 한국적인 남자”, 12살의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함으로써 그녀의 보존된 과거를 소환시킬 수 있는 해성을 만났을 때, 흔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의 이중적인 역동적 동요 속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다시 당김과 미래에 대한 현재의 미리 당김 속에서 그녀가 찾게 된 진실은 아서와의 결혼 생활이 그녀가 선택한 현생이라는 것이다.

되찾은 전생들
송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영한 이 영화의 발단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그녀의 미국 남편과 어린 시절 첫사랑의 한국 남자 사이에 앉아서 경험한 “다른 차원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은 기이한 감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서사 구조는 플래시백의 창조적 활용으로 나영, 해성, 둘 사이에 끼게 된 아서, 세 사람의 “인연”이 만들어낸 보존된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를 통해 소환된 이질적인 차원의 지속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다시 첫 장면의 연극적 스펙터클로 돌아와 엔딩 시퀀스를 전개한다.
마침내 듣게 된 세 사람의 대화에서, 나영이 해성에게 24년 전 떠났던 그때 나영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존재하지 않는 나영은 잃어버린 시간, 지나간 시간이 변화시키고 없애버린 존재를 의미한다. 24년의 시간과 태평양이라는 빌런이 초래한 마모, 소모, 파괴, 상실의 부정적이고도 슬픈 결과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존재했고, 없는 것이 아니며, 다만 두고 온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되찾은 시간, 우리에게 절대적인 근원의 시간으로 영원성의 이미지를 주는 보존된 과거에 남겨 둔 그녀의 존재를 의미한다. “또라이” 해성이가 사랑한 것은 나영이 두고 떠난 바로 그 아이, 전생의 나영이라는 것이다.
뉴욕으로 나영을 찾아와 해성이 보존된 과거의 보기를 통해 확인한 것은 전생에 “너(나영)는 너라서 떠나갔고, 너라서 좋아했고”, ”너는 떠나는 사람“이라는 진실이다. 그녀의 떠남은 창조적, 예술적 자유 또는 실질적인 자유를 얻은 여자의 선택에 따른 현생을 그리고 또 다른 현생을 창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녀의 떠남이 세 사람의 현생과 새로운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행동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이번 생에서는 해성이 떠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이러한 어색한 상황에 낄 줄 몰랐던 아서 또한 12살 나영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해성과의 만남과 인연으로 그가 들어갈 수 없는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는 나영의 마음속 일부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생 찾기를 한 셈이다.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영화각색연구자, 현대연극과 영화 비평이론, 연극, 영화, 각색에 대한 논문과 평론 등 관련 글을 쓰고 있다.
(1) Katherine H. Burkman and John L. Kundert-Gibbs (eds.), 『Pinter at Sixty』, Bloomington and Minneapolis, 1993, p.125.
(2) Gilles Deleuze, 『Proust and Signs』, Minneapolis, 1972,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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