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 별난 곳이라서 남의 고통을 즐기면서 사는 별난 사람들이 더러 있다. 국가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이나 언저리의 사람들은 수많은 비극적 상처를 보듬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희희낙락거리며 빨갱이라고 부르고, 과거 비극의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에게는 배후 세력이나 좌파들이라고 흠집을 낸다.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로 한강을 선정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써 왔다”라고 평가했지만, ‘별난’ 시위대는 주한 스웨덴 대사관에 몰려가 “왜 빨갱이에게 상을 주느냐”고 항의하고, 별난 작가와 별난 언론은 작가의 ‘왜곡된’ 시각과 작품의 편향성을 비난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국가정보원이 보수단체를 앞세워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청원 계획까지 세운 것처럼 작가 한강에 대해서 기이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이런 소란을 예상한 듯, “작가 한강의 작품이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하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오늘날 산문의 혁신을 일궈냈다”라는 이례적인 평을 덧붙였다. 작가 한강은 국가권력에 의해 신체가 찢어지며 삶과 죽음의 질곡에서 고통받았을 이들의 상처를 자기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을 뿐, 이념성을 꺼내지 않았다.
한반도를 가른 미국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 공산주의 체제 영향 탓인지 좌우가 대립하고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심했던 우리 현대사는 국가권력의 폭력에 의한 비극이 유별나게 많다. 말이 국가권력이지, 순전히 최고 권력자의 끝없는 권력욕이 낳은 무고한 국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남쪽만 살펴봐도, 권위주의 체제인 이승만부터 군부 독재 체제인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민이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해야 했다. 해방되기가 무섭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 사건(1948~1954)을 비롯해 여순사건(1948), 그리고 한국전쟁 중 노근리 사건 등 여러 차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저질렀고, 이 밖에도 보도연맹 사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다수의 민간인 학살을 벌여왔으나, 여태껏 책임자 중 누구도 처벌받은 적이 없다.
북한 간첩 소탕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매번 수백수만 명의 희생자는 대부분 북한과는 관련이 없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도 1980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게 총과 헬기, 탱크를 겨누어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했으나 시민들의 사과 요구를 끝끝내 외면했다.
작가 한강은 한국의 굴곡된 현대사 중 극히 일부만을 자기 작품 소재로 삼았을 뿐인데도, 별난 사람들이 총집결하는 것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대었던 지지대의 흔들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작품을 읽고 그의 서사나 문체를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은 “조금 이르긴 하지만 당연한 결정”이라고 평가하지만, 과거 국가권력의 폭력을 주정해온 세력은 작가 한강의 작품들이 담은 서사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질까 두려워하며 분기탱천하는 모습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과거 보수정권에서 한강과 그의 작품들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을 때 침묵했던 보수 언론들이 1면에 ‘이제는 K문학, 글로벌 한강신드롬’, ‘한강신드롬, 대한민국이 웃었다’등의 큰 제목을 달고, 한강 본인과 아버지, 과거 한강의 인터뷰와 기고 글까지 들먹이며 한강의 수상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언론은 군경의 무자비한 학살에 대항했던 시민들에 대해 불순한 폭도세력, 빨갱이, 북한 연계설을 보도해왔고, 아직도 잊을만하면 색깔론을 들먹이고 있으니 한강의 수상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싶다. 윤 대통령은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대해 대한민국 문학사상 위대한 업적이자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라고 밝혔으나, 사회 일각에서는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한강의 작품에서 트라우마로 묘사한 독재 군부 세력이 자행한 잔혹 현대사를 부정한 인사들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과 독립기념관장 등으로 임명을 강행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 이후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며 권좌를 지킨 독재자 이승만이 거대한 국부로서 추앙되고, 무고한 양민을 빨갱이로 몰면서 18년 장기독재를 이끈 박정희가 경제 국부로 추앙받는 분위기다. 그가 지휘하는 권력은 그의 재직시절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와 해병대 순직 장병 사건도 진실을 밝히기조차 꺼리고, 오히려 태극기 부대와 보수 언론은 진실 밝히기를 주장하는 세력의 배후에 불온한 정치세력의 개입설까지 주장하는 등 물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작가 한강의 신드롬이 계속되는 분위기 속에 학자나 작가라는 이름으로 보수언론의 마당에서 글을 쓰는 몇몇은 구체적 예시도 없이 한강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거나, 노벨상 위원회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해도 선을 넘어선 행위다. 과연 이들이 한강의 작품들을 읽어보기나 하고 이러는 걸까?
역사학계는 5.18과 4.3 모두 역사적 평가가 끝난 만큼, 작가 한강의 소설이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지구촌 곳곳에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그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지구적이다.
이미 작가의 시선은 저 너머에 있는 듯하다. 작가는 노벨상 수상 직후 부친 한승원 작가를 통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등 세계의 비극을 이유로 기자회견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에게 좋은 점수를 준 적이 없는 일부 국내 비평가들은 핀트의 어긋남을 지적했지만, 필자는 미뤄 짐작한다.
“스웨덴 노벨상 위원회가 상을 준 것은 즐기라는 게 아니라 더 냉철해지라고 준 것”이라고 말한 작가의 소감이 늘 그렇듯이 단단하고 결연하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끔찍한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언젠가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가 살인을 멈춰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배웠던 것들의 아주 분명한 결론이에요.”
작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권력이 입맛대로 땜질한 역사의 비극을 희화화해온 별난 사람들이 더 이상 비극을 즐기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져보길 기대한다. 좋은 문학이란 결국 비극에 대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아닐까?
글·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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