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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Numbers (8) - 서 있으면 비아그라이지만 쓰러지면 신이 되는 숫자
안치용의 Numbers (8) - 서 있으면 비아그라이지만 쓰러지면 신이 되는 숫자
  • 안치용 l ESG 연구소장
  • 승인 2023.08.3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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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인문학]

호모 헌드레드

한동안 건배사로 “99881234”라는 것이 유행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일하다가 2~3일만 앓고는 죽자는 내용이다. 요즘 건배사를 하는 술자리에 거의 참석하지 않다 보니 이 건배사가 아직 통용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핵심은 아무래도 ‘88’이다. 이미 100세 시대로 통하는 마당에 99세까지 사는 게 특별한 바람이라고 할 수 없다. 100세까지 살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건강수명 극대화 욕망이다. 수명연장보다 건강수명이 더 중요하다.

이어지는 ‘1234’는 사실상 자동기술이다. 생애를 99세로 특정했으니 그때 죽는 것(4)은 부연이다. 그때까지 일하고 싶다는 게 좀 놀라운데, 어쨌든 팔팔해야 일하든 놀든 할 수 있으니 ‘88’이 ‘1’을 압도한다. ‘23’도 마찬가지다. 저녁에 편히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죽어서 이승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고통 없는 죽음의 기대. 건강수명 연장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1’ 빼고는 노인에게 보편적 생각으로 보이긴 한다만, 굳이 건배사로 부질없는 희망을 표명하는 게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 꼭 우아하게 늙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원래 늙는다는 게 더 지혜로워진다는 뜻 아니었나. 지혜가 원래는 우아하다. 요즘 그렇게 늙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하긴 “99881234”를 어느 포털에서 검색해 보니, 이것과 연관 지어 ‘9988 복상사’란 표현이 나오는 걸 보니 지혜라는 게 늙음의 덕목이 아닌 듯도 하다. 일종의 유머이겠지만 성욕의 분출 가운데 인생의 마감을 상정한 발상이 그다지 상찬할 만하지 않다. 99세 남자(99881234에 여자는 배제된 듯하다)가 아내랑 하다가 죽으면 순직, 첩이랑 하다가 죽으면 돌연사라는, 이른바 ‘유머’는 거의 치매급이다. 

몇 cc 체액을 쥐어짜며 자기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감성에 99세란 나이를 추가한다고 애틋함이 생길까. 성관계 중 사망하는 현상을 우리나라에서 남자 복상사, 여자 복하사라고 상과 하로 자상하게 구분한 친절도 전라도 말로 참으로 거시기하다. 우아하지 않아도 거시기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냥 “99881234”가 더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팔팔하다

국어사전에서 ‘팔팔하다’는 1. 성질이 거세고 급하다, 2. 날듯이 활발하고 생기가 있다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보통 2번의 의미로 많이 쓰고 “99881234”의 ‘88’ 또한 2번에 해당한다. 
‘구구하다’란 말도 있다. 구구(區區)라는 어근은 한자에서 비롯했다. ‘구구한 학설’ 같은 용법은 가치중립적이나, ‘구구한 변명’이나 ‘구구한 마음’ 등에서는 부정적 느낌이 묻어난다. ‘구구하다’는 아무래도 좀스럽다. 

내친김에 ‘칠칠하다’까지 살펴보자. ‘칠칠하다’는 긍정적 의미를 담았다. “주접이 들지 아니하고 깨끗하고 단정하다”는 뜻이나 주로 ‘못하다’, ‘않다’와 함께 쓰인다는 게 맹점이다. “칠칠치 못한”과 같은 표현이 보통 용례다. 깨끗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으며 주접이 든 상태를 칠칠치 못하다고 말한다. 사람과 무관하게는 나무,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뜻으로 긍정적으로 활용된다. “검고 칠칠한 머리”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칠칠’ ‘팔팔’ ‘구구’ 어근에서는 팔팔의 몸값이 높아 보인다. 몸이 팔팔하다고 성질이 팔팔해서는 못 쓴다. 나이가 팔십팔세에 다가갈수록 더 그래야 한다. 

 

팔자

관점에 따라 “99881234”는 팔자소관으로 볼 수 있다. 살아가며 스스로 일구고 개척하는 일도 많지만, 타고난 한계를 넘어서는 게 쉽지는 않으니 말이다. 흔히 “살아보니 그렇더라”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게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장수 중 최고는 복장(福將)’이라는 경구는 팔자소관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흡연의 해악에 저항하고 금연에 맞서면서 자주 드는 논거가 윈스턴 처칠(1874~1965)이다. 소문난 애연가인데다 대단한 술꾼이었던 처칠이 대단한 음주와 흡연에도 장수한 것은 말 그대로 팔자소관이다. 흡연을 예로 들면 어떤 사람은 유전자 특성상 흡연이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식사 후에 곧바로 누워서 자도 소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듯이 타고나기를 다르게 타고나면 일반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문제는 소화 같은 사항은 하루에 두세 번이나 확인할 수 있지만, 음주와 흡연이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에 마침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된 어떤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을 수 있다. “이 산이 아닌가벼” 하고 하산하려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처칠 같은 이를 두고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 원래 90세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음주·흡연으로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처칠 같은 이가 아니라 처칠에 관해선 반론이 가능하다. 처칠은 평생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Black dog)”로 불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우울증에 맞서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천국에 가서 첫 백만 년 동안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회화가 우울증을 덜어주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죽을 때까지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우울증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예로,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살을 감행할까 봐 처칠은 평생 건물의 발코니나 기차역의 철로 가까이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우울증은 집안 내력이어서, 처칠의 네 자식 중 두 명이 알코올 의존증으로 죽거나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음주와 흡연이 처칠에게는 생명을 연장한 묘약이었던 셈이다. 반면 그의 아들은 음주로 삶을 연장하지 못했으니 확실히 처칠은 다르게 타고난 듯하다. 

별자리를 보는 서양인과 달리 우리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본다. 사주팔자는 네 개 기둥과 여덟 개 글자라는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며 선천적으로 지니게 된 운(運)과 명(命)을 말한다. 태어나며 모든 사람에게 년월일시(年月日時)가 주어지는데 이때 천간(天干)과 지지(地支)가 조합을 이루어 하늘과 땅에 하나의 기둥을 이루게 되며 이를 각각 년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라 하고, 운명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이라 해 사주(四柱)라 부른다. 사주는 곧 팔자이니 동어반복이다. 

많은 한국인이 그렇듯 나 또한 내 사주팔자를 대충은 안다. 태어난 시간이 조금 헷갈려 사주팔자가 달라질 수 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해 제대로 뭐 하나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낳은 어머니가 “(나를) 낳고 나니 해가 떴다”고 기억하기에 시주(時柱)가 살짝 흔들리나 대세에 지장이 없는 듯하다. 나는 목(木)이 많고 화(火)가 아주 강한 사주팔자다. 사주팔자로는 벌써 대단한 인물이 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걸 보니 확실히 사주가 믿을 만한 게 못 되는 모양이다. 

사주팔자보다는 태몽이 더 맞아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꾼 내 태몽의 배경은 어머니 친정집 뒷마당으로, 빨간(칼라로 꾸셨다) 능구렁이가 뒷마당의 돌감나무(그 지역에 감나무가 많았다)를 감아 올라가는 것으로 정몽주 태몽과 얼핏 비슷했다. 차이는, 어머니가 빨간 능구렁이가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낫으로 내리쳐 뱀이 두 동강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고 한다. 어머니가 ‘저 뱀이 죽었나 보다’ 하고 걱정하는 사이에 끊어진 두 몸이 꿈틀꿈틀 움직여 붙더니 다시 나무를 올라갔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했다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답했다. “올라갔지.”

내 팔에는 어릴 때 사고로 입은 상처가 있다. 그게 꼭 뱀이 팔을 휘감아 올라가는 모양으로 머리와 혀까지 있다. 태몽 때문에 내가 어릴 때 죽을 줄 알았다고 어머니가 무심결에 말한 적이 있는 걸로 보아 아마 태몽에서 그 빨간 능구렁이가 마지막 낫질을 당한 후에는 회복을 못한 듯하다. 어머니가 태몽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사고로 생긴 내 팔의 상처로 태몽의 불길한 기운을 액땜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그 꿈속의 빨간 능구렁이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기를 바랐다. 만일 끝내 올라가지 못했어도 사고로 생긴 뱀 ‘문신’이 액땜했다는 어머니 말을 대충 받아들이는 쪽으로 태세를 정했다. 지금은, 빨간 능구렁이가 결국엔 바닥에 떨어져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는 서사에 오히려 안도하게 된다. 끊어진 몸을 붙이느라, 또 같은 길을 꾸역꾸역 올라가느라 애쓴 어머니 꿈속의 빨간 능구렁이에게 “그만 쉬셔도 좋겠소”라는 위로를 전한다.

많이 살지 않았지만, 인생이란 게 “99881234”이면 좋겠지만(좋은가?) 팔팔하지 못한 몸으로 성질만 팔팔한 척하고는 칠칠치 못한 일들을 반복하다가 이삼일 우울해 구구한 변명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되지 않을 일을 지속하다가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복상사(복하사면 어떠랴)할 팔자를 타고나는 게 꼭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태몽에 빗대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이제 아무리 방향을 바꾸어도 낫이 날아올 것을 지각한 가운데 그래도 얼마의 높이든 나무를 오르다가 낫이 날아와 제 몸을 양단할 때의 그 느낌? 성교 중 돌연사가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은 게 성질만 팔팔해서 되지 않고 몸이 팔팔해야 한다. 

비아그라라는 대안이 있긴 하다. 비아그라는 뇌로부터 성적인 자극 메시지가 고리형 GMP(고리형 구아노신 일인산염)를 자극하면 화학 물질이 골반 근육을 편안하게 해 페니스가 평상시보다 여덟 배 높은 혈액으로 충혈하게 하는 약품이다. 송구하게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이야기다. 비아그라의 장점이자 단점은, 복용으로 무작정 충혈이 가능한 게 아니라 대상에서 자극을 받아야 8배나 피를 채울 수 있다. 대상 없는 성욕의 배제는, 일말의 우아함이 잔류한 상태라고 자위해도 좋을까. 결국 거시기하게 다시 ‘88’로 돌아온 셈인가. 

 

브라운공과대 건물 앞에서 세워진 뫼비우스띠 조각상.

뫼비우스의 띠

거시기한 태몽 이야기를 이어가면 빨간 능구렁이가 나무를 휘감아 오른 그 모양이 8자를 연상시키고 또 어찌 보니 뫼비우스의 띠를 닮았다. 만약 개미가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표면을 이동한다면 경계를 넘지 않고도 원래 위치의 반대면에 도달하게 된다. 그 길을 가다가 그 너머로 갈 수 있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축복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신성을 탐색하는 인간의 여정을 비유로써 보여준다. 곤고한 현실을 팍팍하게 뚫고 나가는 와중에 어느 사이 임재한 초월성의 광휘. 알베르 까뮈가 말한 시지프의 신화라는 게 바위를 미는 자의 애씀과 정상에서 잠깐 맛보는 해탈 혹은 초월로의 휘발, 그리고 정상에서 저만치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곧 다시 밀어 올려야 할 바위를 내려다보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거시기한 소회. 까뮈가 말한 시지프 신화의 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와 물리적으로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어머니가 꾼 나의 태몽도. 마침내 시지프가 바위에 깔려 죽어가야 한다면, 빨간 능구렁이 또한 낫에 잘려 몸이 두 동강 나야 한다면,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가 찢어지는 것 같은 결말을 통해 뫼비우스의 띠가 완성된다는 아무런 근거 없는 유추가 가능하다. 

 

무한

뫼비우스의 띠는, 수학적 설명이야 다르겠지만 직관적으로 무한(無限)의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구현 형태라고 해 틀린 말이 아니다. 뫼비우스의 띠에서 구현된 무한은 그러나 순간적으로 도달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획득가능한 것이 아니다. 99세의 복상사(복하사)처럼 느낀 순간 모두 잃는다. 주지하듯 뫼비우스의 띠와 무한 기호는 8자를 눕혀 놓은 모양이다.

서양 철학과 신학에서 무한과 유한은 오래된 주제이자 결말이 나지 않은 논쟁이다. 기실 용어 자체에 해결불능이 들어 있다. 우리말 조성의 유한(有限: Finite)과 무한(無限: Infinite)은 서양 말과 다르다. 무한으로 번역되는 ‘Infinite’ 혹은 ‘Unendlichkeit’는 반대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를 붙여서 생성된 개념이다. 같지는 않지만(같다고 하면 무한·유한의 오랜 논쟁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편의상 여집합과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무한은 자체로 생성됐거나 파악 가능한 개념이 아니라 유한에 대응해 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한을 모른다. 유한과 다르거나 반대일 것이라고만 상상한다. 유한의 개념과 현상 혹은 성상이 사실상 무한하기에 그것의 편의상 여집합인 무한의 무한성은 무애(無涯)하다. 어떤 무한이 다른 무한보다 더 무한하다는 말은 표현 자체가 모호한 말이긴 하지만 한번 해볼 수는 있다. 만일 무한이 유한의 여집합이 아니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만일 그렇다면 얘기가 더 복잡해지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는 같다. 유한을 제대로 모르는 우리가 무한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 겸손하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서양 사상에서 무한은 신(神)과 등가다. 기독교에서 무한 문제를 천착했다. 신학자뿐 아니라 철학자가 이 문제에 답을 제시하려고 애썼다. 없는 답을 찾은 그들의 노력이 어찌 보면 뫼비우스의 띠를 걸어간 개미와 닮았다. 그들이 무한의 띠를 걸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걸은 건 뫼비우스의 띠였다. 

 

무지의 지

니콜라스 쿠사누스(1401~1464)는 유한·문제를 고민한 많은 신학자 중 돋보이는 한 명이다. 유한·문제가 신학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이것이 내용상 내재성·초월성과 같은 논의이기에, 결국 인간이 어떻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 어떻게 그를 알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을 담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 세상에서 공존할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이 노력이 성공하지 못하면, 인간은 신 없는 세계의 고아나 부친살해범이 되기에 신학자들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쿠사누스의 대표작은 『데 독타 이그노란티아(De docta ignorantia)』(1440)로,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의 사상을 요약한다. ‘독타 이그노란티아(Docta ignorantia)’는 영어로 번역하면 ‘Learned Ignorance’ 정도로, 종종 ‘무지의 지’로 언급되나 ‘유식한 무지’가 더 합당한 말이다. 하느님께 관한 지식은 인간 최고의 지식이지만 불충분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쿠사누스는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지식을 제거함으로써 참다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지식에 이른다는 지성한 무지(至聖한 無知, Sacratissima ignorantia)라고 설명했다.

이 책이 ‘무지의 지’로 알려진 이유는 쿠자누스의 모국어인 독일어에서 『Vom Wissen des Nichtwissens』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독일어 번역 제목에서 ‘무지의 지는 과연 지인가?’하는 역설이 생기게 된다. 결국 지는 최고 단계에서 직관 비스름한 것에 제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수행을 통해 초월에 도달하지만 그 초월은 다시 피안으로 밀려나는 신기루다. 차안과 피안이 명백히 구분되지만 연결되고, 연결된 듯하지만 분리된 구상(具象)을 보여주는 까닭에 뫼비우스의 띠의 모양이 신의 수학적 기호에 근접한 무한을 닮은 모양이다. 8이 서 있으면 비아그라이지만, 8이 쓰러지면 무한이 된다. 신은 우리가 쓰러질 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일까.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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