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임은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갖는 모임입니다. 그리 비싸지 않지만 나름대로 스토리가 담긴 와인을 한 병씩 들고 와서 와인 소개도 하면서 교제하는 동호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와인 공부 겸 친교하는 이런 모임이 나이 들어가는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신한캐피탈의 정운진 대표는 기업을 상대로 한 금융 영업의 책임을 맡고 있다. 그는 캐피탈의 업무 성격상 하이 리스크의 심적 부담이 큰 만큼 와인의 부드러운 템포에서 위안과 재충전의 기운을 얻는다고 말한다. 캐피탈 분야의 전문 지식 못지않게 와인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잘 알려진 그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나라셀라 도운빌딩에서 만났다. 커리어의 정점에 선 한 금융맨의 일과 와인, 인간관계의 조화로움을 들어보았다.
와인을 즐겨 마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약 20년 전 도쿄 지사에서 근무할 때 마흔을 넘기면서 더 이상 하드 리큐어를 마시기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음주가 생활에 지장을 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대안을 찾게 됐어요. 그래서 현재는 도요스(豊洲駅)로 이전된 츠키지(築地) 시장에서 사케를 마셔보고, 바로 옆에 있는 긴자에서는 와인을 마셔보면서 이리로 가야할까, 저리로 가야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한의사들은 제 체질엔 쌀이 맞다면서 사케를 추천했지만, 글쎄요. 저는 개인적으로 와인이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와인이 가진 맛의 진폭, 거대한 스펙트럼이라고 할까요. 셀 수 없이 다양한 향과 맛에 매료됐습니다. 마침 문화적인 영향도 있었습니다. 당시 긴자에 조그마한 와인바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와인을 소재로 한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들이 발간되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가격도 지금에 비하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고요.”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와인을 주로 즐기실까요?
“그건 애주가에게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인 듯싶습니다. 좋은 날, 편안한 곳에서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과 마시는 와인은 언제나 행복한 경험을 주기 마련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업무 관련 모임에서도 와인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힘들 때, 혼자서 어울리는 음악을 들어 놓고 마시는 와인이 큰 위로를 줍니다.”

그렇다면 와인의 어떤 매력을 꼽을 수 있을까요?
“와인을 함께 마시며 나누는 대화와 교제 속에서 사랑과 우정이 깊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와인의 힘이 아닐까요. 와인은 스토리텔링을 하고 또 스토리 자체를 만들기도 합니다. 함께 나눈 향과 빛과 맛에 깃든 추억으로 좋은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가는 것이 와인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와인을 함께 하는 모임은 어떤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와인을 사랑하는 몇 분과 갖는 와인 모임을 선호합니다. 그리 비싸지 않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스토리를 가진 와인을 한 병씩 들고 와서 와인 이야기도 하면서 즐기는거죠. 나이 들면서 이런 모임이 소중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닐 거예요.”
대개 애주가에는 여러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잖아요. 대표님의 경우엔 어떠신가요?
“와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선배 댁을 방문했을 때가 있었는데, 제법 많은 와인이 베란다에 대충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와인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배는 굴러다니는 와인 중 몇 개를 챙겨 가져가라고 했는데, 그중에 제법 고가의 와인들이 있는 거예요. 열화된 오퍼스 원(Opus One) 1998년산을 가져와 지인들과 시음하는데, 먹지 못할 정도로 장맛이 나는 거였어요. 코르크가 이미 3분의 1쯤 올라와 있고, 반 정도가 끓어올라 있었습니다. 어렵게 오픈한 고급 와인을 그냥 버릴까 하다가, 그대로 두고 다른 와인을 마셨어요. 그렇게 2시간이 지난 뒤 속는 셈 치고 그 와인을 한번 따라보았는데, 상한 줄로만 알았던 와인이 놀랍게도 살아나 있었습니다. 풍부한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에 크게 매료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력을 숨긴 와인은 한국의 더운 여름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몇 해 보내고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와인에 대해 숭고함을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와인과 삶의 교차점에서
오감으로 느끼고 배우는 인생 철학
해외 와이너리에도 좀 다녀 보셨을까요?
“아무래도 바쁜 업무로 인해 많이 가보진 못했습니다. 딸이 지금은 결혼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 살고 있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그곳에 두 번 방문하였는데, 빈 시가지 변두리에 와이너리가 있어서 함께 가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와인과 간단한 요리도 제공되었어요. 늦여름 저녁 약간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마시던 프로세코의 상큼함과 멋진 포도밭 풍광이 어우러져 깊은 행복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와인 초보자에게 권할만한 와인이 있을까요?
“강한 폭탄주 맛에 익숙한 한국의 중년에게는 와인을 권하기에 매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초보자 친구를 만나면, 약간의 충격요법으로 짙고 강한 호주 쉬라즈나 아르헨티나 말벡을 들고 양곱창집을 갑니다. 거친 음식과 강한 와인의 마리아주를 경험하고 놀라는 반응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또 한마디 한다면, 비즈니스 저녁이나 직원과의 모임에서 여러 명이 어울려 마시다 보면 음주 습관이 관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혼자 식사할 때도 한 잔씩 마시게 되는데 저는 너무 잦아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슨 와인을 마시든 건강한 습관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과음은 생활에 지장을 주기 마련입니다. 건강한 음주 문화가 필요한 이유인데요. 와인과 다른 주종의 차이점이 있었나요?
“와인에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만남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잔의 와인을 마신다 해도 결코 그 자리가 불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주도할 수 있는 자리라면 주로 와인을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와인에 대한 상식이 상당한 수준이신 걸로 알고있습니다. 와인 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감으로 느끼며 배우는 것이 와인이지만, 기본적인 지식은 필요합니다. 품종, 지역, 역사, 제도 등 와인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아 가면서 와인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입문자들에게 시중에 나온 관련 서적들을 가볍게 읽어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이원복 교수가 쓰고 그린 와인 만화책은 재미있고 유익하더군요. 어느 정도 식견이 높아지고 나면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아는 지식을 자랑하며 떠드는 와인 스노브(snob)가 되지는 말아야겠지요.(웃음)”
캐피탈 전문가로서 시장 분석에 탁월한 관점을 가지신 만큼, 와인 시장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모든 세상의 이치는 욕망과 공포, 겸손과 휴브리스(Hubris, 오만)의 교차가 만드는 순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식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욕망, 즉 거품이 일어납니다. 너무나 격렬해서 마구 넘치죠. 하지만 이 거품은 언젠가 붕괴되고, 공포와 절망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져서 다시 상승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어느 수준까지 올라가고 나면 과거를 까먹고 이제 오만에 휩싸입니다. 결국 다시 추락하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주식 시장이 사라지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같은 순환을 반복할 뿐입니다. 와인 시장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던 한국 와인 시장도, 포스트 코로나 이후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예외없이 위축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당분간 수요 확대보다는 감소 압력이 더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어쩌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확대된 와인 수요가 조정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소득수준과 건강한 음주문화 확산추세를 감안하면 와인 시장이 20년 전과 같은 수준으로 급격하게 위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와인에는 오랜 기간 인류 역사를 함께해온 저력이 있습니다. 이 공포의 시간이 끝나면 다시 상승세를 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오늘 선택하신 와인은 샤또 몬텔레나, 나파 밸리 샤도네이(Chateau Montelena, Napa Valley Chardonnay)입니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이름을 알린 전설적 와인메이커 ‘마이크 그르기치’의 손길을 거친 와인입니다. 과연 안목이 대단하신데요. 이 와인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시나요?
“샤또 몬텔레나의 샤도네이는 프랑스 부르고뉴산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맛이 깊고, 산도의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그르기치가 만든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년 빈티지가 어떻게 1976년 전설적인 ‘파리의 심판’ 테이스팅에서 부르고뉴의 유명한 화이트 와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는지 이해가 돼요. 사실, 미국의 레드 와인은 토속적인 맛보다는 대체로 현대적인 풍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와인은 독특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정 대표가 인터뷰에서 보여준 와인 철학에는 인생과 인간관계, 세상에 이치에 이르는 그만의 고찰이 엿보였다. 그 남다른 깊이에 감탄하는 한편, 그가 자신의 영혼만큼이나 사랑하는 와인의 존재를 몰랐다면 수백, 수천억이 오가는 캐피탈 업무의 심적 부담을 어떻게 이겨내며 CEO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와인이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완성시켜준 것이 아닐까?
인터뷰어/글 성일권
사진 생동 스튜디오 @saengdong.studio
* 해당 기사는 나라 셀라의 협찬으로 편집ㆍ제작되는 와인 매거진 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