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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죽음, 삶과 꿈을 신비롭게 표현하다
전쟁과 죽음, 삶과 꿈을 신비롭게 표현하다
  • 성일권 | 문화평론가
  • 승인 2023.09.0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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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대표적 판화가 로만 로마니신의 작품 100여 점 선봬
전시회를 찾은 로마니신과 레샤 부부, 그리고 두 컬렉터

수년째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렵게 국경을 넘어 한국 땅에서 개인전을 갖는 우크라이나 화가 로만 로마니신(Roman Romanyshyn)의 작품들은 묵직한 예술의 신비로움과 영혼의 울림을 일깨운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조각가인 작가답게 작품마다 다채로운 상징과 기호를 통해 우화와 신화, 삶과 죽음, 꿈 등을 밀도 있게 표현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포스트모던이니 추상화이니, 전위예술이니 하는 서구의 화풍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본질적이고 전통적이며, 심미적이다.

갤러리 산수(관장 김동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213번길 28)의 특별 초대전(9월 2~27일) 오프닝 데이에 기자를 만난 로마니신은 처음 갖는 한국전시회 소감을 묻자 “조국이 한창 전쟁 중이라서 정말로 힘들게 전시회에 올 수 있었다”며, “한국 관람객을 만나보니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전쟁의 참상뿐 아니라, 우화나 신화, 민속, 성서 이야기 등 다양한 세속의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풍자하거나 재해석한 동판화 100여 점이 선보인다. 특히 세 장의 판(Cooper Plate)으로 찍는 컬러 에칭기법을 통해 다채롭고 우아한 색채가 담긴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판화에서 고난도의 작업에 해당하는 에칭기법은 금속판면에 금속 표면의 부식을 방지하는 약제인 방식제를 바르고, 그 위에 뾰족한 도구로 방식제를 긁어내어 이미지를 그린 후 부식액에 넣으면 방식제를 긁어낸 이미지 부분만 부식되어 판에 홈이 패게 되는데, 이후 방식제를 닦아낸 뒤 잉크를 발라 습기를 가한 종이에 압착시켜 찍어 내는 기법을 일컫는다. 부식액의 농도나 부식 시간에 따라 이미지가 민감하게 달라지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작가의 작품처럼, 컬러 에칭기법을 응용한 다중 플레이트 음각새김 작품은 완벽한 밑그림과 정교한 기술과 오랜 인내심이 요구된다.

 

<카드>, 88×63cm, 2019

작가는 문학과 그림에서도 많은 창작 영감과 모티브를 얻고 있는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이나 화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 문제작을 재해석한 독창적인 동판화들이 전시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르미나 부라나>의 경우 1847년 요한 슈밀러가 12세기에 만들어진 라틴어 및 초기 독일어 노래를 모아 편집한 노래집으로, 풍자시, 연애와 술을 다룬 시와 희곡 1천여 편이 수록되어 있어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로마니신 역시 자신의 창작 모티브를 여기에서 찾았다. 작가 특유의 컬러 에칭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카르미나 부라나>, 28×24cm, 2016

 

<라이언>, 12.8×14.6cm, 2013

로마니신은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창작 모티브와 철학, 표현방식 등을 친절하게 설명하다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워하는 기자의 모습에 웃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보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학과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는 그는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 문학작품의 행간, 그림의 선과 색채에서도 창작의 모티브를 느끼며, 심지어 꿈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작품의 소재를 찾는다고 소개한다.

로마니신의 그래픽 판화작품은 14회 미니프린트 국제대회(바르셀로나), 제9회 국제 미니어처 판화전(서울) 등 수많은 국제행사에서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국내에서는 그의 딸 로마나 로마니신(Romana Romanyshyn)이 아동 도서 부문에서 더 유명하다. 볼로냐 라가치상 뉴호라이즌 부문(2015)과 이 상의 논픽션 부문 대상(2018)을 받은 『큰 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임으로』, 『론도의 전쟁』을 쓴 이가 그의 딸 로마나 로마니신(38)이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작은 도시 리비우에서 활동하는 로마니신은 지금 같은 전시 상황에서는 60세 이하의 남성들은 모두 군 동원령의 대상이어서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자신은 올해 66세라서 한국에 겨우 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행 직항 노선이 없어 서쪽 국경을 어렵게 넘어 폴란드에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며, “전쟁 탓에 예술가들의 해외 전시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서쪽 지방에 살고 있어도 전쟁 통에 적지 않은 친지와 친구들을 잃어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평화로운 시대가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및 유럽 동판화의 거장으로 알려진 그는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등 수많은 나라에서 70여 회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지만 전쟁 중에는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토로했다. 전쟁과 죽음의 사선에서도 예술의 영원성을 믿고 있으며, 예술가들이 국경을 떠나 자유롭게 교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첫 한국 방문에서는 대학병원 의사로 일하는 부인 레샤가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는 듯 동행했다.

 

 

글·성일권
문화평론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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