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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2024), 순간순간 포개지는 인생의 나날들
<퍼펙트 데이즈>(2024), 순간순간 포개지는 인생의 나날들
  • 이하늘 |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8.3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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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일상이 만들어낸 리듬감

영화관에서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극 중에서 히라야마(야쿠쇼 코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었던 옅은 미소가 떠올라서일까.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얼마 만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추켜올렸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두 눈을 뜨기 버거웠지만, 청명한 색감의 하늘을 보고 있자니 히라야마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는 일본 도쿄의 시부야에 위치한 공공 화장실을 청소하는 노동자이며 그의 일상은 비교적 단순하다. 새벽녘, 거리를 청소하는 누군가의 빗자루질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히라야마는 거울을 보며 깔끔하게 면도하고 자신이 키우는 식물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출근 준비를 한다.

작업복으로 환복한 상태에서 그는 계단을 내려가 선반에 놓인 물품들을 챙기고는 밖으로 나선다. 현관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히라야마는 어김없이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고는 자동차에 탑승한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카세트테이프를 선곡한 히라야마는 Lou Reed의 ‘Perfect Day’, Nina Simone의 ‘Feeling Good’, The Kinks의 ‘Sunny Afternoon’ 등의 곡을 들으며 일터로 향한다.

4~5일간의 일상은 고정된 형식 안에서 변주를 겪는다. 청소 노동자로서의 반복적인 상황 뒤에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맞부딪치면서 묘한 생동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히라야마는 청소를 하다가 누군가 거울 틈 사이에 끼워놓은 XO게임(가로, 세로, 대각선을 같은 모양으로 맞춰야 하는) 종이를 발견하고는 보이지 않은 게임 상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왜 이런 일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냐”며 불평불만을 토해내는 동료 타카시(에모토 도키오)가 여자친구 아야와의 데이트 비용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막무가내로 팔려는 상황마저도 같이 동행해 주기도 하고(자동차에 기름이 다 떨어졌지만 지갑에 돈이 없어 돌아왔던 방향으로 가는 장면도 이어진다), 집을 나왔다는 조카 니코(나카노 아리사)로 인해 방을 내어주고는 창고 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불편함을 견디기도 한다.

 

 

야쿠쇼 코지의 침묵과 간결한 얼굴

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영화 내내 이상하리만큼 침묵한다. 때문에 야쿠쇼 코지의 주름진 얼굴 위를 스쳐가는 찰나의 감정들은 더욱 집중된다. 그간 야쿠쇼 코지는 다양한 작품에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곤 했다.

<큐어>(1997,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에서는 이성으로 사건을 판단하던 형사의 얼굴에 본능에 가까운 공포를 심어주고, <우나기>(1999, 이마무라 쇼헤이)에서는 타인을 온전히 믿지 못하던 경직된 얼굴에서 빈틈을 발견하는 재미를, <쉘 위 댄스>(2000, 수오 마사유키)에서는 원하던 목표를 달성하고는 삶에 있어 감동과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무감한 중년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멋진 세계>(2022, 니시카와 미와)에서는 오랜 감옥 생활로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얼굴에 소년미를 얹어 보여주기도 했다.

감정의 진폭을 세밀화하던 야쿠쇼 코지의 얼굴은 <퍼펙트 데이즈>를 도달해 간결해진다. 이는 빔 벤더스가 줄곧 그려내던 일명 ‘사유하는 인물들’과도 다소 차이를 만든다. 한 국가의 지정학적 특성을 개인의 얼굴 위에 묘사하던 빔 벤더스는 <미국인 친구>(1977)에서 쉽사리 감정을 읽어내기 힘든 무표정한 얼굴(들)을, <파리, 텍사스>(1984)에서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끝없는 사막을 정처 없이 헤매던 트래비스(해리 딘)의 메마른 얼굴을,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던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의 의문 가득한 얼굴까지. 사유하는 행위에 갇힌 빔 벤더스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얼굴에 생동감 넘치는 감각을 다시 새겨 넣는다.

반면에 빔 벤더스의 최근작인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인 히라야마는 일상의 풍경과 감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구체적인 사정이 그려지지는 않지만, 조카 니코를 데리러 온 여동생을 오랜만에 마주한 히라야마의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그가 본래 삶의 궤적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짐짓 눈치챌 수 있다.

히라야마의 얼굴에 가득한 평온함은 어쩌면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한 현재의 결과물인 탓이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지정학적 특성을 개인의 얼굴에 반영해오던 빔 벤더스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히라야마의 얼굴에 그려낸다. 오즈 야스지로를 동경해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를 연출했을 정도인 빔 벤더스의 일본에 대한 관심은 <퍼펙트 데이즈>에 물씬 묻어난다. (심지어 히라야마라는 이름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동경 이야기>(1953)와 <꽁치의 맛>(1962)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해당 영화는 공중화장실 개선 프로젝트 ‘The Tokyo Toilet’으로 도쿄 올림픽 개최 전에 전 세계 사람들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를 기용해 17군데의 화장실을 리뉴얼한 것인데 빔 벤더스는 연출 제의를 받고 단편에서 장편화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인 친구>,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가 사유의 과정 끝에 평온이라는 상태에 도달했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그 과정 자체가 소거되어 있는 셈이다.

 

 

순간을 기록하는 방법

사실 구조적인 측면에서 <퍼펙트 데이즈>는 <패터슨>(2017, 감독 짐 자무쉬)을 연상시킨다. <패터슨>에서 주인공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지명인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서 근무하는 버스 기사다.

4~5일간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는 <퍼펙트 데이즈>와 달리, <패터슨>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구획별로 나누어 연결하고 있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인 히라야마와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의 버스 기사 패터슨은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의 거리만큼이나 다른 형태지만 하루의 기록을 통해 리듬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거울쌍처럼 닮아있다.

우선, 히라야마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높게 솟은 나무를 올려다보는 버릇이 있는데, 이를 작업복 안에 들어있던 올림푸스 필름 카메라로 찍어낸다. 독특한 점은 히라야마가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통해 기록되는 정확하게 담기 위해선 눈을 뷰파인더에 대고 초점거리를 조절하는 등의 세팅이 필요하지만, 히라야마는 뷰파인더와 자신의 눈을 불일치 상태로 만든다. 때문에 사진은 본래 히라야마가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

패터슨의 경우, 일상의 소재를 눈여겨보다가 자신의 비밀노트 안에서 시로 변화시킨다. 책상에 놓여있던 오하이오 블루팁 성냥, 버스를 운전하며 목격한 사람들, 아내 로라(골쉬프테 하라하니)에 대한 인상은 패터슨에게 있어 시를 작성하기 위한 자극이 되어준다. 그러나 패터슨의 시가 적힌 비밀노트는 강아지 마빈에 의해 훼손되고야 마는데, 복사본이 없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패터슨은 로라의 속상하다는 말에도 “그냥 글자일 뿐이야. 물 위에 쓴”이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로라는 자신에게 들려줬더라면 기억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지만, 시의 내용을 다시 옮겨 쓴다고 할지라도 처음 작성하던 순간과 동일하기는 힘들다.

<퍼펙트 데이즈>와 <패터슨>은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서 사소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생기는 리듬감과 함께 포개지던 일상의 감각에 집중한다. 동일해 보이지만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히라야마가 휴일마다 방문하는 선술집 여주인 마마(이시카와 사유리)의 전남편인 토모야마(미우라 토모카즈)와 그림자 포개지기 놀이를 하는 장면은 ‘변화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를 관통한다. 휴일을 맞아 히라야마는 선술집을 방문하지만, 열린 문 틈 사이로 여주인과 모르는 남성이 안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리를 피한다.

이내 적적해진 마음을 숨기며 강가에서 캔맥주를 마시던 히라야마는 선술집의 그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혼한 전남편이라고 자신을 밝힌 토모야마는 병에 걸렸다고 이야기하고 두 사람은 대화를 하다 돌연 그림자 포개지기 놀이를 한다. 중년의 남성들은 어울리지 않게 폴짝폴짝 뛰면서 자신의 그림자와 상대의 그림자가 포개지는 행위를 하는데, 이때 토모야마는 ‘겹쳐진 그림자는 변한 것인지 혹은 변하지 않은 것인지’에 관해 질문한다.

이에 히라야마는 ‘변하지 않은 게 아니다’라고 답변한다. 또한, 조카 니코와의 대화에서도 히라야마가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코는 히라야마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자고 권유한다. 히라야마는 “다음에”라고 말하며,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이라고 덧붙인다.

<퍼펙트 데이즈>는 사소한 차이를 보이는 일상의 포개짐을 통해 현재를 살아낸다. 엔딩에서 카메라는 일터로 향하는 히라야마를 다시금 보여주는데, Nina Simone의 ‘Feeling Good’을 배경음 삼아 도시의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미디엄 클로즈업은 어째서인지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이다.

빔 벤더스는 야쿠쇼 코지의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 ‘코모레비’(こもれび)라는 단어를 띄우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라는 의미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순간순간들의 포개짐이 만들어낸 총체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동안, 한 번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떨까 싶다.

 

 

글·이하늘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2022년 국제비평가연맹(FIPRESI) 한국본부와 <크리티크M>에서 주관한 제1회 FM청년영화평론상 공모전에서 당선되면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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