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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영화를 읽는 법
철학자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영화를 읽는 법
  • 하상복 | 정치학자
  • 승인 2024.05.31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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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5편에 대한 국가폭력의 성찰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폭력의 관점에서』,
 (문병호˙남승석 지음, 갈무리, 2024)

1. ‘동굴의 비유’와 시각 이미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의 유명한 대화편 『국가』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있다. 어두운 동굴 속 죄수는 자기 뒤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자기 앞의 그림자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뒤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동물의 형상이며 그 소리 또한 거짓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유는 시각 이미지란 것이 인간을 얼마나 잘못된 인식과 오류의 세계로 몰고 가는지를 말해준다. 플라톤에게서 참된 인식, 즉 이데아에 대한 인식은 이미지라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것에서 성취된다. 

이 동굴, 동굴 속 죄수, 그리고 죄수 앞의 움직이는 그림자, 이는 곧, 19세기 말에 탄생해 20세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자리매김하여 지대한 정치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캄캄한 극장으로 들어간 우리의 눈과 스크린 사이에는 그 어떠한 매개도 없다. 우리와 영화는 완전한 감각적 일치를 이룬다. 우리는 뒤 돌아볼 의지와 여유 없이 영화 이미지로 구축된 세계에 몰입한다. 적어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혹은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스크린 속 이미지가 가공된 비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플라톤은 그 동굴이 ‘독사’(doxa, 감각 기관을 통하여 얻은 감각적 지식을 토대로 사람이 대상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품게 되는 견해나 신념)를 생산하는 장소라고 보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영화들은 세상과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진실을 담고 있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 이미지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서구 문명의 또 다른 한 축으로서 헤브라이즘에서 그 강력한 자양분을 흡수했던 바, 유대교는 진리란 시각 이미지와 결코 어울릴 수 없다는 교리를 확신하고 전파했다. 그러니까 ‘무한, 절대, 영속, 편재를 본질로 하는 신의 진리가 어떻게 유한하고 소멸되어버릴 특정한 이미지 속에 담길 수 있을까’라는 종교적 의문이 유대교로부터 강력한 정당성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시각 이미지가 언제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레지 드브레이(R. Debray)가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추적한 것처럼, 기독교의 탄생은 진리를 담아낼 형식으로서 시각 이미지의 가능성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신적 본질을 인간의 신체에 담아내고 있는 예외적 존재인 예수가 진리와 시각 이미지의 결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초대교회로부터 시각 이미지를 열광하고 숭배했으며 급기야 진리 형식으로서 이미지의 교리적 정통성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그 종교적 의지와 열망은 8세기 동로마제국에서 맹위를 떨친 ‘성상파괴운동’을 막아내는 힘이었다.

그 시각 이미지는 르네상스에서 세속적 차원과 결합하면서 결정적이고 당당한 승리를 선언한다. 르네상스의 사상가 마키아벨리(N. Machiavelli)는 『군주론』에서 당대 인민들의 정치적 믿음의 원천이 시각 이미지임을 소리 높여 외쳤다. 마키아벨리는 그 시각 이미지를 멀리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군주들에게 역설했다. 그리하여 시각 이미지는 정치적 진리와 관련해 양면성을 지니는 대상으로 전환된다. 정치권력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인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동원해야 하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거짓된 본성을 은폐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이용해야 한다. 

 

2. 대중문화인 영화를 중심으로 비교론 시도

19세기 말에 탄생한 영화는 시각 이미지에 대한 서구적 패러다임과 같은 역사적 궤적을 품고 있다. 상업적 목적과 분리될 수 없는 자본주의 도구이거나 억압적 권력의 미학적 정당화 수단인 영화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 이미지는 우리를 자본주의적 소비자와 몽상가가 되는 것을 방조하거나 조장한다. 파시즘적 권력의 나신을 은폐하는 장치가 되어 우리를 탈(脫)정치화한다. 

하지만 영화가 그와 같은 부정적 운동만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놀라운 기술적 능력에 힘입어 인간과 사회의 진실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현현의 인상적인 양상을 드러내 주었다.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으로 이어지는 시간,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 프랑스의 전위 영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 등은 영화가 정치적 참됨을 담아내는 이미지 형식이 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설득해주고 있었다. 

영화 연구자이면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기도 한 남승석과 독일 현대사상을 전공한 실천적 철학자인 문병호의 협력으로 탄생한 공저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폭력의 관점에서』는 정치적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영화적 실천이라는 문제를 넓고 깊게 제기하고 그에 답하려는 역작이다. 

저자들은 영화의 정치적 진실 인식 능력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Theodore Adorno)와 그의 운명적 동료로서 영화의 진리 발견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지 않은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사상을 축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인상 깊게 수행해냈다. 

주지하는 것처럼, 영화의 진리 전망과 관련해 이 두 사상가 사이에는 쉽게 허물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은 곧 이 저자들이 지향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발표한 이래 영화의 역사는 벤야민의 소망대로 대중의 의식을 계몽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영화의 역사는 아도르노가 간파하였던 대로 대중을 조작하고 기만하며 상업성과 오락성에 묶어 두는 수단,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이 통찰하였던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지각 매체이자 시각과 청각을 아우르는 예술 형식인 영화가 예술이 갖는 능력인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 능력, 의미 매개와 의미 형성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이윤 추구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상업 영화와 오락 영화가 영화를 지배하는 경향이 지속되고 있더라도 순수예술작품으로 성공한 소수의 영화가 갖춘 예술적 능력을 도외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박한 인식 하에서 공동 저자들은 이 책을 집필하였다.” -p.16~17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과 아도르노 사이에 놓인 이념과 해석의 긴장을 변증법적으로 넘어서기 위한 저자들의 의도를 감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이 역작인 이유를 발견한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문화적 무대 위에 세워 그 두 사상을 비교하는 작업들은 있어 왔지만, 그들의 사상적 대립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중문화인 영화를 중심으로 비교론을 시도하는 주목할 만한 작업은 그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3.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이미지 장치 

남승석과 문병호는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네 나라의 영화를 선택해 영화의 정치성, 영화의 예술성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멀게는 제국주의 역사로부터 현대사에 이르는 시기까지 동아시아 네 나라들이 정치사회적 근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국가적 구성원들에게 행사해온 폭력과 억압과 고통의 역사를 영화가 어떻게 재현하고, 고발하며, 해방의 길을 제시하는지를 해석하고 분석한다. 그들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영화들로 <공동경비구역 JSA>(2000, 한국, 박찬욱), <택시운전사>(2017, 한국, 장훈), <여름궁전>(2007, 중국, 로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2017, 대만, 에드워드 양), <복수는 나의 것>(1979,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을 선정했다.

저자들은 분단 체제하의 구조적 폭력, 부당한 군부 권력의 날과 같은 폭력, 중국 공산당 지배의 무자비한 폭력, 대만 국민당 정부의 권위주의적 폭력, 군국주의에서 유래하는 억압적 사회의 폭력, 말하자면 국가폭력으로 통칭되는 폭력에 의한 동아시아인들의 삶과 인격과 영혼의 유린과 파괴의 과정을 이 영화들이-때로는 적나라하게 때로는, 저자들이 말하는 ‘알레고리’를 통해 비유적으로-어떻게 재현해내는지를 흥미롭게 해석한다.

이 책이 주는 놀라움은 아마도 정치적 텍스트로서 영화의 이미지, 서사, 구조를 너무나도 정교하고 정치하게 분석하고 있고, 그러한 텍스트 분석에 조응하는 길 위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주요 개념들을 적용해 동아시아의 국가폭력을 보편적 차원으로 전환해내는 저자들의 노력이다. 저자들은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가 자행하는 폭력과 이로 인해 개별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이라는 주제를”,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사상을 통해 근본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두 사상가의 사유는 언제나 세계가 인간에게 강요하는 고통이 공통분모라는 통찰을 제시하기”(p.14)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비극적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 영화들의 정치성이란 관객들에게 근현대 정치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주체인 국가와 이념이 인륜에서 얼마나 파괴적이고 무도한가를 폭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진보를 향한 과정이고 국가는 그 과정의 궁극적 구현체라는 헤겔(G. W. F. Hegel)의 역사철학은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무너지고 있고, 영화는 그 점을 설득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은, 영화의 비극적 주인공들은 그렇게 소멸되어야 할 운명인가? 유희, 폭력, 자살, 살인으로 둘러쳐진 악의 세계 속으로 그들은 사라져버릴 존재들인가? 이러한 문제 앞에서 저자들은 ‘구원’의 전망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곧 벤야민과 아도르노 사상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삶이 살고 있지 않는”(p.147) “세상 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을까?”(p.146)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저자들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이 영상들은 슬프고 추한 세계를 증언한다. 이 증언에는 세계가 변혁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동경이 함께 들어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개별 인간의 삶이 폐기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소망, 폭력으로서 기능하는 국가권력에 의해 개별 인간의 삶이 파편화되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 제국주의, 군국주의와 같은 광기와 폭력의 총체적인 체계가 세계에서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망이 들어 있는 것이다.” -p.25

여기서 우리는 저자들이 생각하는 영화의 예술성을 인식한다. 영화는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이미지 장치로서 정치적이지만, 그리하여 그 영화 텍스트는 역사학과 정치학을 기반으로 하는 분석의 대상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는 우리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적 현실 너머를 그릴, 아직 도래하지 않고 있지만 반드시 도래해야 한다고, 도래할 수 있다는 믿음의 근원으로서 유토피아의 의지와 열망을 담고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영화는 초월적인 예술이다. 그렇게 저자들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고 상상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관련해 중대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폭력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한 이 저서의 학술적, 대중적 잠재력을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남게 되는 아쉬움을 말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두 저자가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사상을 축으로 영화 해석에 집중한 나머지,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지평이 좁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평자는 지울 수 없었다. 두 사상가의 이념을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필요에 따라 다른 이론가들과의 접맥을 시도했다면 더 흥미롭고 입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다.

 

 

글·하상복
목포대학교 정치언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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